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히브리서

히13:10-16,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21.10.24|조회수509 목록 댓글 0

히13:10-16,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21.10.24,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에는 기독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붙들기 위해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교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유대교 신앙은 제단과 연관된 음식 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후의 유대교는 제단이 없는 형태로 변화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지만, 그 이전인 히브리서 당시의 유대교는 아직 희생 제의의 기초가 되는 제단과 그에 따른 음식 법 준수를 자신들의 거룩한 공동체 정신을 확인하는 가장 적합한 양식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하여 초기 유대교에서 제단이 없는 신앙생활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을 미혹했던 유대교의 거짓 교사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도 “너희들은 제단도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나”였습니다. “너희들은 제단과 연관된 음식 법을 지키지 않고 어떻게 구별될 수 있고 마음을 굳게 할 수 있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는 우리에게도 제단이 있다고 대답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서는 줄곧 제단과 연관된 제사장과 제물의 문제를 중심주제로 다루어오면서 우리에게는 구약과 유대교의 인간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뛰어난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주어져 있다고 논증했습니다. 그 제사장이 직접 영문 밖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렸기에 더이상 짐승의 제물이 필요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단은 눈에 보이는 유대교의 제단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제단이며, 영적 제단이고 천상에 속한 하늘의 제단입니다. 첫 장막을 섬겼던 자들은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었지만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신약 성도들은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린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실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은혜로 받았습니다. 지난주에 거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제단을 가진 신약 성도들은 그 제단에서 어떤 제사를 드립니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제단에서 짐승을 제물로 잡아 제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완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으니 더 이상 옛 제사와 제단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일에 거룩한 공 예배로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함께 모이는 시간만 예배로 드리지 않고 예배 후의 모든 일상을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사는 삶을 제물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 예배로 드립니다.

 

12:1-2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신약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영적 예배로 드리는 새로운 제사의 특징을 4가지로 설명합니다. 1. 영문 밖에서 죽임당한 그리스도의 능욕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고난받는 삶을 피하지 않는다(12-13). 2. 이 세상을 영구한 도성으로 여기지 않고 장차 올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산다(14). 3. 그 믿음과 소망으로 항상 예수로 말미암는 찬미의 제사를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께 드린다(15). 4. 오직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기를 잊지 않는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16).

 

예수를 믿는 믿음의 제단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 성도는 그리스도가 영문 밖의 십자가에서 고난과 수치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처럼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일상의 삶을 피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따라오는 세상의 조롱과 핍박과 수치와 능욕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주의 백성들이 드리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는 이 세상을 영원한 도성으로 여기지 않고 하늘의 도성을 사모하는 소망의 삶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믿음으로 사는 자기 백성의 고난과 수치를 반드시 영원한 영광과 존귀로 갚아주심을 믿는 이 소망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송의 제사로 이어지고, 그 찬송에 어울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는 삶의 예배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제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 믿음의 제단에서 항상 예수로 말미암는 찬미의 제사를 입술의 증거로 드립니다.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적 제사로 드립니다. 지금 잠시 거하는 이 땅의 거처가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장차 올 영원한 본향을 찾고 갈망하는 영문 밖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믿음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영문 밖의 삶은 예수를 먹고 예수를 마시는 예수로 말미암은 삶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힘이 되고 소망이 되어 예수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들은 항상 예수로 말미암아 찬미합니다. 예수가 그 사람의 입술의 열매요 삶의 증거입니다.

 

예수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사람, 예수 아니면 이유가 없는 예수로 말미암은 인생들은 선을 행합니다. 선하신 예수님을 먹고 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낌없이 자신을 나눠주셨습니다. 피를 흘려 주셨고 생명 전부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을 받고 사는 성도들은 서로 나누고 삽니다. 움켜쥐지 않고 흘려보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제단에서 새롭게 드리는 영적 예배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독자들은 은혜 가운데 허락된 새로운 제단에서 새롭게 드리는 영적 제사를 외면하고 다시 옛 제단과 옛 제사와 옛 제사장 아래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영문 밖의 고난 받는 신앙을 멈추게 하고 영문 안의 고난 없는 편안한 신앙을 보장해준다고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임수에 속아서 하늘의 영원한 도성이 아니라 이 세상의 화려한 도성을 꿈꾸며 은혜를 버리고 율법주의 신앙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신앙의 내용은 외면하고 그 내용을 담은 형식에만 함몰되어 형식을 지키는 만큼 자신을 자랑하고 의롭게 여기는 자기 치장의 종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명으로 살아내는 삶의 책임을 대체하는 종교적인 의식만 있을 뿐입니다.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 땅을 사는 그의 백성들에게 마땅한 삶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큰 대제사장으로 주셨고, 완전한 제물로 주셨고 그를 믿는 믿음으로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제단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고난이 있더라도 은혜를 입은 자답게 자신의 인격과 삶에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이 세상의 도성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그의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고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잊지 않아야 하는 책임이 따릅니다.

 

왜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제단을 의지하는 신앙의 형태를 좋아합니까? 삶의 책임을 종교 행위로 때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치장과 자기만족과 자기 자랑이 확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자기 자랑과 만족과 치장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와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참된 삶의 제사는 없습니다.

 

예레미아서 7장을 보면 이런 경고가 있습니다. 7:1-11을 보십시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성문 앞에 서서 들어오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경고하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지적이며 경고입니다. 너희는 이곳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길과 행위를 어긋나게 하며 불의를 행하고 힘없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며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적인 우상숭배로 가득하면서도 이 제단에서 제사하고 제물을 바치는 종교 행위로 그런 너희들의 삶을 포장하고 있구나. 너희가 여기를 여호와의 성전이라 부르면서 스스로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자랑하지만, 너희는 지금 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고 있으니 이곳을 여호와의 성전이라 부르지 말라. 나는 너희들이 이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종교적인 열심과 진심 어린 헌신도 우리의 인격과 행위에 하나님의 성품으로 나타나지 않고, 공의를 행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히 사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거짓이고 헛되다고 하십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영문 밖의 고난받는 삶을 외면하고 종교적인 행위로 그 모든 것을 대체하는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이런 자리로 가려는 무서운 시험입니다.

 

기독교의 신령함은 “비나이다 비나이다”의 종교 행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의 책임을 생각하고 감당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 책임은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생명 있는 자만 감당할 수 있고 예수를 먹고 마시는 자만 펼쳐낼 수 있는 영광과 명예이며 존귀한 특권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헌금과 예배와 헌신과 봉사가 종교 행위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로 잘 이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