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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평면에 사는 술 빚는 김용세.

작성자보르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7 목록 댓글 0
신평면에 사는 김용세

▲술 빚는 김용세.
 
김용세는 술 만드는 사내다. 올해 일흔세 살이다. 대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졸업하고서 아버지 김순식으로부터 신평양조장을 물려받았다. 1960년대 행정학 석사가 됐다고 딱히 고관대작이 될 확률이 큰 것도 아니어서 아픈 아버지 도와서 가업을 잇는 일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조장은 1933년에 문을 열었다. 그가 말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란 게 술도가였으니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론과 실제는 달라서 난감했다. 그래서 술 제조법을 공부하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책이 없는 것이다. 아주 난감했다."

왕실에서는 실록이다, 일기다 하며 기록을 이어갔지만 민간에서는 술 만드는 법조차 가문의 비밀로 기록을 꺼렸다고 했다. 오죽하면 짚신 못 팔아먹는 아들에게 아비 짚신 장수가 죽을 때에야 귓속말로 "아들아, 짚신 팔아먹으려면 터럭을 잘 다듬으면 된다"고 비밀스럽게 제조 노하우를 구전(口傳)했을까. 그래서 일본인이 만든 탁주·청주 제조법 책자를 섭렵하고, 실전에서 수없이 응용한 끝에 술맛을 해독했다. 그가 말했다. "책대로 만들면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실험해서 제 술맛을 찾고 보니 책이 맞더라."


수덕사 스님들에게 배운 다도(茶道)를 응용해 백련(白蓮) 잎을 막걸리에 넣으면서 김용세식 술맛이 완성됐다. 2007년 연꽃 향이 은근하게 밴 신평양조장 막걸리는 청와대와 삼성그룹 건배주로 선정됐다.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 김동교가 아버지 일을 돕다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3대 술도가 주인으로 들어왔다. 1933년 문을 연 양조장은 그때 그 자리에 서 있다. 술맛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아들로 대를 잇는다. 83년째다.


농촌 개혁의 꿈, 심훈과 필경사

신평양조장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가면 필경사(筆耕舍)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무슨 글을 대신 써주는 곳이 아니다. '상록수'를 쓴 소설가 심훈이 살던 집이다. 4년 동안 살았다.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난 심훈은 3·1운동을 거쳐 중국으로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와 소설을 썼다. 영화도 만들었고 출연도 했다. 그러다 1932년 장조카 심재영이 사는 당진으로 내려왔다. 사랑채에 묵으며 글을 쓰다가 인세를 모아 집을 지었다. 집 이름이 필경사다. '붓으로 밭을 간다(以筆爲耕)'는 뜻이다.

이곳에서 심훈은 소설 상록수를 탈고했다. 상록수에 나오는 지명은 모두 당진 내포 땅에서 나왔다. 장조카 심재영은 박재영으로 등장했다. 박재영은 농촌 개혁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이다. 심훈은 조카와 함께 직접 농촌을 체험하며 상록수를 쓰고, 1936년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다. 필경사는 이후 교회로 쓰이다가 장조카 심재영이 사들여 당진시에 기증했다. 지금은 심훈기념관으로 쓰인다. 경기도 안성에 있던 심훈 묘도 이곳으로 이장했다.


예산 남연군묘

잠시 당진을 떠나 남하하면 예산 땅이 나온다. 예산에는 수시로 대형 승용차가 나타나 주변을 꼼꼼히 살피고 사라지는 무덤이 하나 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다. 정적(政敵)들 눈을 피해 파락호 생활을 하던 이하응은 어느 날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명당'이란 얘기를 듣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묘 이장을 결심한다. 그런데 충남 가야산 자락에 있는 그 명당 터에 이미 가야사라는 절이 있는 게 아닌가. 흥선은 주지를 매수한 뒤 사람을 시켜 절을 불태워버렸다.
 

▲내포 지역에 속하는 충남 예산 가야산에는 남연군 묘가 있다. 천하제일 명당이라는 곳이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이후 고종과 순종 황제가 나왔고 나라는 망했다. /박종인 기자
 
그 무렵 형제들 꿈에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귀신이 출몰하자 흥선은 "즉 진짜 명당이라는 말"이라며 이장을 감행했다. 과연 아들은 고종 황제가 되고 손자는 순종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 명당 자리에 가면 풍수에 일자 무식한 사람도 감탄이 나온다. 과연 어디에 무엇이 모자라 2대 만에 나라가 망했는지 설은 분분하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영탑사 칠층석탑과 몽산리 석불

권력욕이 가야산 자락에 흔적을 남겼다면 아미산 영탑사와 태안 몽산리 석불에는 민초의 무한한 애정이 숨어 있다. 영탑사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유리광전 뒤편 언덕에는 칠층석탑이 있다.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절을 중건하면서 오층석탑을 세웠다. 이후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석탑을 유리광전 뒤편 언덕으로 옮겼다. 그리고 1911년 신도들이 2층을 더 올려 7층 석탑으로 지었다. 일곱 층짜리 석탑 하나 만드는 데 1000년이 넘게 걸렸다. 흥선대원군이 가야사를 불태울 때 살아남은 석탑을 옮겨왔다는 말도 있다. 어느 이야기든 상관없다. 느껴지지 않은가. 석탑에 대해 민초들이 품고 있는 애정이.
 

▲민초들이 정성들여 보듬은 태안 몽산리 석불. 못 생겼으되 애정이 가득하다.
 

▲당진 아미산에 있는 영탑사 칠층석탑. 신라 말 도선국사가 세운 뒤 1911년 주민들이 중수할 때까지 1000년이 걸린 탑이다.
 
태안 몽산리 야산에서 만나는 석가모니 석불은 더하다. 철저하게 훼손된 돌부처를 주민들이 정성 들여 수선해놓았다. 미적 감각이 없는지라 사라진 눈과 코와 입은 시멘트로 발라 그려넣었다. 옛 석물들을 모아 아담한 돌탑도 복원해놓았다. 지독하게 못생겼고 엉성하지만 돌부처에 대한 애정이 가슴 뭉클하게 읽힌다. 이게 내포 문화다.
 

▲안국사지석불. 황량한 여타 절터와 달리 안국사지는 화려하고 아늑하다.
 
김대건은 내포 당진에서 태어나 천주교를 받아들여 조선 첫 신부가 되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곳이 솔뫼성지다. 고려시대 절터 안국사지에는 커다란 석불 3기가 서 있다. 지금 주지 원상 스님 10년 넘도록 그 앞에 돌로 만든 정원을 꾸미고 산속에 별세계를 꾸미고 있다. 대개 사라진 절터는 황량하고 허무하지만, 안국사지에서는 오히려 미래가 보이니 이 또한 내포 땅이 가지고 있는 적극성과 개방성이다. 영탑사가 있는 아미산 자락에는 젊은 예술가 부부가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한 아미미술관이 숨어 있다. 교실마다 귀한 작품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전국 팔도에서 그 미학을 보려고 당진으로 몰려온다.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세월은 여러 겁 흘렀지만 내포(內浦) 땅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몰려든다.


[47] 달이 머무는 영동과 당재터널 무명씨(無名氏)들산에는 달이 머물고 폭포에는 피리소리가 스쳐갔네당재터널 이야기
 
 충북 옥천과 영동 사이 경부고속도로 공사 이야기다. 긴 터널을 뚫을 기술이 없던 때라, 산과 산 사이를 골라 굴을 뚫었다. 금강IC와 영동IC 사이는 고속도로라고 부르기에는 쑥스러운 곡선투성이였다. 1970년 고속도로 완공을 앞두고 마지막 남은 구간이 이곳 당재터널이었다. 터널 앞과 뒤를 흐르는 금강 구간에는 거대한 다리를 놓았다. 산 사이를 뚫다 보니 뚫으면 무너지고, 무너지면 사람이 죽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 기간 사고로 죽은 사람이 일흔일곱 명이었는데, 열한 명이 당재터널을 뚫다가 순직했다.
 
터널 개통을 끝으로 고속도로가 완공됐다. 그해 7월 7일 대구에서 열린 개통식 다음 날 대통령 박정희는 금강휴게소 옆에 있는 순직자 위령탑에 와서 조문을 했다. 2003년 잔뜩 휘어 있는 이 구간 직선화 공사가 완료됐다. 폐기된 당재터널 상행선 구간은 저온 저장고가 되었다. 한 시대 한 나라를 이끈 터널이었다. 터널을 떠받치는 아치형 콘크리트 기둥마다 현대사가 읽힌다.
 
대한민국 성장에 경부고속도로가 끼친 영향을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굳이 터널을 보기 위해 갈 필요도 없겠고 순직자 77명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을 찾기 위해 일부러 금강휴게소에 정차할 이유도 없겠다.
 

▲경부고속도로 위령탑에 있는 순직자 명단.
 
폐쇄된 당재터널엔
고속도로 순직자 흔적이

노론 거두 송시열은
달 머문 월류봉에서 와신상담

세조가 문수보살 만난
반야사 개울가…

악성 박연이 찾던 옥계폭포…

  영동을 목적지로 떠난 여행길이라면, 반드시 찾아본다. 당재터널 무명씨(無名氏)들이 없었다면 우리네 필부필부들은 지금 어찌 살고 있었을까. 터널이 이끄는 영동 땅 옛사람들 삶도 그러하다.

달이 머무는 황간

 터널에서 30㎞ 동쪽으로 가면 영동군 황간면이 나온다. 물은 많아서 땅 이름도 누를 황(黃)에 시내 간(澗) 황간이었다. 가도 가도 첩첩산중이니, 숨어 살기에는 딱 좋은 땅이다. 농사는 거칠었고 경치는 좋았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황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동남쪽 모든 물이 그 아래로 꺾여 서쪽으로 가는데, 돌에 부딪히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고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두어 봉우리가 솟아 있고 가운데 청학굴(靑鶴窟)이 있다.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조선 초기 악성(겦聖) 박연은 고향 충북 영동 옥계면에 있는 옥계폭포에서 음악을 익혔다. 셋째 아들이 역모에 연루돼 벼슬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죽었다. 뜨거운 이 여름날 폭포수는 실처럼 가늘게 흘렀다. /박종인 기자
 
인간세가 아닐 정도로 깊었으니 꼭꼭 숨어서 살기에도 좋았고 경치 구경하면서 즐기기에도 좋았다. 승람이 '두어 봉우리'라 적은 그곳 이름은 월류봉(月留峰)이다. 달이 머문다는 뜻이다. 얼마나 아름답길래 달도 승천하지 못하고 머물렀을까.

우암 송시열과 월류봉

 송시열(1607~1689)이 숨어 살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 집권 세력인 보수파 노론의 태두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망하고 대륙에 청나라가 섰을 때, 조선이야말로 명나라를 계승하는 소중화라 생각했던 학자였다.
 
1637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임금이 무릎을 꿇었다. 젊은 송시열은 외가가 있던 옥천 옆 이곳 월류봉 아래에 은둔하며 오랑캐 징벌을 꿈꿨다. 숱한 동료들이 찾아와 함께 꿈을 꾸었다. 다시 조정으로 불려 간 뒤 청나라로 끌려갔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자 대놓고 북벌론을 외치며 중화 부활을 이끌었다. 효종이 죽었다. 동아시아 초강대국과 맞짱을 뜨겠다는 의지는 좌절됐다.
 

▲달이 머문다는 월류봉. 우암 송시열이 한때 이곳에 은거했다.
 
그가 죽고서 영동 일대 제자들이 그가 살던 집터에 그를 기리는 한천서원을 지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한천서원도 철폐됐다. 이후 후학들이 그 자리에 한천정사를 세웠다. 월류봉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후손들이 유허비를 세우며 건립 연대를 이리 적었다. '崇禎紀元後百三十六年.'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다. 1644년 대륙에서 사라진 나라 연호를 송시열 유허비는 136년째 잇고 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 비석들은 상당수가 '숭정 기원후'를 고집했다. 기이하지 않은가.
 
금강 지류들이 백화산과 지장산을 감싸며 흐르다 야트막한 다섯 봉우리 앞에서 크게 휘돈다. 한눈에 다 들어올 만큼 풍경 규모도 적당하여, '한 폭 산수화'라는 상투적인 비유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춘하추동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눈 덮인 겨울이 더 아름답다는 사람도 많다. 해 질 녘 월류봉 앞에 닿으면 달과 함께 놀아볼 준비를 한다. 달이 떠도 좋고 별들이 떠올라도 좋다. 그 천체들이 과연 봉우리를 떠나지 않고 밤새 함께 놀 요량인지도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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