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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리 이야기

작성자보르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2 목록 댓글 0
장파리 이야기
 
조용필은 가수 레이 찰스와 밴드 벤처스에 빠져 살았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교육자 집안이 반대했다. 1968년 서울 경동고 졸업과 함께 조용필은 경기도 파주 파평면 장파리로 가출해버렸다. 장파리 미군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노래를 했다. 주로 흑인 전용 클럽 블루문홀에서 했다. 백인 클럽 라스트찬스에서도 했다. 김태화, 윤항기도 라스트찬스에서 음악을 했다. 장파리에 있던 클럽은 메트로홀, 럭키바, 나이트클럽, DMZ홀과 라스트찬스와 블루문홀 여섯 군데였다.

장파리에는 미군이 뿌린 '딸라'가 흘러넘쳤다. 미군은 장파리에 재건학교를 지어줬다. 시외버스 종점도 장파리에 있었고 이발소와 다방과 극장과 정미소도 외지인들 덕에 성업을 했다. 쌀 한 가마가 3500원 할 때, 가수 이미자는 장마루극장에서 세 곡을 부르고 6만원을 개런티로 받았다. 세월이 흘러 조용필은 가왕(歌王)에 등극했다. 미군은 장파리를 떠났다. 블루문홀은 사라졌다. 라스트찬스는 카페로 바뀌었다. 장파리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기로 한다.


감악산 백비(白碑)


/감악산 정상에 있는 백비.
 
1951년 4월 23일 영국 글로스터 대대는 감악산 설마리에서 밀려오는 중공군과 혈투를 벌였다. 사방으로 포위된 상태에서 글로스터 대대는 1개 중대를 제외한 530여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전술적으로는 패배였지만, 사흘 동안 중공군 공격을 지연시키는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그들이 지켜낸 감악산 꼭대기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법륜사를 스치며 오르는 등산길은 밑도 끝도 없이 오르기만 하는 행군 수준 산길이다. 꼭대기에는 헬기 착륙장과 군부대가 서 있다. 거기에 백비(白碑)가 있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 비석이라고도 하고 신라 진흥왕 순수비라고도 한다. 하지만 비문을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어서 그저 백비라 한다. 서쪽 임진강변 장파리부터 동쪽에 솟은 감악산까지, 파주 역사에서 전쟁 흔적을 지우면 파주는 이해 불가능이다.


김신조와 초리골과 나무꾼 우성제

장파리에서 도로로는 11㎞, 직선거리로는 5㎞가 못 미치는 임진강변에 고랑포 나루가 있다. 삼국이 임진강변을 쟁패하던 시대, 고구려는 고랑포 위 절벽에 호로고루 성채를 건설했다. 서기 978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이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언덕배기에 묻혔다. 1968년 1월 19일 북한 특수부대원 32명이 청와대를 목표로 얼어붙은 고랑포 여울목을 건넜다. 속칭 김신조 부대다. 훗날 군이 파악하기로, 기관단총 31정, 실탄 9300발, 권총 31정, 대전차 수류탄 252발과 방어용 수류탄 252발, 단검 31정으로 중무장한 특수부대였다.

부대는 고랑포를 건너 파주 법원읍 법원리 삼봉산에서 1차 숙영을 했다. 동지섣달 산속 기온은 영하 15도. 날고 기는 특수부대가, 응달에 은폐한다는 원칙을 깨버리고 따뜻한 바위 앞에 짐을 풀었다. 첫 번째 실수였다. 그날 오후 1시 산 아래 단양 우씨 집성촌 초리골에 살던 우씨 형제가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올라왔다. 네 명이나 올라왔다. 이름은 각각 희제, 경제, 철제, 성제였다. 6촌, 8촌 사이였던 네 형제는 희제가 서른 살, 막내 성제는 스무 살이었다. 우성제가 말했다.

 

/김신조 부대와 만난 나무꾼 우성제.
 
"겨울에 해 먹을 게 뭐 있어. 점심 먹고 낫이랑 지게 메고 땔감 구하러 갔지. 나랑 쌍둥이처럼 같이 자란 6촌 철제 형이랑 갔는데, 앞에 방한모자를 쓴 남자 셋이 앉아 있는 거라. 아, 산 너머 갈봉리 애들이 초리골 나무 훔치러 왔구나. 나중에 뺏어야겠다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쳤어." 우성제가 산 아래 20~30m 내려가 나무를 베고 있는데, 위에서 철제 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손짓에 올라갔더니, 군인 너덧이 서 있는 거라. 아이쿠, 죽었구나 했지. 소위, 하사, 사병 계급을 붙여놨는데 딱 봐도 국군이 아니야. 개머리판 없는 AK소총에 권총에 수류탄에 지도에 주렁주렁 매달고…." 소위가 성제에게 물었다.

소위: 너희들 네 명인데 둘은 어딨나.
성제: 내려갔다. (도망가려고) 가서 데려오겠다.

소위: 됐다. 너는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성제: (형을 보며) 국민학교 2학년 나왔다(사실은 중학교 졸업했다).

소위: (철제에게) 너는?
철제: (성제를 보며 우물쭈물) 국민학교 졸업했다(사실은 중학교 졸업했다).

소위: 서울은 가봤나.
철제: 창경원 가봤다.

소위: 청와대는?
철제: 그게 뭐하는 곳인가.


척하면 척하는 쌍둥이 같은 형제들이었다. "똑똑한 청년들"이라며 숙영지까지 같이 가자는 소위에게 형제가 대답했다. "이 나무 장에 갖다 팔아야 내일 아침에 부모님 보리죽이라도 드신다. 여기서 얘기하면 안 될까." 소총으로 툭툭 치며 소위가 말했다. "거기 낫 내려놓고 따라와라." 가보니 공비들이 바글바글했다. 공비들은 사발엿과 오징어를 줬다. 이름 안 적힌 담배와 이름 없는 캐러멜도 줬다.

 

김신조 부대한테 잡혀 죽을 뻔했던 우씨네 집성촌 초리골 마을. 우씨들은 초리골을 생태 친화적 마을로 변신시켰다.


"우리가 누군가."

"26사단에서 훈련 나왔지? 수고 많다. 우리 집 가서 따뜻한 국이라도?"

"우리는 지하혁명당 소속이다. 일 끝내고 이북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잉? 어떻게 북에서 올 수 있나."

"믿어라. 우리 당원이 경기도에 5만 명, 의정부에만 5000명이다. 6개월 뒤에 남조선이 해방된다. 김일성 태양님 햇빛 받아 거지 없이 다 잘산다. 지상낙원이 온다." 성제가 맞장구를 쳤다. "와, 우리는 죽지 못해 사는데. 벼 열 가마 거두면 자본가들이 세금 가져가 끼니도 못 때운다. 그런 나라, 우리도 살고 싶네." 소위가 유식한 척 말했다. "그게 바로 현물세라는 거다."

우성제가 말했다. "나무하러 갔으니, 옷도 구멍 뚫린 작업복이었고 시골에서 세수는 무슨, 머리도 안 감고 갔으니 우리 말을 다 믿더라." 그때 집에 내려갔던 맏형 희제와 경제가 도로 올라왔다. "야, 너희 토끼 잡냐." 네 형제 몽땅 잡혔다.

밤이 왔다. 투표에 의해 형제들 운명이 결정됐다. 딱 반반씩 살리고 죽이자고 나왔다. 대장이 살린다고 결정했다. "땅이 얼어붙어서 죽여도 묻을 수 없다"는 의견이 이겼다. 우성제가 말했다. "선물이라면서 조잡한 일제 시계를 줬다. 물론 나무할 때는 당연히 차지 않았지만, 우리는 날짜랑 요일이 나오는 세이코 시계가 있었는데." 그러고 집으로 내려와 종갓집 어르신 우종하의 집에서 전화로 신고하고 파출소로 가니 오후 9시였다. 척척 죽이 맞는 형제들 기지에 완전히 속아 넘어간 공비들은 '해병대도 이해 못 할 초고속으로' 능선을 질주해 서울로 들어가 난리를 피웠다.

초리골은 이후 3년 동안 군부대가 주둔했다. 단양 우씨들은 초리골을 알뜰하게 지켰다. 종갓집 장손 우능제는 대학을 나와 초리골을 생태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20년 전 그가 말했다. "여기는 2층 이상으로는 개발 금지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리되었다. 공비들 침투로는 왕복 6시간짜리 등산로로 변했다. 땔감으로 벌거벗었던 산은 온갖 나무들이 밀림을 이뤘다. 풀이 무성해 조금만 걸어도 풀독이 올랐던 계곡 아래 풀밭에는 아담한 펜션과 식당이 군데군데 들어섰다. 목사가 된 김신조는 가끔 초리골에 찾아와 우씨들과 만난다. 막내 나무꾼 우성제는 이후 경찰관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김신조와 동파리와 조봉연

임진강에는 좁은 여울이 두 군데 있다. 김신조 부대가 원래 건너려던 여울은 동파리 초평도 여울이었다. 동파리에 사는 조봉연(59)이 말했다. "물이 빠질 때면 초평도 여울이 아주 거세다. 그래서 고랑포로 갔다."

조봉연이 사는 동파리는 동녘 동(東)에 언덕 파(坡) 자를 쓴다. 뜻은 아름다운데 발음이 억센지라, 훗날 이장이 된 조봉연은 마을을 해마루촌으로 개명했다. 해마루촌은 민통선 북쪽에 있다. 출입하려면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공간이다. 정식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다. 김신조 부대는 마을에서 30분 거리 철책을 뚫고 고랑포로 틈입했다.

조봉연 집안은 대대로 진남면 합포리에 살았다. 해방이 되고 진남면은 이북 땅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도 진남면은 민통선으로 묶였다. 1952년 11월 미군에 의해 주민이 남쪽으로 소개된 뒤 주민들은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인민군 탱크부대가 주둔했던 동파리는 지뢰밭이 됐고 합포리는 미군 사격장이 됐다. 조봉연의 아버지 조남희는 고향에서 죽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구글 어스로 본 해마루촌 모습. 높은음자리표와 닮았다
.

1997년 조남희가 하늘로 갔다. 1년 뒤 파주시는 동파리 지뢰를 제거하고 마을을 건설하겠다고 결정했다. 복잡한 행정절차와 민·관·군 갈등을 거쳐 2003년 동파리 마을이 재건됐다. 인터넷 구글 어스에서 보니, 동파리 구조가 음악 높은음자리 기호와 똑같았다. 지금 마을 중앙통 이름도 '높은음자리길'이다.

조봉연은 그 첫 입주자다. "고향이 뭐라고, 아버지가 왜 그리 고향 고향 했는지 내가 알아보려고" 입주했다고 했다. 진남면에 연고를 둔 실향민 출신에 민통선 안에 농경지가 있을 것 따위 조건을 갖춘 60가구가 입주했다. 실제로 어릴 적 동파리에 살던 노인 4명도 포함됐다. 조봉연이 말했다. "농사지으러 들어와 보니 군에 땅이 다 수용돼 쉽지 않았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 때 농촌체험마을을 만들고, 이명박 정부 때 생태체험마을을 만들었다. 먹고살려고." 조봉연은 마을에 이로운 일이면 서울로 나가서 데모도 하고 국방부에 시청이며 도청까지 들락거렸다. 연천 경순왕릉도 민통선에서 제외시키고 해마루촌 출입 규정도 완화시켰다. "간첩 나오면 신고도 못 한다"며 인터넷과 전화선도 끌어들였다.

 

▲파주 진남면 민통선 안에 있는 허준 부부 묘. 왼쪽이 허준 묘고 위쪽은 모친 묘다.

수십 년 사람 손 안 탄 땅이니 식물부터 동물까지 온갖 생태가 보존돼 있다. 민통선을 넘는다는 호기심도 방문욕을 부른다. 남북관계가 좋으면 마을은 붐비고 나쁘면 한가하다. 해마루촌 부근에 있는 허준 묘가 개방되면서 방문객이 더 늘었다. 1993년 재미 고문서 연구가 이양재가 허준 후손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찾아낸 묘소다. 진남면 하포리 언덕에서 '陽平' '聖功臣' '浚'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진 동강 난 비석이 나왔다. 허준 문중 기록과 일치하는 비석과 묘소 지형이었다.
 
2008년 해마루촌 주민들 요청에 의해 허준 묘 또한 관광 코스로 개방됐다. 마을에서 2㎞ 떨어진 덕진산성 또한 답사객이 잦다. 백제가 만들었고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사용했으며 6·25 이후 최근까지 국군 벙커가 있던 성채다.
 

▲파주 진남면 덕진산성에서 바라본 초평도와 임진강 풍경. 수십년 사람 손을 타지 않아 순수한 자연이 보존돼 있다. /박종인 기자


덕진산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초평도 풍경은 근사하다. 농사도 짓지 않는 무공해 밀림과 초원이 펼쳐져 있다. 동파리와 초평도 사이 여울은 6·25 때 피란민들이 건넜던 길이요, 공비들이 포기했던 루트다.

아득한 옛날부터 전쟁터였던 곳들이 사람 살기 불편한 곳이 됐는가 하면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잉태하기도 했다. 무장공비 부대에 뚫렸던 진격 루트들은 하나같이 관광지로 변신했다. 이 어찌 기이하지 않다 할 수 있는가. 하여, 여기 조선일보에 글과 사진으로 그 기이한 파주 역사를 기록해둔다.

 
[파주 여행수첩]
1. 초리골: 김신조 루트(왕복 6시간) 등산로. 초호쉼터는 잔디구장과 카페, 방갈로, 회의실이 있는 종합시설이다. 단체만 받는다. 1인 6만6000원에 숙박, 바비큐, 조식, 술, 음료 무한. www.chohopark.com, 법원읍 초리골길 134, (031)958-0029 초리골펜션은 초계탕, 막국수, 펜션 운영. www.초리골.kr, (031)958-5295.
2. 해마루촌: 40인 이상 단체에 한해 생태 및 농촌 체험 프로그램 운영. 예약 필수.

 
 [41] 문학의 땅 장흥과 시인 이대흠탐진강에서 득량만으로 흐르는 문학의 향기작가 이청준, 한승원 잉태한 문학의 땅 장흥
동학 농민군이 숨어들고 신문물 일찌감치 수용한 너그러운 땅
득량만, 천관산과 들녘에는 생명이 넘치고
폐쇄된 장흥교도소는 문학적 상상력 불러
그 모든 풍경과 삶이 문인들 작품에 녹아 있다


이대흠은 시인이다. 전라남도 장흥 사람이다.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한 지 22년 되었다.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같은 시집과 산문집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을 썼다. 올해 마흔아홉 살이다.

몸속에 끼가 득실거리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대흠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며 담배를 즐겼다. 자취집으로 찾아오는 담임선생에게 "예고하고 오시라"며 술을 먹고 시를 썼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고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얄구지게 가난하다. 시인 지망생들도 가난을 각오하고 시인이 되려고 한다. 시인이 된 이후 이대흠 또한 대처(大處) 광주로 나가서 카페도 운영하고 이러구러 살다가 고향 장흥으로 돌아와 산다. 왜 장흥인가, 물으니 그가 이리 대답한다. "장흥은 문화의 수도다."


득량만으로 숨어든 농민군

장흥 앞바다 득량만은 식량(糧)을 얻는(得) 바다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한 이순신이 보성에 있는 군량창고를 탈환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득량만에는 해산물이 풍부하다. 보성 차밭도 벌교 꼬막도 모두 득량만에서 생명을 보충한다. 낙지는 어찌나 많은지, 장흥군청 공무원 전희석은 "뻘에 기어 다니는 낙지가 눈에 보일 정도라, 뜰채만 있으면 낙지 잡는다"고 했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이 장흥 산하를 뒤집어놓는 바람에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장흥 바다와 산과 들에는 먹거리가 흘러넘친다. 시인 이대흠은 "맛을 찾는 지주(地主)가 많고, 교통이 발달해 먹는 문화가 더 발달했다"고 말했다.
 

득량만에 있는 남포 마을 포구에 물이 밀려들었다. 마침 떠오르는 햇살에 소등섬이 반짝이고 섬으로 가는 시멘트 포장길은 자취를 감췄다. 이청준이 소설 '축제'를 쓰고 임권택이 영화 '축제'를 찍은 곳이다. /박종인 기자


1895년 수많은 동학꾼들이 득량만으로 틈입했다. 1894년 갑오년 서울로 진격하던 농민군은 세 줄기로 남하하는 일본군에게 패해 후퇴했다. 득량만까지 쫓긴 농민군은 장흥에서 결사항전을 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이후 동학꾼들은 득량만 일대 섬으로 숨어들었다.

동학꾼이 숨어든 그 섬과 바다에 개신교가 전파됐다. 장흥에는 100년 넘은 교회가 네 군데다. 지금이야 보성과 강진에 땅을 나눠주고 인구도 적지만, 장흥은 20세기 초까지 남도 중심지였다. 조선 말 군(軍)과 행정기관이 장흥에 밀집해 부패를 일삼았다. 동학 전에 이미 전임 군수가 백성들과 패를 지어 관에 맞섰을 정도였다. 거기에 동학과 기독교 사상이 전파됐다. 이대흠은 말한다. "그 중심지에 파고든 개혁 사상과 신문물은 장흥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그 정신적인 풍요와 물질적인 풍요가 합쳐져 지금 장흥이 되었다.


한승원과 한강, 이청준

 21세기 장흥은 문학의 땅이다. 5만 명 되지 않는 장흥 주민 가운데 등단한 소설가, 시인이 100명이 넘는다. 소설가 한승원이 쓴 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일찌감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승원은 장흥 사람이다. 동학꾼이 살았던 득량만 덕도에서 어부생활을 하다가 문학가가 된 사내다. 딸 이름은 한강이다. 최근 영국 맨부커 상을 받은 소설가다. 한강은 어린 시절 방학 때면 고향으로 내려와 덕산리 큰집에서 김 기르는 김발을 고르고 책을 읽었다. 아버지 한승원은 "강이는 내 작품이 아니라 자기 엄마 작품"이라고 했다. 한강 외가는 진목마을이다. 진목마을에는 이청준이 살았다. 이청준은 소설가다.

이청준. 이름을 듣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목마을은 득량만을 끼고 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바다가 있다. 동학과 기독교가 무의식을 지배한다. 일제 강점기 이래 간척된 논에서는 쌀이 나고 바다에서는 해물이 난다. 가난했어도 영혼과 육신이 굶을 걱정 없는 땅이었다.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 부자가 있으면 빈자도 있는 법이어서, 이청준은 젊은 시절 내내 가난에 빠져 살았다. 광주로 가서 공부를 할 때도 집은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어릴 적 하늘로 여읜 아버지와 형, 시집가며 여읜(전라도 사투리로 '헤어진'이라는 뜻이다) 누나는 울지 않던 씩씩한 이청준을 울게 만들었다. 풍요한 주변과 극빈한 자신 사이 모순이 그를 작가로 이끌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고향 진목마을에서 바라본 득량만.

쫄딱 망한 어미와 아들이 눈 내린 새벽녘 산길을 걷는 풍경, 소설 '눈길'은 가난과 풍요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진목마을에서 대덕읍 삼거리까지 산길을 넘어 아들을 배웅하는 어미, 그리고 툴툴거리며 어미와 무심하게 작별하는 다 큰 아들. 공동묘지를 지나 해 뜰 녘 산길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 되뇌는 어미…. 그때 어미는 이리 회상한다. "…그런데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 되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진목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소설이 그대로 보인다. 그가 살던 생가, 그가 걷던 골목, 산 너머 사라지는 읍내 가는 길이 모두 소설 속에 구현돼 있다. 이청준은 그 마을 입구에 잠들어 있다. 눈길 배경이 된 산길은 문학 산책로로 변했다.
 

▲평화마을 고영완 고택 입구.
 
진목마을에서 산길을 거쳐 바다로 더 내려가면 선학동이 나온다. 이청준 작품 '천년학'을 영화로 찍은 곳이다. 오두막집 세트가 둑방에 남아 있고 봄이 되면 들판에는 유채꽃이 핀다. 관음산 아래 있다고 '산저마을'이던 이름은 천년학을 계기로 선학동으로 개칭됐다. 문학에 맞춰 현실을 바꾼 마을이다. 영화가 개봉되자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개척한 논인데, 저걸 모두 (컴퓨터그래픽으로) 다시 바다로 만들어놨구나!"하고 울었다고 했다.

문학을 따라 가는 현실은 이어진다. 해안 따라 북상하면 정남진(正南津)이 나온다. 세련된 전망대가 솟고 거기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 끝이라고 했다. 이대흠은 "그 옛날 '남끄테'라 부르곤 했던 곳 주변이니 제 이름을 찾은 곳"이라고 했다.

그 북쪽으로 남포마을이 있다. 작은 포구에 주민들이 제사를 올리는 작은 소등섬이 있는 마을이다. 이청준이 소설 '축제'를 쓰고 있을 무렵 영화 감독 임권택이 영화화를 제의했다. 두 장인은 강원도 두메를 헤매며 촬영장소를 물색했는데, 성과가 없었다. 모두 포기하고 장흥으로 돌아온 날, 무심코 들른 남포마을에서 임권택이 말했다. "이 선생은 어찌 고향에 이 좋은 데를 놔두고 헤매게 만드셨소." 물 빠지면 걸어 들어가는 소등섬이 있고 마을은 한산하다. 거기에서 이청준은 소설을 썼고, 임권택은 영화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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