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5:11-14, 한해 동안 얼마나 자라셨습니까?
20.12.27, 박홍섭 목사
복 있는 사람, 빛과 소금, 더 나은 의인의 모습으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을 꿈꾸고 시작한 2020년인데 코로나로 점철되어 코로나로 저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들이 어느새 일상이 될 만큼 어렵고 혼란스러운 한 해였지만 되돌아보면 그 어느 때보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복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 절호의 기회를 우리들의 연약함과 신천지와 전광훈 같은 이단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 많은 비방과 욕을 자초하면서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이런 한해의 마지막 주를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면서 어떤 기준과 내용으로 한 해를 돌아보고 결산하고 점검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새해의 결심도 불신자와 달라야 하고 한해의 결산도 그 기준과 내용이 달라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한해를 지나오면서 얼마나 주님을 알기에 힘썼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일에 마음과 뜻을 바쳤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정상적으로 교회의 양육을 받고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비록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고 성령님의 인도를 더 예민하고 민감하게 말씀 속에서 누리는 영적 성장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저자는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을 위로하고 붙들기 위해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론의 계열을 따라 임명되었던 인간 대제사장과 달리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더이상 설명을 이어가지 못하고 갑자기 독자들을 향한 경고와 책망의 말을 합니다. 독자들의 영적 상태가 이 설명을 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 배교의 위험까지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5:11부터 6:8절까지입니다.
본문 11-14을 다시 보십시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멜기세덱은 그냥 제사장이 아니라 왕입니다. 그는 살렘 왕으로 의의 왕이며 평강의 왕입니다. 그런데 왕이면서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왜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주를 믿는 성도들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벧전 2:9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가 고난 중에도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려면 자신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이해시키기 위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려 하는데 히브리서 독자들은 이 설명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영적 미숙함의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적어도 초신자는 아닙니다. “때가 오래되어서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터인데”라는 말은 그들이 신앙의 연륜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했던 시간으로만 본다면 적어도 이제는 젖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해서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고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옳구나 하는것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야 할 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이끌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아야 할 정도로 여전히 미숙한 영적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자는 독자들이 듣기에 둔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꼬집어 알려줍니다.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듣기에 둔하다는 말은 청력이 감퇴 되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력의 아둔함과 의지 면에서 고집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삶의 지향성에서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가 듣기에 둔하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 둔하다는 말의 원문은 게으르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게으르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일에 아무런 의욕이 없는 상태가 듣는 것이 둔한 것입니다. 이들은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지도 않고 묵상하지도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욕구가 없으며 깨닫고 실천하려는 의욕도 없으니 어려운 것을 들으면 깨닫지 못하고 해석해주어도 소화를 못 합니다. 설교를 들어도 재미있는 신변잡기만 귀에 들어오고 자기에게 좋은 말만 들립니다. 지금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말을 더 깊이 있게 설명해야 하는데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수준이 안 됩니다.
저자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마땅히 자라야 할 시간과 세월을 허락받았고 그 기간 동안 교회를 통한 가르침과 양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영적으로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젖만 먹는 어린아이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면서 주의 뜻을 좇아 사는 일에 승리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의 흐름과 풍조를 따라가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힘이 주어지고 형편이 나아지면 교만해지고 조금만 힘이 들고 어려워지면 한없이 절망하고 낙심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히브리서 저자로부터 이 책망을 받아야 하는 독자의 상황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은 고난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예수님을 떠나려는 배교의 유혹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큰 대제사장인 것처럼 성도도 세상을 향한 왕 같은 제사장의 사명을 갖고 있기에 고난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되고 고난을 피해서도 안 된다는 자신의 정체성과 고난에 대한 성경적 이해입니다. 이 이해는 히브리서 독자들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필요합니다.
고후8:9을 보실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닙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창조주입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우리와 같은 인생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낮은 자리에 내려오시고 우리와 같은 처지로 찾아오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편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장 부요한 분이 가장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의 제사장 되어주심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은 여기서 끝이 아니고 이런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의 정체성과 연결됩니다. 요17:18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보내신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문맥으로 적용하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제사장으로 보내신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을 믿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제사장으로 보내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왕같은 제사장으로 보냄을 받아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우리도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로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 이것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여기에 신자의 인생에 고난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약해서가 아닙니다. 실패하고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신자는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늘의 왕자요 공주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부요한 자로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처럼 기꺼이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며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은 온갖 고난과 실패와 연약함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려면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그들과 다른 왕 같은 인생의 존귀함을 보여야 합니다.
롬 15:1-3입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신자의 자기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신자는 재산과 지위와 힘의 유무와 상관없이 강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주와 한 몸 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이미 온 우주를 다스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영적 지위와 신분을 가졌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신자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 영적 지위는 돈으로 살 수 없고 힘과 권세로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누가 이런 신자보다 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그 강함을 자기를 위해 휘두르지 않고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데 사용합니다. 강하기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그 강함을 가지고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웁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영광이고 특권입니다. 이런 신자의 삶을 세상은 인정하지 않고 박수 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면서 조롱하고 이용할 것입니다. 자기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렇다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는 생각의 수준이 다르고 판단의 차원이 다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독자들은 이런 설명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듣기에 둔하고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신자의 자기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신앙에는 예수 믿고 다른 사람보다 잘되는 것만이 신앙의 유일한 증거와 가치와 의미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의 소망에 따른 영광과 존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열망은 없고 오직 자신의 소원과 욕심에 따른 기대만이 신앙의 전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강함을 다른 사람의 약함을 담당하기 위해 내어놓아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해도 몸이 따르는 것은 또 해결해야 할 숙제이지만 이해조차 못하니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허락되는 고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말씀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삶을 이어가다가 고난이 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의심하고 좌절할 뿐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저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강한 자로 부름 받아 희생하고 섬기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어찌 고난이 없겠습니까? 어찌 다른 사람에게 다 있는 고난이 없는 것으로 예수 믿는 것을 증명하고 자랑하면서 너희들도 예수 믿으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꿈꾸겠습니까? 그 모습은 제사장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삶은 고달픕니다. 눈앞에 만만한 현실은 없습니다. 학업, 취업, 연애, 인간관계, 결혼, 직장생활, 자녀 양육, 사업, 질병과 노화, 고독 등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버거운 문제들이 줄지어 인생을 찾아옵니다. 때로 아득하고 막연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갑니까? 쿠팡에서 프레시 배송 물건을 시키면 늦은 밤과 꼭두새벽을 가리지 않고 배송이 옵니다. 새벽에 문을 열면 물건이 배달되어 있습니다. 그 물건을 배송하려면 쿠팡맨들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조금씩 차이가 있고 모습은 달라도 사람들은 다 그렇게 힘겹게 삽니다.
그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 앞에 예수 믿으면 힘든 일이 없어진다는 복음은 진짜 복음이 아닙니다. 그 복음은 사이비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우리가 똑같이 힘든 인생을 걸어가면서 예수 믿으면 힘들어도 견딜 수 있음을 보여주고 힘들어도 웃을 수 있음을 보여서 그들의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복음을 맡기셨습니다. 어찌 고난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다른 사람보다 잘나가고 행복하고 형통한 삶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에 응답이 없다고 낙망하며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의 자리를 떠나 장성한 자리로, 초보의 자리를 떠나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을 따르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은혜와 긍휼과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는 인생으로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고 어려운 인생살이를 허락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의 나날이 그렇게 쓰임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유난히 고달픈 이번 한해도 감사하며 마무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제 잠시 TV를 보는데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개그우먼이 하는 말이 마음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자존감이 떨어질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되뇌인다고 했습니다. “나 빼고는 다 찌꺼래기 들이야” “내가 최고야!” 옆에 있던 출연자들이 다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은 늘 이렇게 자존감이 왔다 갔다 하면서 불안해하고 그때마다 자신을 이런 방식으로 지탱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것 같아서 측은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언제든지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는 하늘의 왕자들이며 공주들이죠. 그래서 우리는 “내가 최고야, 나 말고는 다 찌꺼래기들이야”라고 스스로 세뇌시키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나보다 남을 늘 더 낫게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왕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경쟁해서 그들을 이겨 나를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부름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신자의 인생이 자신의 능력과 성공과 실패에 좌우되지 않고 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확인하시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으므로 다른 사람과 경쟁해서 이기려고 목숨을 걸지 않고 내가 경쟁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준 영혼으로 불쌍히 여기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눈에 보이는 외형과 힘과 권세로 판단해서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어떤 사람이라구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보다 강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어낼 수 없습니다. 사단과 세상이 이런 우리를 무너뜨리고 위협하려고 온갖 칼춤을 추면서 달려들지만 겁먹지 마십시오. 우는 사자일 뿐입니다. 같이 칼춤을 추면서 대응하지 마시고 씩 웃으면서 이거 미친 짓 아냐? 라고 하고 지나가십시오. 누가 그러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자로 사는 것,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외면하거나 도망가서는 안 됨도 압니다. 내년에도 코로나19가 쉬이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이런 신자의 정체성으로 겪어나가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기회가될 수 있습니다. 다같이 벧전 2:9을 다시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