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19:15-21, 거짓증언하지 말라. 20.7.8, 박홍섭 목사
도피성제도,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이웃을 위한 세 번째 규례는 거짓 증언에 관한 것입니다(15-2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인과 도둑질, 기타 악과 죄에 관한 일이 발생하여 재판장이 판결해야 할 때는 증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이때 한 증인의 말만 듣고 성급하게 판정하지 말고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을 때 확정하라 하십니다(15). 만약 위증의 문제가 일어나면 제사장과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긍휼히 여기지 말고 위증한 사람이 상대방을 모함한 대로 갚아 회중 중에 악을 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16-21). 그래야 회중들이 위증을 두려워하면서 그런 악이 이스라엘 가운데 만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재판에 있어 재판장과 관리들에 대한 계명은 이미 신 16:18-20에서 거론된 바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오늘 본문은 증인의 규정입니다. 재판에서 재판관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가 판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증인입니다. 증인의 증언에 따라 유죄한 자가 무죄가 될 수도 있고 무죄한 자가 죄인이 되며 심지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의 9계명에도 거짓 증언을 금하셨고 출 23:1-3에서도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 다수를 따라 부당한 증언을 하지 말라. 재판할 때 가난한 사람이라고 편들지 말라.”는 규정을 따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회든 자신의 이익이나 다른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위증이 만연한다면 그 사회와 공동체는 병든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믿고 사랑하고 따라가는 하나님은 우리를 속이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으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기에 주의 백성들은 자기를 위해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거짓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주변에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으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진실성이 증거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크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상하게 하고 아프게 하며 심지어 죽게 하는 것은 사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굉장히 악한 태도입니다. 특별히 법정에서의 거짓된 증언은 한 사람의 죄의 유무와 죽고 사는 것을 결정짓는 문제이므로 여기에서 거짓말하는 것은 가장 악랄한 죄입니다.
꼭 재판의 위증만이 아니라 뒷 담화 하는 것, 함부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모두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비방과 수군거림은 이웃과 지체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 또 다른 거짓말이 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31에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 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라는 말씀하셨고 세익스피어는 ‘오델로’에서 지갑을 훔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나쁜 도둑질이 영혼의 보석인 사람의 평판을 훔쳐 가는 거짓 증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두 세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죄와 악을 확증하라고 하십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입어 그 사실을 밝히고자 할 때 두세 사람의 증인을 확보하고 그 확보를 근거로 공적인 권력에 그 사실을 의탁하는 과정에서 복수심과 분노와 억울함이 폭발되지 않고 지연됩니다. 그리고 개인과 개인의 사적 복수의 고리가 끊깁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죄와 악을 확증할 수 없게 하고 반드시 두세 사람의 증언으로 확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법을 악용해서 두세 사람의 증인을 확보하여 거짓으로 증언하게 해서 자신의 이익과 뜻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가 늘 등장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의도가 완전히 왜곡되면서 사회 전체가 불의로 더럽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거짓을 증언하는 자들을 동해보복법에 근거해 엄히 처단하라 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라.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이니라” 거짓 증인을 동원해서 상대방의 재산을 빼앗으려 했다면 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위증의 문제를 크게 다루십니까? 위증이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죄인 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위증하지 말라’에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도 포함됩니다. 자신의 방관으로 지체가 억울하게 다치고 상하고 심지어 죽어간다면 그 또한 위증과 방불한 죄입니다. 나쁜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당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때 진실을 증언하는 증인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사실을 알 때 진실을 말하여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진리와 사랑과 공의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게 지배당하는 벌을 받는다”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다면 결국은 자신도 거짓에 지배되고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말하는 그 사람이 행하는 말과 행동과 죄와 악의 영향을 오롯이 받게 됩니다. 그건 벌입니다.
간혹 길가에 이런 현수막이 붙어 있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진실에 대한 바른 증언을 해줄 사람이 간절히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바른 증언을 해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억울함을 풀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모든 사실을 목격하고 알고 있는 사람이 증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냥 그대로 억울하게 당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에 운동선수 한 분이 구타와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면서도 그런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주지 않은 정황에 힘들어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위증하지 않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위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불의 앞에서 바른 증언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증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증언이 무엇일까요? 진리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싫어한다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내가 복음을 전하면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지고 관계가 요원해지는 것이 싫고 두려워서 복음증거를 외면한다면 무서운 진리의 방관 죄입니다. 하나님이 섭섭해하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런 현수막을 붙여 놓지 않았을까요? “십자가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복음의 증언을 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지체와 지체 사이의 신뢰는 정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재판이 무너지고 복잡해집니까? 다 거짓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사실을 말하면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답고 쉽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면서도 너무나 진실되게 말합니다. 자신의 탐욕과 이익을 위해 불의와 거짓을 동원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게임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부패한 우리의 본성은 끊임없이 거짓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지키고 확장하고 욕심대로 살라고 부추깁니다. 우리 안에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거짓의 본성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부패한 본성을 이기고 진실을 말하고 진리 편에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젠가 그 앞에 서서 직고해야 할 날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거짓을 말하거나 위증한 일이 있다면 회개하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사람이 나의 거짓 때문에 입은 억울함이나 피해를 보상해야 합니다. 나아가 거짓말하지 않고 위증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고 그 진리를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