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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히 6:13-20,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오래 참는 믿음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21.01.31|조회수715 목록 댓글 1

히 6:13-20,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오래 참는 믿음

21.1.31, 박홍섭 목사

 

구원 얻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한 자들을 복음으로 불러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사 주신 생명의 결과이며, 전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 로마서 1:17 말씀처럼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주실 때 무작정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통해 믿게 하십니다. 약속이 없다면 믿음도, 소망도, 은혜도, 구원도 실체가 없는 맹목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주시지만 믿음의 주체가 되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약속하신 하나님과 그가 주신 약속을 신뢰하고 따르는 의지적인 결단이 생명의 반응으로 요구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기다림과 오래 참음의 과정이 수반됩니다. 이처럼 구원 얻는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작품인 동시에 우리의 책임적인 반응이 요구되는 인격적인 역사입니다.

 

12절에서 게으르지 않는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으라고 한 뒤 오늘 본문인 13절 이하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보증으로 맹세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오래 참음으로 받았습니다. 13-15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일차적으로 땅과 자손에 관한 약속이며 궁극적으로는 반드시 복을 주고 번성하게 하겠다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입니다. 12:1-2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람이 큰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복의 근원이 되려면 가장 먼저 자식이 있어야 하는데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는 11:30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는 말처럼 임신하지 못하는 불임 가정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구원은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불가능한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약속하심으로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실함을 설득하고 가르쳐서 그 약속을 신뢰하도록 이끌어가 마침내 어떤 말씀이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리까지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과정이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때로는 의심과 불신앙과 좌절, 때로는 믿음과 확신의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는 오래 참음과 기다림의 시간들로 주어집니다.

 

12장부터 21장까지는 이런 아브라함의 실패와 성공,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그의 믿음을 만들어 가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12장에는 가나안 땅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그 땅에 기근이 들자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 아내 사래를 누이라 속이는 실패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초월적으로 개입하셔서 바로를 책망하고 아내를 다시 찾는 은혜를 경험하지만 엄청나게 부끄러운 사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로 말미암아 아브람은 도리어 자신을 부르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인지를 경험하고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배운 아브라함은 13장에서 조카 롯에게 땅과 목축지를 양보하는 믿음의 여유와 사로잡혀 갔던 조카 롯을 구출해오는 믿음의 용기를 갖게 됩니다. 15장에 가면 약속과 달리 아직 아들을 얻지 못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자식에 관한 약속을 다시 주시지만, 사라의 불임을 아는 아브람은 그 약속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면서 네 자손을 이같이 주겠다고 거듭 확인해주시자 그제서야 이를 믿게 되고 하나님은 약속을 믿는 아브람을 의로 여겨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진 16장에서는 아브람 나이 86세 때에 사래의 여종 하갈을 통해 육신의 아들 이스라멜을 낳는 불 신앙의 사건이 터집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3년 동안이나 이스마엘의 재롱에 빠져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살게 됩니다. 17장에는 그런 아브람이 자식을 낳는 능력이 완전히 끊어진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시어 자손의 약속을 갱신해주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시면서 할례를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을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20장에는 그랄에서 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고 자기 목숨을 구하는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미련함의 실패가 반복됩니다. 그 부끄러운 실패에도 하나님은 또다시 개입하셔서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시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때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그것이 창 21장의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위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열심과 사랑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그의 믿음을 만들고 있습니까? 후자입니다. 아브람은 믿다가도 늘 의심하고 실패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에게 또 가르치시고 설득하시고 당신을 보여주심으로 그를 계속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참으로 하나님의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패와 넘어짐을 포함한 이 모든 과정을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오래 참았다고 인정해주십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은혜입니다. 이 은혜로 이삭을 받은 아브라함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배워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서 순종하는 자리까지 자라갑니다.

 

그것이 22장의 이삭을 바치는 사건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참아 기적으로 받은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이해하기 힘든 시험을 주십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두말하지 않고 이삭을 잡아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않고 돌려주면서 12장에서 하셨던 약속을 다시 반복해주시는데 그것이 오늘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22:16-17입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기 22장의 약속과 창 12장과 15장과 17장의 약속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내용은 똑같이 자손의 약속인데 앞에 없었던 맹세가 22장에는 나옵니다. 맹세는 보증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말을 다른 사람이 믿지 못할 때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합니다. 왜 맹세합니까?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인 보증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신 여호와입니다. 더군다나 자기보다 더 큰 권위가 없으므로 맹세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어리석고 미련하고 연약한 우리에게 확실한 보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6:16-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 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왜 맹세가 필요 없는 하나님께서 맹세까지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재차 약속을 보증해주십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낳을 수 없는 약속의 아들 이삭을 은혜로 얻고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인정받고 죽은 것 같았던 그 아들을 돌려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셨던 약속은 이삭이 전부가 아닙니다.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믿음의 백성들을 일으키는 일은 아브라함의 시점에서는 아직 요원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신약 성도인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약속하신 구원을 완성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을 상속으로 주실 때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고난 가운데 인내하고 오래 참는 기다림의 기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연약한 우리는 온갖 어려움에 노출되고 미련함과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은 실패와 넘어짐을 아브라함처럼 반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우리를 대표하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맹세까지 하시면서 우리 영혼에 소망의 닻을 보증으로 주십니다. 18절이죠.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는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약속을 기업으로 받기까지 믿음의 길을 인내로 걸어갈 때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소망해야 합니까? 우리 자신의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 그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신실하심이 하늘에 간직된 기업의 약속을 받는 날까지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인내로 믿음의 길을 가야 하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19-20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으로 들어가나니 그리고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닻은 바다에 파도가 일고 바람이 심히 불 때 바다 밑창에 힘있게 박혀 배가 파선되지 않도록 붙드는 역할을 합니다. 성도가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에도 배의 닻과 같은 영혼의 닻이 있습니다. 이 닻은 물 밑으로 박히는 닻이 아니라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견고하고 튼튼한 닻입니다. 휘장 안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만이 대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막고 있는 휘장을 가르고 들어가셔서 이제는 누구든지 자신을 믿는 자들이 지성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총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믿는 도리의 사도이며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오래 참음으로 걸어야 하는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우리 영혼의 닻이며 소망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얼마나 어려움이 많습니까? 주를 따라가는 믿음의 길인데 얼마나 고난이 많습니까? 세찬 풍랑은 또, 얼마나 자주 우리를 흔들어댑니까? 그때마다 우리가 피해야 할 피난처는 어디이며 우리가 의지해야 할 영혼의 닻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이 우리보다 미리 고난 가운데서 오래 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주님이 영원한 우리의 대제사장 되시기에 우리의 천국 입성도 확실하게 보증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망 되시고 영혼의 닻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 고난을 받으시고 휘장을 갈리 그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성도는 휘장 안에서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주님과 함께 영문 밖으로 나가 고난을 짊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고난도 없이 세상의 복만 기대하는 나태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의 유혹을 이겨내고 하늘에 닻을 둔 신자로 땅의 어려움 오래 참음으로 견디며,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힘쓰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가진 거룩한 나그네와 행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13:12-16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히브리서는 고난 중에 배교의 위험에 직면해있는 성도들을 붙들어주기 위해 우리의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그분을 깊이 생각하며 바라보라는 위로의 권면과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주어지는 경고가 주된 메시지입니다. 그 메시지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고난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구한 도성을 소망하면서 먼저 거기에 가신 주를 바라는 믿음으로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는 결론입니다. 우리를 불러 약속을 주시고 천성을 향한 믿음의 여정을 걷게 하신 주의 은혜를 찬송하면서 선을 행함과 나누어주는 삶을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 권면을 받아 고난 중에도 오래 참으면서 약속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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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susuhane | 작성시간 21.01.3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또 배우게 하시고 눈 뜨게 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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