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조와 반야사 배롱나무 월류봉 아래에서 만나는 강줄기 하나는 석천(石川)이다. 월류봉에서 석천을 따라 6㎞를 가면 백화산이 나온다. 백화산에는 반야사가 있다. 불교 용어로 반야는 깨달음이다. 반야사는 문수보살로부터 깨달음을 얻은 수양대군 세조(1417~1468) 이야기를 품고 있다. ▲500세 된 반야사 배롱나무와 삼층석탑. 통일신라 시대인 851년 무염대사가 창건했다는 말도 있고 통일 전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반야사 기원은 문수보살 신앙이다. 세조는 문수보살과 관계가 깊다.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지나서,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현몽했다. 왕후가 "이 더러운 놈!" 하고 침을 뱉고 사라진 뒤 세조는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생을 했다. 명산, 명찰은 다 돌아다니며 기도를 하고 몸을 씻었다. 양양 낙산사도 갔고 오대산 월정사도 갔다. 오대산에서 몸 씻어준 아이에게 "임금 몸 봤다 말라" 했다가 "그대는 문수보살 봤다 하지 말라"는 답을 들었다. 똑같은 전설이 반야사에도 있다. 세조 10년 반야사가 크게 중창을 하고 임금을 초대했다. 법회를 마친 세조가 강변에서 아이에게 이끌려 몸을 씻었다. 드디어 부스럼이 치유되었고, 아이는 절벽 위로 올라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곳에 문수전이 서 있다. 문수전으로 오르는 길은 고행길이다. 안내문에는 '가벼운 10분 산행'이라 돼 있지만, 거짓말이다. 힘들게 내려와 절을 다시 보면, 극락전 앞에는 오백 살 먹은 배롱나무가 새빨갛게 꽃을 달고 있고, 그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서 있는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백화산 중턱 너덜지대에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발톱을 세우고서 용맹정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름날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만드는 절이었다. 폭포, 그리고 악성 박연 영동의 서쪽 끝 옥계면에는 옥계폭포가 있다. 역시 세조와 관계가 있다. 고려 말 이곳 영동에서 박연(1378~1458)이 태어났다. 박연은 고구려 왕산악, 가야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이라 불린다. 성리학이 중시하는 예(禮)와 악(樂) 가운데 박연은 악을 집대성했다. 사회를 규율하는 덕목이 예이고 악은 통합하는 덕목이다. 세종 임금 아래에서 박연은 조선 궁중 음악을 체계화했다. 피리에 능해서 그가 피리를 불면 새들도 화답했다고 했다. 그러다 셋째 아들 박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자 함께 사형을 받게 되었다. 세조가 이를 보고받고서 "세 임금을 섬겼으니 벌을 깎으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81세로 죽었다. 그곳이 영동 옥계면이다. 그가 음악을 익힌 자리가 바로 옥계에 있는 옥계폭포다. 폭포를 본다. 폭포수 양쪽 웅장한 암벽에 푸른 나무들이 붙어 있다. 염천(炎天) 더위에 폭포수는 말랐다. 가끔 아랫물을 펌프로 끌어 올려 수량 많은 폭포수를 볼 때도 있다. 무엇보다 저 바위 위에 앉아서 피리를 불며 악상을 정리했을 이 음악가를 상상해본다. 폭포에서는 피리 소리에 맞춰 산짐승들이 모여들었다. 동쪽 월류봉에서는 달이 놀았다. 피부병을 앓던 권력자가 강변 절을 찾아와 심신을 치유받았다. 다시 서쪽으로 가면 태곳적부터 산으로 서 있던 자리에 누군가 무명씨들이 땀 흘린 터널이 남아 있다. 산이라고 그저 산이 아니었다. 물이라고 그저 물이 아니었다. [영동 여행수첩] 1.경부고속도로 순직자 위령탑: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상행선 쪽 언덕. 휴게소에 차를 대고 걸어갈 수 있다. 2.당재터널: 금강휴게소에서 하행 톨게이트를 나와 금강 강변 우산로를 지나 금강로로 2.8㎞. 터널 옆에 주차 공간 있음. 3.월류봉과 한천정사: 내비게이션 검색어는 월류봉. 새벽 혹은 저녁이 좋다. 한천정사는 개방돼 있지만 볼거리는 없다. 정사 건너편 텃밭 언덕에 월류봉 바라보는 송시열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옆에 새겨진 '숭정 기원' 연호를 찾아볼 것. 4.반야사: 극락전 앞에 있는 500년 된 배롱나무 두 그루와 삼층석탑, 세조와 문수보살 전설이 얽힌 문수전. 문수전 산행은 약간 극기 훈련과 비슷한 가파른 계단 길이다. 극락전 옆 백화산에 보이는 호랑이 형상 너덜지대도 볼 것.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 (043)742-4199, www.banyasa.com 5.옥계폭포: 주말에 수량이 부족하면 폭포 아랫물을 끌어 올린다. 물이 없어도 장관이다. [48] 방태산 순환드라이브와 정감록 사람들구룡령과 조침령을 넘어 우리는 방태산으로 숨었다 풍수학자 최창조는 충격을 받았다. 전화(戰禍)를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황해도에서 경북 풍기로, 풍기에서 신도안으로 떠돌다가 충남 공주 명당골에 자리 잡은 노인이 이리 말하는 것이다. "자본(資本)이 명당이외다. 돈만 많다면 아들 사는 도시로 나가 살지 미쳤다고 여기에서 살겠나." 예언서 '정감록'에 의지해 피장처(避藏處)를 찾아 팔도를 떠돌았던 노인이 칠순 넘어 털어놓은 비밀이었다. 최창조가 묻는다. "전쟁이 태평성대와 난세(亂世)를 가르는 기준이던 시절, 사람들이 전쟁을 피할 곳은 군사적으로 가치가 없는 산골이 대부분이었다. 지금은?" 방태산과 피장처 강원도 방태산 주변에는 '정감록'에 나오는 피장처가 많았다. 방태산은 닿을 수 없는 오지였다. 20세기 말까지도 그랬다. 북쪽으로 418번 지방도와 남쪽으로 56번 국도가 방태산 언저리를 지나가지만, 방태산을 잇는 조침령과 구룡령은 섣불리 넘어갈 수 없는 아득한 고개였다. 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하려고 이 오지로 숨어들었다. 80종이 넘는 '정감록' 판본 가운데 필사본 하나가 방태산 주변 피장처를 삼둔사가리라고 불렀다. 홍천에 있는 살둔, 달둔과 월둔, 인제에 있는 아침가리, 적가리, 연가리, 명지가리다. 달둔에 사는 한 노인이 말했다. "정감록? 허… 나 젊을 때 울진에서 무장공비가 우리 마을로 들어와서 우리가 몽땅 강제로 쫓겨났었는데." ▲강원도 인제와 홍천에 걸쳐 있는 방태산은 꽃 방(芳)에 별 태(台), 꽃별산이다. 그 산중에 숨어 있는 폭포 이름은 ‘이 폭포 저 폭포’다. 세상이 어찌 됐든 개의치 않겠다는 달관한 작명(作名)이다. /박종인 기자 천지가 개벽했다. 자본과 돈이 전쟁을 대신하는 세상이 되었다. 418번 지방도가 산 북쪽으로 뚫리고 56번 국도가 남쪽으로 양양까지 뚫렸다. 2006년 12월 진동과 양양을 잇는 조침령 터널이 뚫리면서 마침내 방태산을 한 바퀴 도는 110㎞ 길이 순환 드라이브 코스가 완성됐다. 길 막히지 않는 날, 두 시간 반이면 서울에서 닿는 신천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정감록' 피장처라 주장하는 숨은 장소들을 찾아가 돈을 뿌리고 대신 휴식을 구입한다. 땅은 변함없으되 그 쓰임과 용도가 이리도 격변했으니, '정감록' 예언이 21세기에 실현된 게 아닌가. 이 여름날 큰 산 방태산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본다. 살둔계곡, 미천골계곡, 구룡령, 조침령, 진동계곡, 방동계곡. 이름 하나하나 의미심장한 은둔지들을 만나본다. 은둔지를 잇는 길도 하나같이 아름답다. 인제 상남에서 살둔까지 20㎞ 상남면에서 살둔계곡까지 자동차로 30분이 걸린다. 도로 번호는 446번 지방도다. 미산계곡이 길 내내 뻗어 있다. 내린천이 휘돌아 흐르는 첩첩산중에 평평한 땅이 보인다. 누가 보아도 정감록을 떠올릴 풍경이다. 오지였던 시절, 살둔에 있는 산장은 산꾼들 아지트였다. 한옥도 일옥도 아닌 희한한 목조 산장에서 사람들은 풍월을 읊고 놀았다. 길이 뚫리고 누구나 살둔을 찾는 지금, 산장은 만인을 위한 펜션으로 변했다. 야영장으로 변한 폐분교 주변에 차를 대고 계곡을 즐겨본다. 살둔에서 구룡령까지 25㎞ 구룡령으로 가는 길목 13㎞ 지점에 칡소폭포가 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수량이 풍부하다. 폭포 위쪽은 을수계곡이다. 내린천 발원지다. 여름에도 나무 그늘이 시커멓고 물은 냉수다. 폭포 앞에서 내린천과 계방천이 만난다. 차갑기 그지없는 내린천 줄기에서 양지바른 계방천 줄기로 몸을 옮기면 순간 온탕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빠진다. 칡소폭포에서 2.5㎞를 가면 홍천 내면이 나온다. 내면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달둔계곡이다. 역시 정감록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홍천 내면 광원리에 있는 칡소폭포. 56번 국도와 붙어 있다. 영동고속도로에 교통량을 빼앗긴 후 56번 국도는 쓸쓸했다. 2010년 이 달둔계곡에 숨어 있던 은행나무숲이 대중에 개방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아내 병 고치러 달둔을 드나들던 사내 류기춘이 아예 은행을 심고 살다가 20년 만에 개방한 숲이다. 10월만 되면 달둔계곡 앞뒤 10km에 차량 사태가 나고 전직 금융인 문제경 부부가 숨어들어와 만든 펜션 티롤에서 은행나무숲까지 길섶에 장터가 선다. 다른 계절에도 아름답다. 내린천이 흐르는 계곡 풍경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과 동일하다. 길이 서서히 상승한다. 구룡령으로 간다. 구불구불 구부러진 고개를 과장해서 아홉 구비라 했다. 아홉 구비가 훨씬 넘지만, 고개 이름을 십룡령, 이십룡령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구룡령을 넘는 56번 국도 구간은 일제 강점기 임도였다. 그 길을 포장해서 1990년대에 완공된 도로가 56번 국도다. 고개를 넘을 때는 가랑비가 뿌렸으면 좋겠다. 고개 아래는 비가 오지만 고개는 운무에 뒤덮인다. 양편 그리고 앞뒤 산자락이 운무에 사라진다. 그 몽환(夢幻), 잊기 힘들다.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 25㎞ 구룡령 아래 마을 이름은 갈천이다. 화전민들이 칡뿌리 갈아 먹던 마을이라 개울에도 칡가루가 부유했다. 그래서 갈천(葛川)이었다. 마을에 있는 약수 이름도 갈천이다. 약수터로 오르는 1.5㎞ 산길은 꼭 올라가 본다. 온갖 활엽수에 에워싸인 약수터는 신비하고 춥다. 교통량이 줄어들면서 구룡령휴게소는 문을 닫았다. 미천골 휴양림은 빼놓을 수 없다. 입구에서 7㎞까지 차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계곡이다. 입구에 있는 절터는 선림원지다. 절집 사람이 하도 많아서, 밥을 할 때마다 계곡수가 하얗게 됐다고 미천(米川)이다. 휴양림 안에는 예쁜 펜션도 많고 밥 먹을 식당도 있다. 미천골에서 나와 서림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길은 418지방도로 바뀐다. 조침령이 나온다. 새도 하룻밤을 자고 넘었다는 악명 높은 고개다. 그 고개 아래에 터널이 뚫렸다. 2006년 일이다. 방태산 자락이 1145m짜리 터널 하나로 순환고리가 완성된 것이다. 양양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야 했던 진동마을 사람들은 신천지를 맞았다. 조침령에서 방태산 18㎞ 피장처를 찾아 진동마을 두메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에게는 비보(悲報)였다. 조침령은 마지막 남은 오지였다. 언론, 방송 할 것 없이 진동계곡을 찾아 '천혜의 비경'을 찬미했다. 그래도 좋았다. 쉰여섯 먹은 사내 김시륜은 서울에서 사륜구동차를 타고 물 좋은 계곡만 찾아다닌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2박3일 동안 계곡에서 내 손으로 밥을 해먹은 적이 없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밥이며 삼겹살을 나눠줬다. 대한민국, 아직 살 만하다." 김시륜의 담배연기 너머 물가에서 청년들이 꺽지 낚시에 한창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 속에서 웃음소리가 끝이 없었다. ▲진동계곡 솔밭 옆 내린천에서 만난 낚시꾼들. 문득 방태산이었다. 이 모든 현대판 피장처를 품고 있는 큰 산이었다. 계곡 끝에 폭포수가 쏟아졌다. 10m 높이 위쪽 폭포와 3m 높이 아래쪽 폭포를 합쳐서 '이 폭포 저 폭포'라 부른다. 휴양림 입구에 있는 방동약수를 한 모금 마신다. 음나무 무성한 숲 속에 철분 가득한 탄산수를 마신다. 방태산 옆 고향집에는 최균택과 박순옥 부부가 산다. 예순여덟 살 먹은 최균택과 세 살 연하 박순옥은 인제군 현리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 그리고 혼인을 하여 지금껏 현리에 산다. 박순옥이 만드는 두부가 하도 맛있다고 마을 사람들이 호들갑이라, 25년 전 집에 두부집을 열었다. 그 이름이 '고향집'이다. 두부 싫다고 징징거리는 아이들도 이 집 두부를 먹고 나면 맛있다고 호들갑이다. 개명천지가 아닌 주술의 시대였다면 "인육(人肉)을 넣었다"는 괴소문이 떠돌 법할 정도로 맛있다. 110㎞ 방태산 자락 끝에서 두부 만드는 부부를 만났다. 현리에서 태어나 현리에서 자라나 현리에서 사랑을 하여 현리에서 혼인을 했고 현리에서 늙어가는 부부다. 그들에게 '정감록'은 덧없고 의미 없다. 하여, 묻는다. 당신의 피장처는 어디인가. [방태산 여행수첩] 〈드라이브 순서〉 상남면-살둔계곡-칡소폭포-티롤-갈천약수-미천골자연휴양림-조침령-진동계곡-방태산자연휴양림-방동약수-고향집 1.칡소폭포: 주차장 반대편으로 개울 내려가는 길. 개울 물놀이도 가능. 2.갈천약수: 구룡령휴게소 건너편 마을 소로로 들어갈 것. 산길 1.5㎞. 3.미천골휴양림: 발굴 작업 중인 휴양림 초입 선림원지 석탑을 볼 것. 휴양림 길이는 7㎞. 4.방태산휴양림과 방동약수: 휴양림 끝 '이 폭포와 저 폭포'. 방동약수는 휴양림 입구에서 왼쪽 도로. [49] 화천 파로호와 비수구미 여자 김영순의 삶고단한 삶은 끝나고… 사람들은 호숫가를 걸으며 안식한다 파로호 호숫가 삶은 모질었다. 화전민 부부 장윤일과 김영순도 모질게 살았다. 칠십이년째 장윤일은 생각 중이다. 왜 나는 고단하게 살고 있을까. 뱀도 잡아봤고 송이를 캐고 낚시꾼들 수발 들며 네 아들딸 휼륭하게 키워냈지만, 부부는 다람쥐 꼬리만 한 비수구미 계곡을 벗어나지 못했다. 장윤일과 김영순은 파로호변 숨은 곳,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 비수구미에 산다. 미륵바위와 461번 지방도 화천읍 대이리 북한강변에는 바위가 다섯 개 있다. 구만교에서 읍내로 가는 길목에 있다. 어찌 된 것이 볼품없는 그렇고 그런 바위들에게 사람들은 미륵이라 이름하고 제사를 지낸다. 미륵은 미래불이다. 사람들은 미래를 관장하는 이 영험한 바위에 기도를 하며 징글맞은 현실을 잊는다. 미륵바위가 서 있는 이 도로 이름은 461번 지방도다. 파로호 이야기 깨뜨릴 파(破)에 오랑캐 로(虜), 호수 호(湖)이니, 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부순 호수'라는 뜻이다. 6·25 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을 이곳 파로호에서 궤멸(潰滅)시켰다. 1951년 5월 경기도 양평 용문산 전투에서 화천까지 패퇴한 중공군은 철원으로 퇴각 중이었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은 '사상자 10만명, 포로 1만명을 기록한 미증유의 참패'를 당했다. ▲파파로호는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인공호수다. 6.25 전쟁 때 피비린내 나는 전투장이었던 호수가 이제 사람들을 부르는 낭만적인 산책길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그 퇴각로가 461번 도로였다. 퇴각로가 막힌 중공군 병사들은 호수를 헤엄쳐 건너다 익사했다. 국군 1개 소대가 중공군 1개 대대를 생포했다는 기록도 있다. 도로는 물론 주변 능선과 계곡에는 중공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작전 차량들은 중장비로 시체들을 길섶으로 치우며 전진했다. 1955년 11월 18일 대통령 이승만이 이곳 육군 6사단을 방문했다. 대한뉴스는 "대통령 각하께서 파로호라고 명명하신 화천 저수지의 명명 기념비 제막식이 11월 18일 현지에서 거행되었다"고 보도했다. '파로호비'는 지금 안보전시관 위쪽 숲 속에서 파로호를 내려다본다. ▲이승만 대통령 친필을 새긴‘파로호비’. 파로호는 1944년 일본 총독부가 수도권 군수공장 전력 공급용 발전소를 만들며 생긴 인공호수다. 원래는 파로호가 아니었다. 대붕(大鵬) 호였다. 이후 7년 만인 1951년 호수 이름은 파로호로 바뀌었다. 대붕호라는 이름은 금세 잊혔다. 1987년 4월 호수 북쪽에 평화의 댐 건설이 시작됐다. 호수 물이 빠졌다. 화천댐 옆에서 비석 하나가 발견됐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大明鳥堤 昭和 十九年 十月 竣工(대명제 소화 십구년 시월 준공)'. 대붕이 사는 호수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초명새가 사는 뚝방이라고? 간악한 일제 꼼수에 화천이 발칵 뒤집혔다. 과연 그럴까. 초명새(明鳥)는 남쪽 세계에 사는 전설 속 새다. 물에 감응하는(至水之感) 신조(神鳥)다. 봉황보다 초명새가 호수 이름에 더 어울리고 '간악' '꼼수' '만행'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작법이다. 장윤일과 김영순 원주 사람 장윤일은 나이 스물에 화천 비수구미로 흘러들었다. 화전(火田)으로 먹고살리라 호수로 숨어들었다. 일찌감치 춘천에서 들어온 윗집 처녀 김영순을 만나 혼인을 했다. 김영순은 열일곱이었고 장윤일은 스물셋이었다. 1965년 4월 7일이었다. ▲김영순, 장윤일 부부와 맏아들 장복동. 오른쪽은 2013년 5월 결혼 48년만에 찍은 웨딩사진. 일곱 남매 장녀 김영순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도 착하다고 해서 결혼했다. 밥 하나 안 시킨다더니 밥 안 시키긴, 다 시켰어, 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그렇게 잘해." 남자가 말했다. "… 그러지 않으면 여자들이 안 오거든.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김영순이 말을 잇는다. "뭐? 밭 양쪽에 내 사진 걸어놓고 김 한 번 맬 때마다 내 사진 보면서 살겠다고? 얼마나 근사해? 그 말에 속아서 내 나이 열일곱에 이 남자랑 결혼했다. 어이구,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하고 살았네."그 삶은 이러했다. 혼례 열흘 만에 남편 장윤일이 입대했다. 제대를 한 달 남기고 맏아들 복동이 태어났다. 돌아온 남편은 단양 탄광촌 잡부로 떠났다. 온통 새까만 세상에 질려, 아들을 둘러업고 따라간 아내는 40일 만에 남편을 끌어내 비수구미로 돌아왔다. 낚시꾼들 수발 들며 돈을 벌었다. 남편은 나물 뜯으러 가고 아내는 밥을 했다. 조각배 저어가며 낚시꾼들 심부름을 했다. 비가 오면 물 퍼내며 노를 저었다. 살림집에는 손님 재우고 부부는 비닐하우스에 살았다. 눈을 뜨면 밤새 내뿜은 숨결이 이불이며 옷가지를 적셔 놓았다. 장작불에 옷가지를 말리며 밥을 짓고는 조각배로, 산으로 달려갔다. 산으로 간 남편은 비탈을 굴러 피투성이로 돌아오곤 했다. 뱀에게 물려 죽을 뻔도 했다. 그럴 때면 아내 김영순은 이리 말했다. "애들 안 가르치고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그냥 우리 식구가 다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다음 날이면 애들 가르치는 게 합당하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변하곤 했다. 하여 뱀에게 물리고 비탈을 굴러 내려오는 삶이 반복됐다. 김영순이 말했다. "살아온 생각 하면 혼자 자면서도 웃는다. 내가 맹추라, 그게 사는 건 줄 알고 살았다." 평화의 댐과 비수구미 겨울 넉 달 호수가 얼면 건넛마을까지 걸어서 마실을 다녔다. 밤새워 화투 치며 놀았다. 날이 새면 함께 다음 집으로 가서 또 놀았다. 보름밤이면 계곡 위로 올라가 후라시 비추며 메기를 잡았다. 딱 먹을 만큼만 잡았다. 1987년 그 이름도 유명한 평화의 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꼭대기 해산령에 터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아래 마을까지 작업도로가 생겼다. 대단히 많이, 삶이 바뀌었다. 장윤일이 말했다. ▲평평화의 댐 아래‘비목공원’. "트럭 기사들이 차 밧데리로 메기를 잡은 거라. 그 많은 트럭이. 한 시간에 비료 포대로 2개를 잡았느니, 3개를 잡았느니 소문이 나서 터널 공사 2년 내내 밧데리로 계곡을 지져놓은 거라. 나중에는 개울에 약을 풀어서 집 앞에까지 고기들이 떠올랐어." 충직하던 누렁이도 두 번 차로 쳐서 둘러업고 가버렸다. '귀한 생명들이니 먹을 만큼만 잡으라'고 네 남매에게 들려주던 교훈은 무색해졌다. '에티켓이라곤 전혀 없는 도시 사람들' 손에 고추밭은 짓밟히고 익지도 않은 배나무는 가지째 꺾여나갔다. 이리로 가기도 하고 저리로 흐르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길이 마을 어귀까지 뚫렸다. 무례한 도시 사람들이 비수구미에 돈을 뿌리고 갔다. 부부가 던져대는 날것 그대로 인생 이야기에 그 사람들이 울고, 또 찾아온다. 김영순이 말했다. "내 살아온 역사가 너무 힘들었는데, 남에게는 재밌나 봐." ▲평화의 종 위, 날개 잃은 비둘기. 그 돈으로 부부는 네 남매 어엿하게 키워 시집 장가 보냈다. 전기밥솥에 밥 안쳐놓고 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서 먹고 싶다던, 문명화의 꿈도 실현됐다. 김영순 표 산나물밥 식객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밥값 깜박하고 갔다가 입금해주는 손님들을 보면 "그래도 우리나라는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순이 말했다. "댐 공사 전에는 70리 뱃길뿐이었는데, 꿈같은 얘기였는데… 여기 길 날 줄 누가 알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면허증을 딸걸. 어디 가고 싶어도 누가 데리고 가야 갈 수 있으니 이거 원, 더러워서." 목소리에 물기가 비쳤다. 평화의 댐, 미륵바위와 꺼먹다리 화천읍에서 461번 도로를 거쳐 평화의 댐으로 북상해본다. 화천댐을 건설할 때 만든 다리가 나온다. 목재 상판과 난간을 콜타르로 칠해 꺼먹다리다. 발전소에서 그 옆에 콘크리트로 또 다른 다리 기초를 만들다가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소련이 그 위에 교각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상판을 올려 다리를 완성했다. 세 나라가 합작한 다리 이름은 구만교다. ▲미륵바위 앞에 있는‘숲으로다리’. 소설가 김훈이 작명했다. 더 북상하면 비수구미를 격변시킨 해산터널이 나온다. '아흔아홉구비'라는 표현이 절대로 과장이 아닌 험한 길(내비게이션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끝에 평화의 댐이 나온다. 옆에는 공원이 있다.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수집하고 기부 받은 탄피 1만관(37.5톤)을 녹여 종을 만들어놓았다. 평화의 종이다. 9999관으로 종을 완성했다. 1관은 따로 비둘기 오른쪽 날개를 만들어놓았다. 통일이 되는 날, 종 위에 날개 없이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에 날개를 붙일 계획이다. 공원 아래쪽에는 비목공원이 있다. 가곡 '비목(碑木)'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1960년대 ROTC 장교 한명희(전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는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했다. 1967년 그가 쓴 시에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인 가곡이 비목이다. 10년이 지난 1977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은 "이 노래가 실린 음반 판매량은 이미자의 음반 '동백아가씨'(15만 장)를 크게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공원에는 비목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마음이 먹먹하다. 낭만적 공간으로 바뀐 파로호 2009년 4월 25일 김영순이 환갑을 맞았다. 시동생 장윤옥이 비수구미 계곡 7㎞를 걸어내려와 형수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아궁이 앞에서 뜬눈으로 밤새우기 일쑤였던 나날들… 긴 세월 모진 세월 뒤로 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모두 울었다. 거짓말쟁이 남편도 울었다. 김영순은 "가보(家寶)"라고 했다. 2013년 5월 10일, 결혼한 지 48년 한 달 3일 만에 김영순은 평생 소원이던 웨딩사진을 찍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리 답한다. "너는 왜 했냐. 나도 여자다." 461번 도로변은 단장됐다. 주민들은 미륵바위에 기대어 미래를 꿈꾼다. 소설가 김훈이 '숲으로다리'라 명명한 낭만적인 다리가 숲으로 사라진다. 비수구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작업도로는 산책로가 되었다. 화천 사람들은 그 길을 선로(仙路)라고 부른다. 그 길에서 화전민 아들 장복동(49)에게 물었다. "당신은 비수구미에 살 것인가." "죽을 때까지." 또 물었다. 20년 뒤 비수구미에 와도 반기겠냐고. "죽을 때까지." 부부가 떠나고 없을지도 모를 그 작은 계곡에서, 나는 칠십 노인 장복동과 재회하는 꿈을 꾸었다. 모진 삶 다 끝나고 훨훨 나는 꿈을 꾸었다. [50] 소년 임금 살인사건과 영월 미디어박물관장 고명진559년 전 청령포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평온하게(寧) 지나가는(越) 땅, 영월(寧越)이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한번 들어가면 큰 화(禍) 없이 무탈하게 살 수 있는 땅이다. 하나 559년 전 열일곱 먹은 소년이 영월에 가고 살고 죽은 내력은 그 누가 보아도 평온할 수 없었다. 소년 발걸음 닿은 곳은 빠짐없이 21세기 관광지요, 인문 기행 목적지가 되었다. 소년 이름은 이홍위요, 그가 죽고 나서 200년 뒤 붙은 이름은 단종이다. 강원도 영월과 이홍위, 노산군, 단종 1457년 6월 22일(이하 음력) 조선 7대 임금 세조는 내시 안노를 화양정으로 보내 영월로 떠나는 조카 홍위를 배웅했다. 자기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멀쩡하게 임금으로 있는 눈엣가시 어린 조카를 상왕으로 앉히고 왕이 된 지 햇수로 3년 만이다. 그 전날 세조는 조카를 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유배를 명했다. 화양정은 지금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있던 정자다. 세종 임금이 만들고 이름 지은 정자다. 1911년 큰 벼락을 맞고 부서져 터만 남아 있다. 나흘 뒤 세조는 형수이자 노산군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묘를 파헤쳐버렸다. 어미 묘가 어찌 됐는지 알 턱 없이, 열일곱 살 소년은 양주·양평·원주를 거쳐 일곱 날 만에 영월에 도착했다. 주천을 지나 영월로 들어가는 입구 배일치 고개에서 소년은 서쪽 한양을 향해 큰절을 했다. 영월에 다다르자 큰 고개가 나왔다. 마침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군졸 쉰 명은 노산군을 서강 건너 청령포에 가뒀다. 궁녀들도 함께였다. 서강이 360도 휘어들고 한쪽은 절벽인 담벼락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를 유배지로 고른 사람은 영월 수령을 지냈던 신숙주였다.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서강이 석회암 지대를 흐르며 만든 물돌이동이다. 559년 전 이 절경 속에 열일곱 살 먹은 소년 이홍위, 단종 임금이 두 달 동안 유배됐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수양대군에 왕위 뺏긴 어린 임금 단종 영월 유배 넉 달 만에 사약 받고 시신은 버려져 세조는 옷 열 벌을 보내고 사시사철 제철 과실이 끊이지 않도록 배려도 했다. 청령포에 우물이 없다고 하니, 우물도 급히 뚫으라 자상하게 지시도 했다. 매달 영월 수령에게 조카 문안을 드리라고 엄명도 내렸다. 가뭄이라 전국에 술을 금했으나 청령포만큼은 술을 바치도록 일러두었다. 석 달 뒤 역모를 계획하던 금성대군 무리가 발각됐다. 10월 21일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 죽었다. 나라에서는 예로써 장사 지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조선실록에 세조 3년 6월 22일부터 10월 21일까지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다른 기록은 하나같이 단종이 1457년 10월 24일 사약을 먹고 죽었다고 적고 있으니, 실록 기록자는 단종의 죽음을 사흘 전에 예언했다는 말인가. '예로써 장사 지냈다'는 기록 또한 세간에 전하는 기록과 영월 땅에 남은 흔적으로 볼 때 터무니가 없다. 역사는 기록이고 거울이며 교훈이며 반(反)교훈이다. 그릇된 기록은 교훈도 반교훈도 될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하는 고명진 ▲미디어기자박물관 관장 고명진. 1980년대 이래 고명진은 최루탄을 맞고 살았다. 1984년부터다. 고명진은 사진기자였다. 주간시민, 경향신문, 선데이서울, 한국일보, 통신사 뉴시스까지 1975년부터 2010년까지 고명진은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했다. 은퇴했으면 세상 구경이나 하고 동무들과 앉아서 음풍농월하는 인생도 즐거웠겠다. 그런데 기록하는 습성은 떨쳐내지 못해서 은퇴 이듬해 고명진은 현역 때 그러모아 둔 온갖 기록 싸 들고 영월에 내려와 미디어기자박물관을 열고 말았다. 기억하는가. 1987년 6월 부산에서 대형 태극기 앞을 웃통을 벗고 뛰어가며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던 사내 사진을. 비폭력을 상징하는 이 사진은 1999년 12월 31일 미국 AP통신사가 발표한 '금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됐다. 이 사진을 비롯해 그가 민주화 시위 때 찍은 사진들은 지금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명진이 말했다. "역사는 기록이다. 거대한 역사가 전부가 아니다. 작고 세밀한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나는 그 역할을 했다." 겁에 질린 노인의 눈망울, 돌멩이를 쥔 대학생의 주먹이 역사라고 그가 말했다. 박물관에는 그가 현역 시절 쓰던 카메라, 필름, 신분증, 출입증, 동료가 기증한 출입국 기록, 신문, 완장, 고명진이 촬영한 역사적 사진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최근 유행 중인 드론 촬영 교육도 하고, 사진을 통해 초등학생들에게 잔잔하되 거센 역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왜 영월에, 왜 박물관인가. 그가 말했다. "원래는 단양에 가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그런데 마누라 친구가 영월 놀러 오라고 해서 갔더니 문 닫은 박물관이 두 곳 있다는 게 아닌가. 귀신한테 홀렸다." 장터에 가다가 자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단양으로 가려던 고명진의 발길은 잠시 영월에 멎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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