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8:6-13, 더 좋은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21.2.28,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 8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와 부활로 땅의 제사장 직무를 다 이루시고 이제는 하늘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면서 우리를 편들고 있는 하늘의 대제사장으로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어서 예수님을 첫 언약보다 더 좋은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소개와 설명이 왜 필요합니까? 기독교 신앙을 떠나 첫 언약의 내용과 형식을 오해하고 율법주의가 되어 있는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중 상당수가 더 나은 신앙생활과 더 나은 삶을 기대하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만난 현실은 유대 동족으로부터 받는 어려움과 로마 당국으로부터 받는 핍박이라는 이중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내가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일이 잘한 일인가? 혹시 잘못 한 일은 아닌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실제로 배교하여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흔들리고 있는 독자들에게 저자는 유대교의 근간이 되는 옛 언약의 형식과 기독교의 근간이 되는 새 언약을 대조해서 예수님을 옛 언약과 비교할 수 없는 더 좋은 새 언약의 중보자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좋은 중보자를 버리고 어떻게 더 열등한 옛 언약의 형식 아래로 돌아가 율법주의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 설득을 위해 저자는 출애굽 후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시내 산에서 맺은 첫 언약과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워서 맺어주신 새 언약을 렘 31:31 이하의 말씀을 인용해서 대조합니다. 첫 언약은 흠이 있고 새 언약은 완전하다고 합니다. 첫 언약이 흠이 있다는 말은 언약 자체에 흠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을 대하는 이스라엘에게 흠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9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언약은 완전합니다. 옛 언약인 십계명과 율법은 완전한 주의 법으로 주의 백성들의 삶의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삶의 표준으로 삼고 살아야 할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법을 주셔서 그들의 손을 잡고 남편처럼 이끌어도 그들이 그 언약을 싫어하고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것이 흠입니다.
언약 자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그 내용이 똑같습니다. 언약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이겠다는 언약의 목표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방식이 다릅니다. 옛 언약은 지키면 상, 못 지키면 벌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법을 주실 때도 그들의 외부에 있는 돌판에 새겨주셨고 그 법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는 방식도 그들의 바깥에서 그들의 남편이 되어 손을 잡고 인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어기면 제사를 통해 용서해주고 다시 언약 백성으로 살 수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율법과 제사가 그들의 마음 자체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기꺼이 지키는 자리까지 옛 언약이 온전히 이끌지는 못했습니다.
첫 언약인 율법의 방식은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방향과 내용을 가르쳐는 주어도 그대로 살게 하는 능력 자체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죄를 깨우쳐 주기는 하지만 그렇게 살도록 죄 성 자체를 고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옛 언약을 통해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방식은 불완전한 방식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주시어 율법을 마음으로부터 지키는 완전한 방식이 되게 하기까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기다리게 하는 모형과 그림자, 초등교사와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옛 언약의 방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 언약 아래서는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을 때마다 소나 양 같은 짐승을 잡아 성전에서 인간 대제사장의 중보로 드리는 제사를 통해 그때그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첫 언약의 방식 아래서는 제사장들이 영원히 살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여서 그들이 죽으면 계속 제사장들이 바뀌어야 하고, 또 제사장 자체가 죄인이어서 다른 사람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자체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 언약의 예물과 제사는 외적인 정결을 주었지만 마음과 양심을 새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의 속 사람,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지는 못하는 일시적인 용서와 일시적인 정결로 그 효력이 제한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지키면 상, 못 지키면 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 은혜의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옛 언약이 우리 밖의 돌비에 말씀을 새겨서 삶의 표준으로 주어졌다면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성령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 안에 새겨주십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도 우리 밖에서 손을 잡고 인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 법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아가도록 끊임없이 중보하시고 간섭하는 방식입니다.
첫 언약의 이런 한계와 제한, 새 언약의 비교할 수 없는 큰 유익을 알지 못하고 율법 아래에 있으면 어떤 위험이 있습니까? 마음은 따라가지 않고 율법의 형식만 지키는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율법주의라고 하는데 유대교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첫 언약의 한계를 극복하고 완성 시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언약함을 짊어지고 그 연약의 결과로 일어나는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과 저주를 다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저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내가 저들의 죄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저주와 형벌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시고 새로운 은혜를 달라고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 힘을 달라고 우리를 변호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매번 그렇게 하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여 우리가 죄 성을 이기고 율법의 형식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는 생명의 자리로 가도록 끊임없이 간섭하고 가르치시고 설득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율법을 언약의 법으로 대하되 결코 율법주의로 전락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시고 마음에 역사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으로 율법을 대하게 하십니다.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 독자들이 돌아가려고 하는 유대교는 이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러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습니다. 여전히 구약의 인간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고 여전히 율법을 지키면 상, 못 지키면 벌이라는 형식 안에 갇혀서 지키는 자신과 못 지키는 자신에게 모든 신앙의 근거를 두고 잘 지키면 자랑과 우월감과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못 지키면 죄책감과 열등감과 좌절에 빠지는 율법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유대교의 율법주의가 인간의 타락한 종교성에는 부합합니다. 자신의 노력과 선행과 열심 있는 율법 준수가 의로움과 상 받음의 조건이 되고 신앙의 근거로 자리잡게 되면 그 근거 아래 있을 때 묘한 안정감을 느낍니다. 열심히 하는 한 안심하게 됩니다. 그렇게 못할 때는 분발하는 계기도 됩니다. 지도자는 그런 종교 생활로 사람들을 공동체 안에 강하게 결속시킬 수 있고 붙들어 맬 수 있고 충성을 이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자기의 행위와 열심에 믿음의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의 근거가 율법을 지키는 자신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있고, 새 언약의 더 좋은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아버지와 아들이 주시는 성령님께 있습니다. 굉장한 차이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유대교로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율법주의의 유혹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왜 율법주의에 빠집니까? 뭔가 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근거를 두기 위하여 열심을 내고 조금 뒤떨어졌다 싶으면 분발하고 좀 잘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할 수 있고 표시가 나고 자랑이 됩니다. 잘하면 상 받고 못 하면 벌 받는 이것만큼 사람의 종교성을 부추기고 열심을 내도록 독려하기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내 마음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아도 열심히 율법의 형식만 지키면 의로움을 확보하고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축복도 보장받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 타락한 종교성으로 열심을 내는, 그 열심이 결국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으로 이끄는 어리석은 인간의 종교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길은 율법주의의 열심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분의 말씀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리로 가는 길 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워주신 이러한 대제사장, 옛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보다 훨씬 좋은 새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믿음의 근거를 둡니다. 그리스도가 보내신 성령님께 모든 우리의 능력의 근거를 둡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기 자랑과 자기 의로 가지 못합니다. 모든 자랑과 영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립니다. 성령님께 돌립니다.
롬 8:3-4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변화 없이 신앙의 형식만으로 만족하고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진체 자랑하거나 시기하고 미워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은 아닙니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여러 가지 종교적 형식은 잘 지키는데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차갑디차갑기 그지없는 그런 신앙 말입니다. 겉으로는 부부로 사는데 서로 간의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는 형식상의 부부 같은 신앙 말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이 부어져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의 종교적 노력과 열심이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애나 자기 의로 가지 않고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더 좋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그분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