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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야기

은둔의 땅 진천과 판화가 김준권

작성자보르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8 목록 댓글 0
은둔의 땅 진천과 판화가 김준권

충북 진천은 은둔자의 땅이다. 19세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진천 땅으로 숨어들었다. 경기도 안성과 맞붙은 백곡은 숨어 살기에 좋았다. 사통팔달 길이 뚫려 있으되 얕은 산속에 숨으면 관에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속에서 교도들은 숯을 굽고 옹기를 구웠다. 가마가 쉬는 날이면 교도들은 가마 속에서 성경을 읽고 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했다. 대한민국 숯 70%는 진천 숯이고 그중 70%는 백곡 숯이다. 1992년 그 백곡 은둔지에 김준권(60)이 숨어들었다. 김준권은 판화가다.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은둔한 판화가 김준권.
 
김준권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60년대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판잣집에 살면서 부모가 돈을 버는 동안 김준권은 그림을 그렸다. 반대를 뿌리치고 홍익대 미술대에 들어갔다. 75학번 미술학도는 1984년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이라는 참여작가 전시회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작품을 출품했다가 압수를 당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1989년 전교조에 가입했다가 해직됐다.
 
 \만 3년 동안 전업 활동가로 인생을 살았다.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사망사건 걸개그림을 비롯해 웬만한 시위 현장 걸개그림은 다 그가 그렸다. 판화로 찍으면 동료들이 복사를 해서 초대형 걸개그림으로 만들었다. 인생은 화가에서 판화가로 흘러갔다. 소위 '프로파간다' 목적으로 시작한 판화가 업이 되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왜 우리가 거리로 나가는가. 민족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가. 미술로 공동체를 실현할 방법은 따로 있다'고. 또 생각했다. '판화라는 장르가 이 엄한 시대 유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우리 인쇄는 거의가 목판이었다. 팔만대장경도 목판인쇄가 아닌가.' 전쟁과 산업화로 초토화돼 버린 미술적 맥락을 잇겠다는 생각을 했다.
 
 1992년 김준권은 사회운동을 떠나 진천 백곡면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가깝되 숨어 살기 딱 좋았다. 천주교도들이 숨어든 이유와 동일했다. 남의 땅 빌려 움막을 짓고 목판을 새겼다. 왼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칼을 놀린 덕분에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엄지발가락처럼 넓적하고 커졌다. 그 기형적인 손으로 스쿠터를 몰고서 김준권은 진천 곳곳을 쏘다녔다. 그가 말했다. "세상은 단색이 아니었다. 한국, 정말 컬러풀한 땅이었다." 그래서 그는 1980년대 날카로운 단색을 버리고 채색 판화를 택했다. 복사꽃 핀 진천 들판을 그렸고 대숲 가득 부는 바람을 그렸다.
 

/花雨-2011 133×93cm 유성목판화 2011년 김준권 작품.


활황이던 1990년대 김준권은 잘나가는 판화가 반열에 올랐다. 중국에서 3년 동안 공부도 했다. 일본 공방에 가서 6개월 동안 일본 판화 우키요에도 공부했다. 결론을 내렸다. "한국적인 판화를 한다."

서양 유성 잉크를 원판에 발라 서양 판화지에 찍어내는 서양식 판화 말고 한지(韓紙)에 수성 먹(墨)으로 찍는 수묵 판화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먹은 번지고 한지도 번졌다. 먹이 종이 속으로 스며들면서 생기는 은근한 효과는 기존 판화에서는 볼 수 없는 놀라운 세계였다. 민족공동체와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진천 첩첩산중에서 완결된 것이다.


24
년 전 그가 만든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도저히 같은 작가가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여유와 화려함, 너그러움과 관용이 날카로운 비판을 대체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세상은 올바르게 돌아갔으면 좋겠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진천 땅에서 판화가는 여유를 얻었고 날카로움이 무뎌졌으며 직설과 투쟁 대신 은유와 여백을 얻게 되었다.

 
어은마을 은둔자, 송강 정철
351년 전인 1665년 문인(文人) 하나가 죽어서 진천으로 왔다. 호는 송강이고 이름은 정철이다. 정철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는 가사문학의 선구자요 정치가다. 그는 지금 진천 문백면 어은마을 환희산 기슭에 묻혀 있다. 연유는 이렇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정철은 정치가였다. 술을 좋아하고 문(文)에 능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가사들은 대입 시험 필수 암기사항이었다. 앞뒤 재지 않고 말 곧게 하는 덕택에 좌천도 여러 번 당했다. 선조 임금이 '항상 이만큼만 부어 마시라'며 내려준 은잔을 정철은 크게 늘려서 마셨다고 한다.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결국 선조가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 그곳에서 죽었다. 죽어서 묻힌 곳은 선산이 있는 경기도 고양이었다.

 

진천 환희산에 있는 정송강사에는 400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무렵 송강 정철이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 진천으로 이장됐다. 느티나무 왼편으로 정철이 잠든 무덤으로 가는 길이 나 있다. /박종인 기자


1665년 손자인 정양이 진천현감으로 부임했다. 정양은 성리학 거두 우암 송시열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괴산으로 낙향하던 송시열이 진천을 지날 때 정양이 말했다. "할아버지 묘소에 물이 차서 골치다. 묫자리를 봐주시게." 그때 송시열이 봐준 터가 문백면 환희산 기슭이었다. 그해 정양은 아버지 정종명과 함께 정철을 어은마을로 이장했다. 정철 사당 정송강사가 그때 세워졌다.

정송강사에는 신도비와 후대가 세운 시비가 있다. 신도비 앞에는 400년을 산 늙은 느티나무가 서 있다. 산소로 가는 길은 땀을 제법 내야 하는 깔딱고개다. 산소 터는 무식한 사람이 봐도 명당이라 부를 만큼 온종일 양지바르고 아늑하다. 정철이 잠든 곳 이름은 어은(漁隱) 마을이다. 어부가 숨은 땅이다.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숨었으니, 송시열은 정철로 인해 성리학과 노론의 부활을 꿈꿨을지 모를 일이다.


은둔지를 잇는, 농다리와 보탑사

진천에는 농다리가 있다. 고려 말에 세워진 농다리는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고종(1213∼1259) 연간에 권신 임연이 고향 마을에 세웠다고 하니 근 800살을 먹은 다리다. 한·일 강제합방과 6·25 전쟁 때 다리가 울어대 주민들이 잠을 못 잤다는 말도 전한다. 다리 한편에 있는 초평저수지는 1958년 만들어졌다. 21세기 들어 농다리에서 호수 주변으로 나무 데크가 깔려 보기 드문 산책로가 생겼다.
 

▲견뎌온 진천 농다리


농다리에서 나와서 시계 방향으로 남진하면 정송강사가 나오고 김유신 탄생지가 나오고 보탑사가 나온다. 정송강사와 나이가 같은 노거수(老巨樹)의 위용에 사람들은 놀란다. 김유신이 진천 사람이라면 또 놀란다. 만뢰산 산중에서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재현한 웅장한 보탑사 대웅전을 만나면 다시 놀란다. 순식간에 우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조선에서 신라로, 신라에서 현대로 시간대를 뒤섞은 여행을 한 것이다. 그게 진천이다.
 
[진천 여행수첩]
 1. 한국목판문화연구소: 김준권 화백 작업 공간. 오는 21일(토) 오후 3시 오픈스튜디오 행사가 예정돼 있다. 작업실 견학, 목판화 시연과 작품 관람 및 판매, 다과회가 준비돼 있다. 주차는 물안뜰체험관 주차장에. 백곡면 사송2길 66-1, (070)7644-5592

2. 물안뜰체험관: 참숯찜질방과 숯제품 판매, 민박, 카페테리아, 식당도 있다. 목판화 체험교실도 운영한다. 백곡면 백곡로 964www.baekgok.co.kr, (043)536-0411


3. 정송강사: 송강 정철 영정을 모신 사당. 옆에 묘소도 있다. 묘소로 가는 길은 제법 급한 오솔길이다. 송강로 523, (043)532-0878


4. 농다리와 초평호: 농다리 전시관을 지나 주차장 넓다. 다리 건너 초평호 전망대와 하늘다리로 연결되는 데크산책로가 좋다. 농다리로 1032-11, (043)539-3862
5. 김유신 탄생지: 도로변에 공원과 복원한 생가가 있다. 생가 앞 풀밭은 아이들이 놀기 좋은 공간이다. 생가 뒤로 산 정상 김유신 태실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김유신길 170-4, (043)539-3840
6. 보탑사: 경주 황룡사 구층탑을 모델로 한 목조 대웅전. 60m에 이르는 목조건물이 압권이다. 진천읍 김유신길 641, (043)533-0206


[36] 인연 찾아 떠난 양평과 민기남-사충성 부부섬부리 오지 마을엔 작은 기차역 石佛驛이 손님 맞고
어비계곡 물가에는 소박한 부부 인연이 숨어 있어
용문산 사나사에는 진한 전쟁 흔적이 곳곳에…
올곧게 살다 간 한음 이덕형은 목왕리에 잠들어

경기도 양평 지평면에는 망미리(望美里)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논리와 섬부리와 신대리를 합쳐서 지은 이름이니 오랜 지명은 아니다. 중심 마을은 섬부리다. 섬부리는 '석불리(石佛里)'가 바뀐 지명이다. 예로부터 마을 어딘가에 돌부처가 있다고 했으나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1967
년 11월 15일 마을에 철도역이 생겼다. 이름은 석불역(石佛驛)이다. 이용 주민이 줄어들면서 석불역은 2010년 열차가 서지 않는 무정차역으로 변했다. 첫차를 타고 서울 경동시장으로 가서 야채를 팔던 농민들과 그 돈으로 학교에 다니며 자라난 농민의 아이들이 반대했다.

 

/폐쇄 위기에서 부활한 양평 석불역.
 
2012년 2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아비의 아비와 그 아비의 아비들이 소문만 듣고 자랐던 그 돌부처가 망미산 기슭에서 발견된 것이다. 잊혔던 돌부처가 환생한 데 이어 2013년 12월 28일 원색 페인트칠을 한 장난감 같은 석불역 새 역사가 문을 열었다. 부처와 역이 돌아오더니 하루 네 차례 석불역에 서는 열차에서는 앙증맞은 석불역을 찾는 여행자들이 쏟아졌다. 부처님 가피라고 해도 좋고 주민들 애정이라고 해도 좋고, 관계 당국의 주민 위주 행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땅과 땅 이름과, 땅에 사는 사람들이 맺은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因緣, 어비계곡 민기남과 사충성

민기남은 경기도 가평 설악면 가일리 여자고 사충성은 서울 남자다. 1948년생 동갑이다. 두 사람은 지금 양평 옥천면 용천리 어비계곡에 산다. 어비계곡은 '물고기가 날아다니는(魚飛)' 계곡이다.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남편과 아내를 떠나보낸 두 영혼이 부부가 된 지 24년이다.

어릴 적 민기남은 등산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일부러 산에 간다고? 나는 먹고살려고 나물 캐러 저 험한 산을 헤맸어. 여기가 전쟁터였잖아. 산에 가면 지뢰밭인데 그것도 모르고 막 다녔어. 빨간 지뢰밭 표시판 보면 쓰레받기 삼겠다고 서로 뜯어서 가곤 했지. 그러다 지뢰 터져서 허벅지며 넓적다리 잘라진 애들 많았어. 그런데 그 산을 놀러 간다고? 성렬이 아버지는 저기 바위 옆에서 호랑이를 만났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배 물고 천천히 집으로 도망왔더니 바지에 똥이 한 바가지더라나, 호호호."

 
삶은 둔탁했다. 모진 시련도 없었고 날카로운 행복도 없었다. 이북에서 피란 온 아버지는 나이 오십에 외동딸 민기남을 낳고서 딸이 열세 살 때 하늘로 갔다. 민기남은 엄마 손 잡고 양평장에서 소금이랑 간고등어 사서 집으로 걸어올 때 정도가 행복했다. 남자를 만나 사랑도 해봤고 살림도 꾸려봤지만 삶은 시종일관, 고단했다. 그러다 1992년 서울에서 얼굴 시커먼 남자가 민기남을 찾았다. 남자 이름은 사충성이다.

사충성이 말했다. "나, 젊은 날 좀 놀았다. 영등포에서 이름 좀 날렸지. 그때 아내가 죽었다. 세상 별건가 싶어서 검은 시절 청산하고 양평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 거기에서 이 여자를 만났다. 이 여자 아니면 안 되겠다 싶더라." 훗날 민기남이 말했다. "딱 보니까 몸 함부로 굴려서 얼마 못 살겠더라. 그런 남자 살려내면 얼마나 보람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여자와 아무것도 없는 남자가 마흔넷에 사랑을 했다. 가일리에서 산 너머 나오는 양평 땅 어비계곡 물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여전히 여자는 지뢰밭에 올라가 나물을 캤다. 남자는 개를 키웠다. 여자는 오가피며 당귀며 몸에 좋은 온갖 것들 캐 와서 가마솥에 펄펄 끓여 병든 남자에게 먹였다.


그러다 1994년 인생이 바뀌었다. 민기남이 말했다. "나물을 다듬고 있는데 등산객 부부가 집에 와서 밥 좀 달란다. 그래서 닭도리탕 드시라 했더니 내 몰골을 빤히 보더라. 머리는 산발에, 먼지로 얼굴은 새카맣게 해서 식칼을 들고 있으니, 나라도 못 믿었겠지." "정말 맛있냐"는 거듭된 물음에 "잡숫고 맛없으면 그냥 가시라"고 답하곤 부부는 닭 한 마리를 잡아서 내놨다.


먹으면서 남자가 웃고, 여자가 웃었다. 그걸로 둔탁했던 삶은 멈췄다. 어느 틈에 주말이면 '닭도리탕' 달라는 사람이 쇄도했다. 사람들이 그저 '민기남집'이라 부르기 시작한 부부네 산중 살림집에서 연일 닭들이 죽어나갔다.

 
남자가 말했다. "젊을 때는 '(주먹) 한 방에' 모든 일을 해결했다. 무책임했다. 내 나이 이제 칠십인데, 절반은 책임 있게 또박또박 살아왔다. 이 여자 덕이다." 봄비 내리는 계곡에서 여자가 숲을 바라봤다. "저 새싹들 봐라. 평생 저 숲을 보고 살았다. 참 지루했었는데, 지금은 사랑스럽다. 다 이 남자 덕이다." 서로가 서로를 덕이라 하니, 과연 인연이다.

임진왜란, 6·25, 사나사(舍那寺)

어린 소녀 민기남이 헤매고 다녔던 지뢰밭은 6·25 전쟁 때 생겨났다. 양평은 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다. 용문산전투와 지평리전투는 1951년 각각 국군과 미·프 연합군이 거둔 최대 승전이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양평에서는 대규모 의병 활동이 벌어졌다. 이후 1907년 일본군은 용문산 기슭에 있는 고찰 사나사(舍那寺)를 의병 본거지로 찍어 불태웠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따르면 일본군 토벌 작전에 용문산 일대 많은 사찰과 양평읍 시가지가 전소됐다.
 

▲양평 용문산 기슭에 있는 신라 고찰 사나사(舍那寺).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 6·25전쟁까지 사나사는 여러 전쟁을 겪어야 했다. 봄비에 만물이 푸르고, 절은 초파일을 준비 중이다. /박종인 기자
 
어찌 된 셈인지, 사나사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사나사는 신라 시대인 923년 창건된 절이다. 고려 때인 1367년 태고왕사 보우가 중건한 이 절은 200년 뒤인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전소됐다. 그리고 구한말 다시 한 번 일본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나사는 6·25 전쟁 용문산전투에서 세 번째 초토화됐다. 절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에는 화상 흔적이, 보우를 기리는 원증국사 비와 석탑에는 총탄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사바세계 만물을 치유하고 중생을 보듬어야 할 대가람에 이리도 흉터가 깊다. 흉터들은 역사가 되었다.

한음 이덕형, 그리고 양평

석불역 남쪽으로 구둔역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산에 군사 아홉 부대가 있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이 구둔(九屯)이다. 1940년에 문을 연 구둔역은 결국 폐쇄됐지만 등록문화재 46호로 보존 중이다. 영화 '건축학개론' 몇 장면을 이곳에서 찍기도 했다.

임진왜란 초기 문경새재를 무혈 진군하고 탄금대에서 신립 부대를 궤멸시킨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양평을 휩쓸고 동대문을 통해 한양으로 입성했다. 9개 조선 부대도 소용없었다. 고니시 부대와 경쟁을 벌이던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몇 시간 뒤 남대문으로 한양에 입성했다. 양평과 용인은 쑥대밭이 됐다. 기록에 따르면, "한양은 텅 비어 있었다". 1933년 일본 총독부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통해 자기네 조상이 통과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보물 1, 2호로 지정했다.

 

▲평생을 올곧게 산 한음 이덕형 묘소. 당쟁 와중에 공적을 박탈당해 낙향해서 죽었다. 양평 목왕리에 있는 묘소는 명나라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고니시 부대가 진군한 양평에는 이덕형이 살았다. 호는 한음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도 일본도 협상 대상으로 이덕형을 꼽았을 정도로 존경받는 협상가요 합리적인 정치가였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 이덕형은 세 차례 영의정에 올라 전쟁과 정치를 주도했다. 명으로 달려가 원군을 불러온 이도 이덕형이었고 왜군과 단신으로 협상을 한 사람도 이덕형이었다. 선조는 모친상을 당한 이덕형에게 끝까지 귀향을 허락하지 않고 옆에 뒀다.

그런데 광해군 때 이덕형은 당쟁 와중에 모함을 받고 모든 공적을 박탈당하며 양평으로 낙향했다. 낙향 한 달 만에 이덕형은 기력이 쇠하여 죽었다. 백사 이항복은 '도량이 넓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할 줄 몰랐으니 결국 이 때문에 죄를 얻었고 또 그 때문에 만백성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고 그를 기렸다. 1759년 영조는 후손에게 대대손손 제사를 허락하는 '불천위(不遷位·사당에서 위패를 치우지 못하도록 하는 것)'를 허용했다. 이덕형은 지금 양평 목왕리에 묻혀 있다. 묫자리는 명나라에서 온 풍수가 두사충이 점지했다고 전한다. 묘소 가는 길은 짧되 숨 가쁜 산길이다. 묘소에서는 양평 땅이 한눈에 보인다. 바다에서 이순신이 나라를 살렸다면 이덕형은 더 큰 프레임 속에서 전쟁을 주도했다. 한음이 없었다면 임진왜란은 일찌감치 패한 전쟁이었다.

 
카페와 러브호텔만 보이던 양평 땅에 이런 인연이 숨어 있다. 계곡에는 남 보기에 시시껄렁하되 우리네 민초들에겐 소중한 인연이 숨어 있고 산기슭에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감사해야 할 오랜 인연이 잠들어 있다. 석불역에서 천년 고찰 사나사까지, 천지 사방에 귀하지 않은 것 하나 없는 여행이었다.
 
[37] 농민의 땅 고창(高敞)과 보리밭 주인 진영호고창 들녘에 보리가 익어갑니다

관찰사 이서구, 선운사 미륵불 열다가 날벼락 맞을 뻔
망하고 또 망하고… 14만 평 보리밭 일군 농부 진영호
조병갑 학정에 들고일어난 농민군… 고부까지 진군해
동진강변에는 학정 상징하는 만석보 기념비 서 있고…
 도통(道通)한 전라감사 이서구
 
실학자 이서구(1754~1825)는 기인이었다. 우의정을 지내고 1793년에 이어 1820년 두 번째로 전라관찰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곳곳에 전설을 남겼다.
 

▲고창 선운사에 있는 마애미륵불. 배꼽에는 미래를 알 수 있는 비결이 있었다고 전한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보고나 받았으면 모르되 이서구는 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백성들 삶을 눈으로 확인했다. 선정(善政)이 많다 보니 공적비도 많고 전설도 많다. '물은 30장을 내려가고 땅은 30장을 오르리'라고 예언했다는 부안 바다는 새만금 간척지가 되었다. '이 누각 앞으로 화마(火馬)가 다니리'라 예언한 전주 한벽루 앞에는 기차 터널이 뚫렸다.
 
만물에 관심이 많던 이서구인지라, 고창 선운사 마애미륵불을 지나치지 않았다. 미륵불 배꼽 복장에는 세상을 바꿀 비결이 감춰져 있다고 했다. 부임한 지 며칠 만에 이서구가 사다리를 타고 복장 뚜껑을 열고 비결을 펼쳐 보았다. 첫 장을 펼치자 이리 적혀 있었다. '이서구가 열어 본다(이서구개탁·李書九開坼).' 날벼락이 몰아치고 이서구는 비결을 쑤셔 넣고선 회로 봉해버리고 물러났다.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지러운 조선을 어찌 일신해보려는 뜻도 있었을 터다. 더군다나 비결이 있는 곳은 미륵불, 바로 중생을 구원하는 미래불 배꼽이 아닌가. 자그마치 56억7000만년 뒤에 찾아올 부처다. 그 세월이 하도 길기에 이서구는 복장을 열어 보려다 죽다 살았다. 마애불로 오르는 선운사 산길은 지금, 초록이 눈부시다.


보리의 땅 고창과 진영호


▲학원농장 주인 진영호.
 
고창 옛 이름은 모양성이다. 모양은 보리 모(牟)에 볕 양(陽)이다. 백제 때는 털 모(毛)자를 썼다. 땅이 척박하다 보니 고창은 옛날부터 보리농사를 지었다. 눈은 더 많았다. 워낙 폭설이 잦아서 사람들은 고창(高敞)이 아니라 설창(雪倉)이라 불렀다. 진영호는 그 고창에서 태어나 지금 고창에 산다. 직업은 농부다. 14만 평짜리 보리밭을 가는 어마어마한 농부다. 농장 이름은 학원농장이다.
 
 함평 대지주 집안에서 시집온 어머니 이학은 꿈이 농장이었다. 1963년 진영호가 중학교 때 이학은 시집이 있는 고창 황무지 6만 평을 샀다. 마을 사람들이 땔감용으로 소나무며 잡목들 베어내는 쓸모없는 돌밭이었다. 50년 만에 6만 평이 14만 평이 되었고, 돌밭은 1급 농경지로 변했다. 사연이 간단하지 않다. 진영호가 말했다.

"어머니와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영화라는 게 늘 '자이언트' '에덴의 동쪽'이었다. 하나같이 미국 텍사스 대농장이 배경이었다. 농장주가 되는 게 어머니 꿈이었다." 진영호는 당연히 농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랐고, 농장을 경영하려면 당연히 농경제학과를 가야 하는 줄 알았고,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주말이면 과 친구들과 고향에 내려와 밭을 갈았다.

1971년 졸업과 동시에 진영호는 일제 경운기 하나 사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창군 내에 경운기가 10대가 채 없던 때였다. 뽕나무 심고 누에를 쳤다. 당연히 망했다. 터가 너무 넓었고 잠업(蠶業)에 대한 실무적 이해가 없었다. 경운기 고치려면 광주까지 나가야 했다. 그가 말했다. "이론과 실제는 전혀 달랐다."

 
바보 농부 진영호는 1년 반 동안 돈 다 까먹고 대기업 금호그룹에 입사해 20년을 살았다. 이란과 일본에서 상사맨으로 뛰다가 이사를 끝으로 고향으로 복귀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때가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1992년이었다.


황무지가 보리밭이 될 때까지

언덕에는 수박을 심었다. 길 건너 언덕에는 카네이션과 백합 비닐하우스를 차렸다. 수박밭 6만 평을 수확하니 이익보다 인건비가 더 들었다. 망했다. 카네이션 팔아서 벌충하려 했더니 원예시장이 개방되면서 중국산 카네이션이 절반 가격으로 들어왔다. 망했다. 그가 말했다. "손대는 작물마다 망해나갔다. 갖고 왔던 돈은 없어지고 빚만 늘어가더라. 경험 없는 초보 농부가 처음에 농사를 잘한다. 지가 천재라 그런 줄 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다 땅이 주고 하늘이 주는 거다. 내가 그랬다. 자만심 가득한 초짜 농부."

1990년대 초, 대한민국 농민들이 대부분 그랬다. 농업시장이 개방되고 전통적인 내수시장은 쪼그라들고 있던 때였다. 분기탱천한 다른 농부들이랑 서울 여의도에서 죽창 들고 화염병도 던져봤다. "막다른 길을 가고 있지 않나, 안 될 걸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기가 나고 용기가 없어서 버릴 수가 없었다."

 

전북 고창 학원농장 보리밭이 누렇다. 봄에는 보리가, 여름에는 해바라기가, 가을에는 메밀꽃이 14만 평 너른 들판을 가득 채운다. 눈 즐거운 경관 뒤에는 농부들의 피와 땀이 숨어 있다. /박종인 기자


1994년 갈아엎은 수박밭에 보리를 심었다. 이문은 적어도 인건비가 덜 드는 작물이다.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갔다. 그 사람들이 뿌리고 간 돈이 제법 되었다. 신기했다. 그래서 2003년 보리를 수확한 밭에 콩 대신 메밀을 심어봤다. 무려 20만명이 소금 같은 메밀꽃을 보러 몰려왔다. 진영호가 말했다. "짜증이 났다. 농사에 방해가 될 정도였으니까." 그때 군청 농업진흥과 직원 김가성이 말했다. "진 사장, 이거 축제로 만들자."

그리되었다. 수확을 포기하고 관광으로 발상을 전환하니 짜증이 사라지고 돈이 보이는 게 아닌가. 긴가민가하며 부둥켜안고 있던 카네이션 비닐하우스는 그해 겨울 고창을 뒤덮은 폭설로 100% 전파돼 버렸다. 그가 말했다. "하룻저녁에 전부 사라졌다. 그때 받은 보상금으로 하우스 다 철거하고 빚 갚았다. 폭설이 없었다면 지금도 질질 끌려와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한번 이름이 나고 나니 이듬해 봄 언덕을 뒤덮은 보리밭에 30만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6월에 보리를 베고서 메밀을 뿌렸던 그해 가을, 고창 전역에 교통 체증이 발생해버렸다.

2006년에는 보리와 메밀 사이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한겨울을 제외한 1년 365일 농장 일대는 꽃만큼이나 사람이 몰려들었다. 소위 '경관 농업', 수확보다 미관을 중시하는 농업이 탄생했다.

진영호가 말했다. "쫓겨 쫓겨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내가 봉이 김선달이지. 신기하고 이상했다. 의도해서 기다리지는 않았다. 굳이 내 자랑을 하자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새로운 방법으로 앞날을 꿈꿨다는 정도?"

모든 혁명은 미래를 꿈꾼다. 신세계를 세우려는 파천황(破天荒)을 꿈꾼다. 이서구를 위시해 18~19세기 실학자들이 꿈꿨던 이상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그 꿈이 민초들에게는 전설과 설화로 변했고, 종교에서는 메시아와 미래불로 연결됐다. 뽕나무밭 말아먹고 상사맨으로 뛰던 초보 농사꾼이 수박 말아먹고 카네이션 말아먹고 폭설에 풍비박산 나고 마침내 보리와 메밀로 먹고살게 된 내력도 기실은, 혁명(革命)이다.


동학과 고창, 그리고 만석보

학원농장에서 서쪽으로 10분만 가면 동학혁명 발상지가 나온다. 공원으로 꾸민 이 작은 터에서 농민들은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죽창을 들었다. 1894년 2월 사방에서 몰려든 농민군은 죽창으로 무장해 고부로 북상했다. 고부는 정읍에 있다. 그때 고부 군수는 조병갑이었다. 가렴주구로 익산으로 쫓겨 갔다가 뭐가 미련이 남았는지 다시 돌아와 학정을 펴던 탐관오리였다.
 

정읍 동진강변에 있는 만석보터. 동학혁명을 촉발시켰다.


조병갑은 백성들을 옥에 가두고 돈을 처먹고, 자기 아비 송덕비 건립 비용을 징수했다. 배들평야에 물을 대는 동진강 물을 만석보로 막아버리고 물세를 받아먹기까지 하자 혁명이 터졌다. 고부로 진군한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부숴 쌀 창고를 열었고 만석보를 뚫어 물을 풀었다. 이후 정세는 역사에 기록돼 있다. 청과 일본이 동학군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을 벌였고 조선은 훗날 사라져버렸다. 그 흔적들은 고창과 정읍 곳곳에 남아 있으니, 학원농장 보리밭에 얽힌 사연보다 그 사연은 더 깊고 처연하다. 고부 관아도 사라지고 만석보도 사라졌다. 관아는 학교로 변했고 동진강 변 만석보 자리에는 낡은 말뚝들과 유지비가 서 있다.

전주로 도망갔던 조병갑은 1898년 대한제국 시절 판사로 복귀해 동학 접주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006년 당시 정부 고위직이던 그 증손녀는 "우리 (조병갑) 할아버지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김해에는 선정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파천황의 꿈은 사라졌다. 미륵불은 현신하긴 할 것인가. 이서구가 채 못 읽은 비결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38] 조각가 이일호와 운염도와 모도
섬 사이 바다가 뭍이 되더니 몇백 톤짜리 날틀이 뜨고 내리는 비행장이 되었다. 인천 영종도와 용유도 이야기다. 영종대교 아래에 있는 운염도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운염도와 이웃 소운염도, 매도 사이 바다가 메워지더니 차를 타고 고속도로로 20분이면 서울로 가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운염도에서 태어난 서른여섯 살 먹은 사내 양현호가 말했다. "1998년으로 기억한다. 평생 옆 섬도 배를 타야 갈 수 있던 우리가 차를 타고 집 밖을 나갔다. 아버지 입에서 '감회가 새롭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천지개벽한 운염도

평생 배를 몰았던 아버지 양정복은 매도 사람이다. 올해 일흔이다. 1960년 매도가 군부대에 수용되면서 이웃들과 함께 운염도로 집단 이주했다. '염'은 작은 돌섬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할아버지는 돛 단 목선을 몰았고 아버지 양정복도 목선을 몰았다. 바지락을 잡았고 굴을 캤고 수많은 물고기를 잡아 아이들을 키웠다. 목선은 철선으로 바뀌었다. 돛은 엔진으로 바뀌었다.
 

바다가 뭍으로 변하고, 뭍은 사막으로 변했다. 인천국제공항으로 가는 영종대교 아래 운염도 갯벌에는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는 낯선 공간이 있다. /박종인 기자


바다가 매립됐다. 바지락은 사라졌다. 굴은 줄어들었다. 어획량은 '어마어마하게' 줄어들었다. 길 났다고 좋아했던 주민은 모두 떠났다. 섬에는 세 집 남았다. 양정복은 나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57년 살아온, 섬 아닌 섬을 떠나지도 않을 작정이다. 양정복은 입에 달고 산다. "아이들 다 키웠다. 내 집이 별장이고 낙원이다." 늙은 어부의 집으로 가려면 길이 험하다. 매립 공사가 진행 중인 다리 아래 황톳길을 뚫고 한참을 가야 한다. 험하되, 갈 가치가 있다.

어부 양정복의 집

다리 아래에 길 두 줄기가 평행으로 나 있다. 다리 왼쪽으로는 황량한 칠면초와 함초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저어새 같은 희귀조들이 그 밭에서 목격된다. 길 끝 초원 한가운데에 원두막이 서 있다. 벽 없는 집, 기둥과 지붕만 있는 집이다. 낭만적이며 고독하다. 집이 보일 무렵 길이 오른쪽으로 비켜 나가고 그 길 끝에 어부가 사는 집이 나온다. 집은 누렁이와 뚱보와 그 친구, 이렇게 개 세 마리가 지킨다.
 

▲갯벌 저편 벽 없는 집과 청년들.
 
갯벌은 호화롭다. 누워 있는 목선, 선착장으로 난 작은 돌길과 그 끝에 놓인 신발 한 켤레, 그 옆에 서 있는 깡마른 나목 숲이 보인다. 나목 숲은 잡은 물고기를 꿰어놓고 말리는 덕장이다. 따가운 바다 햇볕에 풍경이 녹는다. 트럭 오가는 황톳길 끝에 이런 비현실적 풍경이 있다니.

그 풍경에 홀린 외지인들이 어부네 집을 제 집처럼 휘젓는 바람에 속이 상할 때도 있다. 덕장 앞에서 포즈를 잡으라고 머슴 부리듯 구는 작가님들, 가재도구를 이리저리 맘대로 옮겨놓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가님들이 얄밉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 촬영을 다 마치고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갯벌이 어디예요?" 이 비현실적 풍경마저 시시하게 만드는 초현실적 공간이 운염도에 숨어 있다는 말이다.


사막으로 변한 갯벌

뭍으로 변한 갯벌이 말라갔다. 꾸들꾸들해진 갯벌을 붉은 함초와 칠면초가 덮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도록 말라만 가던 갯벌이 터지기 시작했다. 가뭄에 갈라졌다가 해갈되면서 원상복귀하는 논밭 정도가 아니었다. 갈라진 조각 형상 위로 비가 퍼붓고 밀물에 물이 스며들면서 담금질을 당한 단단한 사막이 되어버렸다.

사진가들은 세상 좋은 풍경은 귀신처럼 찾아낸다. 운염도 사막에도 어느덧 육중한 카메라로 무장한 무리가 나타났다. 어부의 아들은 "주중에는 하루 서너 명, 주말에는 말도 못 하게 많이 와서 길을 묻는다"고 했다.

운염도 사막은 영종도로 나가는 일방통행 둑길 너머에 있다. 차는 중간에 있는 갈래길에 대야 한다. 물이 덜 빠진 갯벌에는 미니어처 세상이 펼쳐져 있다. 화성 표면 같기도 하고 타클라마칸 사막 같기도 하다. 물길은 사막에 난 외길 도로처럼 보인다.

쫙쫙 갈라진 건조 지대는 낯설고 아름답다. 회색 혹은 고동색 혹은 소금이 말라붙은 흰색 땅에 푸르고 붉은 염초들이 생명을 잇고 있다. 흐린 날 운염도와 매도와 영종도 산등성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곳은 지구가 아니다.


풍경에 취했던 조각가 이일호


▲조각가 이일호.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신도로 간다. 신도는 믿을 신(信)에 섬 도(島)다. 주민들은 신실한 섬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다리로 연결돼 있다. 영종도 군부대에서 활쏘기 훈련을 할 때 과녁으로 삼았다고 시도(矢島)요, 그물을 걷으면 물고기보다 띠풀이 많았다고 해서 띠염이라 불리다 모도(茅島)가 됐다. 시도에서 모도를 건너는 다리 왼편에는 달려가는 청년과 앉아 있는 소녀 조각상이 있다. 조각을 한 사람은 이일호(70)다.

이일호는 중견 조각가다. 죽음과 삶, 성(性)을 초현실주의 감각으로 표현하는 작가다. 그가 말했다. "풍경에 취하면 예술을 하지 못한다. 창작을 하려면 멋대가리 없는 풍경 속에 살아야 하는데, 실수였다."

이일호, 보통 사람이 아니다. 회화, 조각, 음악, 글 따위 온갖 분야에서 끼를 발산하는 예인이다. 전인권이 부른 '맴도는 얼굴'(원제는 '헛사랑'인데 무슨 그런 불손한 사랑이 다 있냐고 금지곡이 됐었다)을 지었고 영화 시나리오도 만들었고 글도 쓰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말은 유치한데 작품은 천재적"이라고 한다.

2003년 서울에 살던 이일호는 친구 초청에 모도 옆 장봉도에 갔다가 모도에 반했다. 산허리를 구불구불 넘어가야 나오는 배미꾸미 해변 황량한 갈대밭에 반했다. 남들이 보면 황량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지만 그 황량한 바다가 좋았다. 땅을 사고 이듬해 작업실을 차렸다. 만든 작품은 갈대밭 옆 모래밭에 아무렇게나 세워뒀다. 그 무렵 TV드라마 '풀하우스' 세트장이 인근에 건설되고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어떻게 찾아오는지, 세트장을 구경 온 사람들이 작업실까지 찾아와서 작업실을 기웃대고 작품들을 기웃댔다. 작은 섬 시도가 외지인으로 북적이고 작업실은 필수 코스에 포함됐다.


예술가가 떠난 섬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가족을 먹여 살린 형을 따라, 보령에서 군산으로, 평택으로 옮겨다니며 큰 사내였다. 이일호는 슬그머니 북한산 자락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모도 작업실은 주변 권유로 공원으로 만들었다. 예술가가 떠난 해변에 예술이 흔적으로 남았다.
 

▲배미꾸미 조각공원에 있는 이일호의 초현실주의 작품 '버드나무'.


이일호가 말했다. "풍경에 홀려서 눌러앉았는데, 그 풍경이 나를 떠나보냈다. 어쩔 수 있나. 바다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바다는 공(空)이다. 그걸 내가 좋아했으니." 예술가는 속이 상했지만 사람들은 즐겁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찾아와 이곳에서 영화 '시간'(2006)을 찍은 이후 외국 관광객이 많다. 다만 에로티시즘을 담은 작품을 보며 감상 대신 희화화하는 사람들이 아쉽다고 했다. 배미꾸미 조각공원 비빔밥은 일품이다. 해초와 야채를 버무리고 땅두릅과 구기자, 질경이와 소라, 도토리묵과 파래를 반찬으로 낸다. 아침 노을과 쏟아지는 별 아래 묵는 펜션도 있다. 예술가는 떠났지만, 이 작은 섬 모도에 기대 않던 풍경은 남아 있다.

조각공원 길목 버스정류장에는 불망비(不忘碑)가 서 있다. 조선 말 경기도 암행어사 영재 이건창(李建昌·1852~1898)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건창은 모도 주민을 수탈하던 관리들을 처단했다. 그 앞에는 작은 논이 있다. 1987년 이곳 소녀로부터 "개구리 소리를 듣고 싶다"는 편지를 받고서 이곳을 찾은 당시 내무부 장관 노태우가 제방을 세우고 만들어준 논이다. 신도와 시도와 모도는 '삼형제 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로 연결돼 있다.

시인 정현종이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섬' 전문)

모든 섬은 외롭다. 운염도도 모도도 외롭다. 쨍쨍한 여름날, 섬으로 틈입해본다. 비현실 속으로 숨어 본다.

 
(39) 궁장 현중순과 천년 역사가 공존하는 연천궁수(弓手)에서 궁장(弓匠)으로

올해 쉰다섯 먹은 현중순은 정미소 주인이다. 경기도 연천 전곡에 산다. 정미소는 가업이다. 할아버지도 정미소를 했고 아버지도 정미소를 했다. 이북 땅이던 중면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직접 물레방아를 만들어 방앗간을 했다. 전쟁이 나고 남쪽으로 몇십㎞ 피란 와서도 정미소를 열었다. 시간이 나면 활을 만들어 산에서 꿩이며 돼지를 사냥하며 놀았다. 그 손자 현중순이 정미소를 물려받았다.

손자는 "쌀가마 옮길 힘도 기를 겸, 남에게 맞기 싫고 담력도 기를 겸" 합기도를 배웠다. '아무도 몰래 공중 부양도 해 본다'는 공인 4단이다. 쌀가마 짊어지다 허리 디스크가 나가서 헤매고 있을 때, 합기도 도반들 권유로 국궁을 배웠다. 나무에 물소 뿔을 덧대 만든 각궁(角弓)을 배웠다. 공인 5단이다.

그런데 "각궁이 다 좋은데 너무 비싸고 쉽게 망가지더라"고 했다. 비를 맞으면 접착제로 쓴 아교가 녹아내렸고, 잘못 다루면 활이 부러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손재주가 근질거렸다. 2003년 현중순은 자기 손으로 활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 다섯 트럭을 이러저러하게 허비한 끝에, 2016년 현중순의 신풍정미소는 대한민국 실전 궁사들 성지로 변했다. 현중순은 궁수요 목궁장(木弓匠)이다.


기씨의 꿈

결혼기념일을 사흘 앞둔 2015년 2월 28일, 인천 강화도에서 사업을 하는 기남용(64)은 꿈을 꾸었다. "공장장이 나더러 짐승 한 마리 키우시라고 했다. 그러마 했더니 커다랗고 하얀 짐승을 또 주면서 '병든 놈 하나 더 키우시라'는 것이었다. 꿈이었다." 기남용은 5000원짜리 로또 복권 두 장을 사서 지갑에 넣고는 잊어버렸다. 눈 내린 결혼기념일 아침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서 연천에 있는 조상 할머니 묘 터로 찾아갔다. 경운기가 뚫어놓은 길 따라 덤불까지 갔더니 길섶 눈틈으로 하얀 돌이 나와 있었다. 작대기로 파보니 무덤 앞에 흔히 있는 석양(石羊)이 아닌가. 온전한 석양 한 마리와 부서진 석양 한 마리를 찾았고, 달려온 동생이 한 마리 더 찾았다. 텅빈 구릉 주소는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 145다. 당첨되지 못한 로또 복권을 꺼내며 기남용이 말했다. "지금이야 텅 빈 구릉이지만 이곳은 우리 할머니, 고려 말 원나라로 시집갔던 기황후(奇皇后)가 묻힌 터다."


왕들의 사냥터, 연천

연천은 번화한 도시였다. 고려 수도 개경에서 직선거리가 서울-일산 신도시보다 가까운 80리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때 화신백화점 분점도 있었다. 분단만 아니었다면 연천은 지금도 번성했을지도 모른다.

임진강과 용암이 만든 험한 산세는 연천을 군사 지대로 만들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만든 요새들을 빼앗으며 혈투를 벌였다. 분단 현실 속 연천 노변 풍경은 지금도 살벌하다.

군사 문화는 효율적이다. 적진(敵陣)을 점령하면 무기든 진지든 성곽이든 최대한 재활용한다.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처럼 지금 남아 있는 성터에는 시대별로 유적과 유물이 뒤섞여서 튀어나온다. 평화가 오면 군사 요충지는 어김없이 관광 명소로 변해서, 잔디 뗏장을 입힌 옛 성터는 사시사철 나들이객이 찾아온다.

사냥꾼의 땅이기도 했다. 연천에는 활쏘기가 흔했다. 조선조 왕실 사냥터도 연천에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도 활쏘기 대회가 열리곤 했다. 어릴 적 현중순도 수수깡에 못 박고 군용 통신전선인 삐삐선으로 활줄 만들어 활쏘기를 하고 놀았다. 맹수들이 사라지고 수렵 문화도 사라졌다. 활꾼도 사라졌다.


경주에 묻히지 못한 경순왕

장남면 고랑포리 산 18-2번지에는 경순왕릉이 있다. 21세기 들어서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게 된 땅이다. 경순왕은 고려에 나라를 바친 신라 마지막 왕이다. 그래서 시호도 '공손하게 따른(敬順)' 왕이다. 그가 연천에 묻혀 있다. 고려 태조 왕건보다 35년 더 산 경순왕은 서기 978년 개경에서 죽었다. 신라 유민들이 들고 일어날까 걱정했던 고려 왕실은 '왕릉은 수도에서 100리 밖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을 꺼내 귀향을 막았다. 그게 경순왕이 고랑포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연천에 묻힌 이유였다. 왕릉은 이후 새까맣게 잊혔다가 1747년 후손들이 찾아냈다. 그때 영조 임금이 "제사를 지내게 해달라"는 후손들 청원을 수용해 비석을 세웠다.

자, 비석을 본다. 비석에 농축된 이 땅 역사를 본다. 무덤 주인공은 신라 임금이요, 왕릉은 고려 무덤이다. 비석은 조선 때 세웠다. 그리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 6개가 선명하다. 뒤를 돌아보면 묘 앞 너른 터에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다. 이 작은 비석이 여행객들에게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읽어보시라"고 책갈피를 활짝 펼쳐놓고 있지 않은가.


궁장, 기황후 그리고 용암

활꾼 현중순은 연천 산하를 헤매며 목궁을 연구했다. 물푸레나무도 써보고 느릅나무도 써보고 구지뽕나무도 써봤다. 태워도 봤고 삶아도 봤고 땅에 1년 묻어도 봤다. 두 종류 나무를 덧붙여도 봤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활꾼들을 찾아가 노하우도 배웠다. 활을 알아야 활을 만드니, 궁술을 연마했다.

정미소에 있는 작업실에는 현중순이 만든 목궁들이 전시돼 있다. 각궁에 비해 길이도 길고 직선에 가깝다. 그가 말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병사들에게 근거리 사격술과 속사법이 보급됐다. 이동하는 목표를 타격하는 궁법도 보급됐다. 그 기본은 각궁이 아니라 목궁이다." 명상을 하는 궁도가 아니라 실전 병술이라는 말이다.

마당 한쪽에 있는 궁터에서 그가 활을 쏘았다. 영화 '최종병기 활'에 나온 것처럼, 활을 30도 비틀고 화살집에서 순식간에 화살을 꺼내더니 그보다 더 빨리 활을 쏘아댔다. 각궁처럼 입술에 활줄을 대고 쏘는 지중해식이 아니라 눈꼬리까지 손을 올려 쏘는 몽골식 사법(射法)이다. "몇 배는 더 정확하고 몇 배는 더 파괴적이다"라고 그가 말했다. 함께 시범을 보인 아들 승환은 "화살 종류에 따라서 멧돼지는 그냥 관통한다"고 했다. 대위 예편을 앞둔 승환 또한 육군참모총장기 전국궁도대회에서 우승한 궁사다. 아들과 사라졌던 활 문화, 무사 문화는 일단 이 정미소 주인에 이르러 부활 조짐이 보인다.

그렇다면 기황후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꿈을 꾼 후손 기남용이 말했다. "할머니 고향이 행주다. 유목민인 원나라에는 죽으면 고향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할머니도 아마 고향에서 죽게 해달라고 청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고향으로 가던 길에 죽었거나 아니면 변고가 있었거나."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기황후릉터는 앞에 '전(傳)'자가 붙어 있다. '~카더라'는 뜻이다. 연천문화원 향토사료연구위원장 이준용이 말했다. "기남용이 발견한 석양 셋과 기존에 발굴한 석인(石人)들은 재질은 물론 양식도 원나라 형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기황후 묘와 석인, 석양, 석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제 석물만 찾아내면 이 '전(傳)'자를 뗄 수 있다." 석양과 석물은 지금 연천문화원에 옮겨져 있다. M1 소총으로 경순왕릉 비석보다 더 참혹하게 깨뜨려놓은 비석 하나도 볼 수 있다.
*
궁사가 찾아낸 목궁과 후손의 꿈이 찾아낸 할머니 무덤과 어린이 놀이터가 된 왕릉은 모두 연천 땅에 있다. 아득한 태초에 연천은 용암 지대였다. 용암은 모든 역사를 끌어안는다. 연천 북동쪽 재인폭포는 용암이 만든 미학의 극치다. 폭포수가 말라 있어도 즐겁다. 오각, 육각으로 주렁주렁 매달린 주상절리(柱狀節理) 기둥들은 땅 위로 솟은 용암이 굳어서 생긴 무늬들이다. 그 용암이 땅을 녹이며 흘러간 흔적이 한탄강이다. 평화와 전쟁과 긴장과 나른함이 혼재된, 한탄강이 연천에 흐른다. 궁장의 꿈, 기씨 후손의 꿈도 함께 흐른다.

 
[연천 여행수첩]
1. 
경순왕릉: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오전 9시 개방. 반드시 비석을 살펴보라.
2. 
호로고루: 고구려 군사요새 터. 경순왕릉에서 가깝다. 임진강 너머 풍경도 좋다.
3. 
전 기황후릉터: 연천읍 상리 산 145. 텅 빈 구릉.
4. 
연천문화원: 마당과 로비에 전시된 석물들에 대해 설명을 들어보라. (031)834-2350,cafe.daum.net/ycclove
5. 
재인폭포: 권력과 탐욕에 얽힌 상반된 전설 이야기를 들어보라.
6. 
국궁문화연구회(신풍정미소): 목궁을 포함해 국궁에 관심이 있다면 필수. 판매는 하지 않는다. 연천군 전곡읍 은대로2. 현중순 궁장 이메일은 8322729@naver.com

 
 [40] 김신조가 지나간 파주와 초리골 나무꾼 우성제전쟁 상처 덮으며 江이 흐릅니다동파리에서 초리골까지… 김신조 부대 침입 루트 
나무꾼 4형제 붙잡혔던 초리골은 생태관광지로 변해 
초평도 보이는 동파리는 체험마을 해마루촌으로 변신 
민통선 안쪽 '동의보감' 허준 묘도 일반인에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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