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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1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10.09.15|조회수857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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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1/개념과 내용구성, 강의자:박홍섭 목사

   

1.종말론의 개념과 정의

1)종말론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한자를 보면 끝에 관한 것이다. 끝 종, 끝 말이다. 영어 단어 Eschatology는 헬라어의 두 단어 eschatos와 logos가 합쳐진 것으로 “마지막 일들에 관한 것 가르침”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끝과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의 끝이고 무엇의 마지막 일에 관한 것인가? 역사의 끝과 역사의 마지막 일들에 관한 것이다. 역사는 개인의 역사와 이 세상의 역사가 있으므로 종말론을 사전적으로 정의한다면 개인의 역사와 이 세상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끝과 마지막의 일들에 관한 정보를 어디에서 얻는가? 성경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개인과 역사의 끝에 관한 성경의 진술들을 종합해서 체계화시킨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종말이 왜 중요한가? 역사의 끝에 모든 죄와 악에 관한 심판이 완결되고 구원과 생명이 영광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 가운데 완성되는 때가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이 중요한 것이다.

 

2)그러나 종말론에는 단순히 개인과 역사의 마지막 종말에 관한 것만 다루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이미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받을 영원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이미 받고 있는 부분이 있다. 역사의 끝에 완성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는 이미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 비록 아직 영광가운데 완성되지는 않았고 여전히 죄와 더불어 싸우고 있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이미 받았고 그 생명의 통치 가운데 살고 있다. 또한 역사의 끝에 완결될 사탄과 죄에 대한 심판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그 종말의 생명이 이미 현 세계에 들어와 있고 죄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현 세계에 들어와 있으므로 실질적으로 종말의 세계가 도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종말론에는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종말의 개념이 포함된다. 또한 종말론적인 의미와 사건도 다룬다. 그러기에 우선 미래적 종말을 다루기 이전에 이미 시작된 종말과 종말론적이라는 개념을 먼저 언급할 필요가 있다.

 

3)이 둘을 종합하면 종말론은 개인과 역사의 마지막을 다루는 동시에 시작된 종말론과 종말론적 구원사건을 함께 다루는 조직신학의 분과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소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종말론을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종말이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2.시작된 종말과 종말론적 사건

1)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이 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대라면 장차 올 종말의 세대에는 죄와 저주가 다 벗어지고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케 되는 그런 세상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이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 도입되어 있다. 지금 이 세대는 죄와 사망이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성령파송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무너지는 그와 같은 이중적인 성격의 세대이다. 미래 종말의 때에는 죄와 사망이 완전히 제거되고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 온 인류에게 넘쳐나고 하나님의 지배가 완전해져서 정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가 될 터인데 그것이 지금 이 세대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되고 도입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종말의 세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시작된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항상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어야 한다. 이미를 강조해서 장차 완성될 영광의 상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이 느슨해서도 안 될 것이고 아직만 강조해서 지금 누리고 나타내어야 할 생명과 안식을 빼앗겨서도 안 될 것이며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죄와의 싸움을 게을리 해서도 안 될 것이다.

 

2)그 다음, 종말론적이란 말은 무엇인가? 종말이 되면 이 세상에서는 그 무엇도 다시는 반복할 수 없다. 새 세상이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종말이 오면 다시 할 수 없다. 그처럼 역사 상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건들을 종말론적 사건이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님의 구속은 반복되지 않는다. 십자가의 죽음, 부활, 오순절의 성령강림, 재림은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도 단 한 번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구속적인 동시에 종말론적이다. 또한 종말론적이란 말은 종말을 바라보며 사는 경건한 삶의 자세를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종말을 공부할 때 단순히 역사와 시간의 끝과 거기에 관한 것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종말론적 사건과 시작된 종말을 동시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3.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1)시간과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이다. 그런데 이 역사의 시작은 하나님나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실 때 무작정 시작하시지 않고 영광스러운 완성을 내다보시고 시작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도 예상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영광 가운데 완성시키시고 영광받으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모든 과정을 역사를 통해 진행해나가신다. 이처럼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고 완성되는 무대라고 한다면 역사는 반드시 끝이 있다. 종말은 구속역사의 완성이고 종결이라고 할 수 있다.

 

2)역사를 이해하는 관점이 기독교와 세속적 관점이 다르다. 헬라철학은 역사를 직선적으로 보지 않고 순환적으로 보았다. 같은 것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특히 플라톤은 세계를 영원의 세계이며 시간은 영원의 모형이어서 영원하고 완전한 것은 원형의 순환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에 의하면 물질이 시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존재이다. 물질이 영원하기 때문에 원래 시간이 없다. 이런 세계에 종말이 있을 수 없다. 역사의 진행보다는 이데아의 현시만이 중시 되는 역사관이 플라톤의 역사관이다. 토마스아퀴나스는 세계의 창조를 증명할 수 없고 부인할 수도 없다고 했다. 아퀴나스의 역사관은 시작을 말할 수 없으므로 끝도 말할 수 없다. 칸트는 세상의 시작이 있느냐 없느냐는 양쪽으로 다 설명하고 말할 수 있는 이율배반에 속한다고 했다. 여기에도 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기독교의 역사관은 하나님나라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향해서 진행되는 직선적 역사관이다. 비록 겉으로 볼 때 인류의 역사가 고난과 전쟁, 기근, 죄악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이 역사가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끝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광 중에 만나든지 심판 중에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역사의 진행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산출하고 양육하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택한 자들을 부르신다. 왜 시간이 걸리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 나라이기 때문이다.

②하나님나라를 진행 한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 보이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역사는 무의미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하고 진행하는 일을 한다.

 

4.하나님의 나라와 종말론

1)시작된 종말론의 개념에서 하나님나라의 이해는 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시록 까지 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인데 인류 역사의 시작과 문명의 시작과 모든 것의 시작을 보여준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 시작이다. 곧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나라를 시작하신 것이다. 우주를 만드시고 그 가운데 지구를 만드시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나라의 땅과 백성을 만드신 것이다. 선악과 언약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다. 주권자의 통치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의 3요소인 영토, 국민, 주권이 형성된 것이다. 이 나라는 백성들이 언약에 충실할 때 영광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가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으로 파괴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나라의 왕인 하나님의 통치에 반역하는 일이 생겼고 그 반역한 백성을 지배하는 사탄의 나라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파괴를 방치하지 않고 다시 고쳐 이 나라를 원래의 계획대로 완성시킬 것이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경륜이라 부른다. 구속경륜은 종말의 때에 완성될 것이다. 사탄은 완전히 패배해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고 그와 더불어 하나님께 반역했던 인생들도 지옥의 영원한 형벌 가운데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받은 백성들은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2)그러나 지금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이 성취되었고 구속받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다. 아직 죄 가운데 싸우며 살아가야 하기에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성취되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도래해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임해있는가? 마13장을 보라.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모습이다. 종말에 임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다 드러나지 않는다. 다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의 비밀이라고 하셨다. 여기 비밀은 미스테리이다. 시크릿이 아니다. 보기는 보아도 그것이 천국인지 모르도록 와 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같은 모습이며 밀가루 서 말 속의 누룩같이 와 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 자신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메시야인줄 모르게 와 계신다. 예수님은 세상적 기대와 인간의 욕망대로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차원의 메시야가 아니다. 죄를 처리하고 구원을 주시기 위한 메시야다. 그래서 사람들이 메시야를 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버려버렸다.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때인 종말을 소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오해할 때 세례요한의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3)하나님나라의 생명의 현재성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지금 현재 죄인들을 다루시는 심판의 방법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종말의 때에 모든 죄를 심판하시듯이 지금도 그렇게 심판하시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나타내시면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인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진노도 다르게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불의와 불경건함에 대해 진노하시고 그것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시지만 장차 임할 종말의 때에 하실 심판과 다르게 하신다. 어떻게 진노하시는가? 롬1:18-32절을 보라. 지금도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나타나는가? 1:24, 26, 28절을 보면 내어버려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시고,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시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신다. ‘유기’ 이것이 지금 현재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이다.

 

3)왜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이 이런 모습인가? 왜 지금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와 같은 내용인가? 그것은 아직 구원받아야 할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믿기로 작정된 영혼들이 역사를 통해 다 구원받았을 때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때까지는 기다라고 묻히고 숨겨진 모습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시작된 종말의 모습이 이러하다. 그 영광과 그 권능이 다 드러나지 않았다.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가치를 아는 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보화를 사듯이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산다.

 

4)그렇다면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와 있다면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행2:17-21절을 보라. 성령이 임하면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산다고 한다. 이것은 요엘서의 약속이 성취된 것이다. 말세에 성령을 주시어 이렇게 살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강림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오순절에 임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다.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노인들이 꿈을 꾸고 청년들이 비전을 본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말하고 다른 것을 꿈꾸고 산다. 종말에 속한 영광을 보고 말하고 꿈꾸고 산다.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롬10: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요엘서의 인용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가? 바로 이런 의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고 다른 것을 꿈꾸고 소망하며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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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부산신학교 성은애 | 작성시간 13.04.24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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