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8-21, 유다 지파의 점령 이야기, 22.9.21, 박홍섭 목사
여호수아가 죽은 후 남아 있는 가나안 주민들과 싸움을 가장 먼저 시작한 유다 지파의 이야기가 서론 부분에서 계속됩니다. 여호와의 지시대로 순종한 유다 지파는 아도니 베섹을 물리친 후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합니다(8).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되어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것은 다윗 시대이므로(삼하 1:21; 5:6-9; 왕상 5장) 여기서 유다 지파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말은 완전한 정복이 아니라 예루살렘 지역의 남서쪽 산지를 차지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후에 유다 지파는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으며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점령한 뒤 거기서 나아가 기럇 세벨이라고 불리는 드빌의 주민들을 정복합니다(9-11).
그런데 여기에 조금은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삿 1:10부터 15절에 나오는 헤브론 정복과 드빌 정복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제시되는 갈렙과 악사와 옷니엘의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도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수 15:13-19을 보실까요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유다 자손 중에서 분깃으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주었으니 아르바는 아낙의 아버지였더라. 갈렙기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주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세벨이라.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함으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버지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니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네겜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
삿 1:10-15절과 거의 똑같죠. 이게 왜 문제입니까? 삿 1:1이 어떻게 시작합니까?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1:10-15은 여호수아 생전의 사건입니다. 왜 여호수아 생전에 일어난 일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일어난 사건 속에 있습니까? 사사기의 서술을 연대기적으로 보면 여기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저자가 신학적인 의도를 가지고 연대순이 아니라 주제별 사건으로 묶어서 기술하고 있다고 보면 문제가 풀립니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그 옛날 12명의 가나안 정탐꾼 중에서 10명의 정탐꾼이 한결같이 가나안을 물리적 관점에서 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을 때 여호수아와 더불어 유일하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관점에서 그 땅을 바라보았던 유다 지파의 대표였습니다. 40년이 지난 후에 그 땅을 분배받을 때도 그는 하나님께 받은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는 언약을 기억하여 “이 산지를 네게 주소서”라고 믿음으로 헤브론 땅을 요청했던 사람입니다(수 14:9-12). 주변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다른 땅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이 언약으로 주신 헤브론 땅을 요구했습니다.
헤브론이 어떤 땅입니까? 가나안 거민 중에서도 가장 장대한 거인족인 아낙 사람들이 사는 땅이고 별로 쓸모도 없는 산지였습니다. 갈렙은 그런 땅을 믿음으로 언약의 발걸음을 내딛어서 정복했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유다 지파의 가나안 정복을 서술하면서 갈렙이 믿음으로 정복한 언약의 땅을 유다 지파가 점령했다고 말함으로 이 정복이 힘을 바탕으로 한 제국주의적 정복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일어나고 있는 언약적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나머지 지파도 유다 지파의 갈렙이 가졌던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호수아 사후에 하고 있는 남은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 기록에 여호수아 생전에 갈렙이 헤브론에 거하는 아낙 자손을 이긴 사건과 옷니엘이 갈렙의 언약을 믿고 드빌을 점령하여 갈렙의 딸 악사를 아내로 얻었던 사건을 역사적 실례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옷니엘이라는 히브리 이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간은 영적인 해석이기는 하지만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이 이름에 갈렙이 험난한 헤브론을 정복할 수 있었던 비결과 여호수아 생전의 사건을 여기에 끌어오고 있는 신학적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사사기 3장에 가면 이런 옷니엘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사사로 등장하는데 그는 첫 사사인 동시에 가장 모범적인 사사로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며 40년의 평화를 이끕니다. 그런 지도력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가 나의 힘”이라는 그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이런 옷니엘이 믿음으로 드빌을 정복하고 갈렙의 딸 악사를 약속의 성취로 아내로 얻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갈렙으로부터 남방 땅 네겜과 윗 샘과 아랫 샘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오늘 사사기가 왜 여호수아 생전에 일어났던 갈렙과 악사의 이야기를 굳이 여기에 끌어와서 여호수아 사후 유다 지파의 정복 사건에 함께 묶고 있는지를 이해하겠습니까? 나머지 지파들도 이렇게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서 주시는 승리를 경험할 수 있으며 거기에 윗 샘과 아랫 샘에 해당되는 은혜의 선물까지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사기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는 16절의 모세의 장인이 속한 겐 족속의 후손에 대한 언급에서도 확인됩니다.
왜 여기서 뜬금없이 모세의 장인을 언급합니까? 언약과 연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모세의 장인은 겐 족속이었지만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동행하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복을 함께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민 10:32). 이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겐 족속의 후예들은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언약을 보존하는 지파의 대명사로 가장 먼저 앞장서서 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런 유다 지파와 함께 동행하기를 선택합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종려나무 성읍에서 올라와 아랏 남방에 위치한 유다의 황무지로 내려가서 유다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이방 족속 출신인 모세의 장인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면서 유다 지파와 함께 하기 위해 스스로 불편한 황무지로 가는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더해야 하지 않겠냐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기록들을 보면 그 도전에 합당한 모습만 아니라 불길한 모습이 함께 보입니다. 우선 17-19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과 함께 가서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유다가 또 가사 및 그 지역과 아스글론 및 그 지역과 에그론 및 그 지역을 점령하였고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유다 지파는 계속 시므온과 함께 스밧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고 그 성읍을 호르마라 이름합니다. 그리고 가사와 아스글론과 에그론과 그 주변 지역들을 점령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19절은 여호와가 유다 지파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러나 19절 후반부에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유다 지파가 산지 주민들은 다 내어 쫓았지만, 골짜기 주민들은 철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했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바로 앞에 여호와가 함께하셔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이루었다는 보고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쫓아내지 못했다는 이 찜찜한 실패의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철병거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철병거 문제는 지금 불거진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호수아를 통해 철병거와 연관한 약속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 17:14-18을 보십시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 요셉 자손이 이르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하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주하는 모든 가나안 족속에게는 벧 스안과 그 마을들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주하는 자이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다 네것이 되리라. 가나안 족속이 비로고 철 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 하였더라”
요셉 자손이 땅이 적다고 더 큰 땅을 달라고 요청했을 때 여호수아는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산림을 스스로 개척해서 차지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 지파의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여호수아의 말에 반발하면서 거부합니다. 거부의 가장 큰 이유는 그 골짜기의 모든 주민들이 철병거를 가지고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가 아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철병거를 가지고 강하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네가 능히 쫓아내고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수 있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여호수아 개인의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유다 지파의 정복 이야기 마지막은 이 철병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과연 철병거 때문이었을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철병거가 맞죠. 그러나 그전에 그들이 누렸던 승리가 철병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라면, 쫓아내지 못한 이유도 철병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한 불신앙이 원인입니다. 실패한 이유를 찾자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큰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저자는 20-21절에 다시 갈렙 이야기를 소환합니다.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헤브론을 갈렙에게 주었더니 그가 거기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내었고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오늘까지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 잘 보십시오. 오늘 본문의 구조를 잘 살펴보십시오. 8-19절 상반절 까지는 갈렙이 주도한 유다 지파의 승리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19절 하반절에 철병거 때문에 쫓아내지 못한 유다 지파의 실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 20절에 다시 갈렙이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낙의 거인들을 쫓아내고 헤브론을 점령한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철 병거 때문이 아니다. 갈렙 봐라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21절에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베냐민 지파 이야기가 첨가됩니다. 이들의 실패도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갈렙이 보여주었던 믿음의 모습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갈렙을 통해 성공과 실패가 대조되는 이 분명한 저자의 의도가 보이십니까?
철병거가 문제가 아니고 아낙 자손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강력한 아낙 자손들이 버티고 있는 헤브론 땅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달려들었던 갈렙과 함께 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드빌 점령을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옷니엘이 갈렙의 약속을 믿고 했습니다. 아낙 자손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철병거가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믿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강합니까? 철병거가 강합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 생전에 일어났던 갈렙과 옷니엘의 사건을 소환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기발한 전략도 없이, 변변한 군사력과 무기도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장대한 아낙 자손과 드빌과 싸워서 이겼던 갈렙과 옷니엘처럼 믿음으로 순종하는 싸움을 싸울 것인가? 아니면 철병거를 핑계로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하는 불순종과 불신앙의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이 물음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응답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