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3:1-19,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2, 20.11.1, 박홍섭 목사
산상수훈에 이어 히브리서를 통해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그에 마땅한 신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낙심하여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 세상과 유대교의 율법과 의식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히브리 독자들의 상황입니다. 왜 이들이 낙심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려 합니까? 고난과 핍박, 그리고 그들의 기대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의 고단함 때문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기독교 신앙으로 입문했을 때는 고난이 없어지고 편안한 삶이 시작됨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다른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현실은 이들의 짧은 믿음을 회의하게 만들었고 낙심과 시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 되시며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지난주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모세와 비교되는 사역의 탁월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이유와, 그런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 그리고 신자의 삶에 허락되는 고난의 의미를 광야 이스라엘 역사를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저자의 경고와 권면을 따라가면서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신실하게 충성한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신실했으며, 모세도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칭찬을 넘어 훨씬 더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를 이유로 제시합니다. 하나는 모세가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 종으로 충성했다면 예수님은 모세가 증언한 증언을 성취하신 아들로서 하나님의 집을 맡아 충성했기 때문입니다. 종과 아들을 비교했습니다. 또 하나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소속된 구성원이라면 예수님은 모세가 충성한 그 하나님의 집을 지은 주인이라고 말합니다. 집의 구성원과 집의 주인을 비교해서 구성원보다 주인이 귀하다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온 집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불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거룩한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도 중하지만 교회를 만든 분은 더 귀합니다. 모세가 아무리 귀한 종이라도 구약 교회의 구성원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라 구약 교회와 신약 교회를 만든 하나님입니다. 교회의 주인이며 교회의 머리입니다. 누가 더 귀합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비교의 대상이 아니죠.
그런데 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합니까? 모세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실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도 신실했고 예수님도 신실했는데 예수님이 더 신실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실했던 모세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광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당했다면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했던 예수님을 떠난다면 어떻게 되겠냐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 다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신실했는데 모세는 종으로 신실했고 예수님은 아들로서 신실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자신을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했습니까?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지어져 가는 일에 말씀을 맡아 충성했습니다. 백성들이 반대하고 원망하고 불평해도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그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가는 일에 신실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압축하면 하나님께서 표적을 통해 모세를 붙들고 계심을 보여주시면 잠시 잠잠했지만 광야의 고통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목이 곧은 백성으로 돌아가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날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들은 틈이 날 때마다 이럴 바에야 왜 우리를 애굽에서 꺼집어내었냐고 모세에게 대들고 항의했고 종이었지만 애굽에 있었던 그때가 더 좋았다고 하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며 모세를 비방하고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모세에게 맡겨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시내 산에 모으시고 거룩한 율법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살았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말씀을 따르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광야에서 배워가야 했습니다.
신8:1-3입니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의 고난은 이들이 물들어 있었던 세상의 가치관을 빼어내고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새로운 가치관을 심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떡으로만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믿음의 방식을 배우는 수단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바로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지 않고 광야로 인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믿음의 삶을 가르치십니다. 이 믿음의 원리를 배우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감격 뒤에 광야가 반드시 따라옵니다. 이 훈련은 떡이 없는 광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이 없는 광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광야로 돌려 광야에서 말씀으로 필요한 떡과 물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배우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믿음의 기본적인 훈련을 배우게 하십니다. 이 훈련이 되어야 죄와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한 가나안의 무대에서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거룩한 제사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광야의 고난이 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완악한 마음으로 거역하고 늘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불평과 원망 속에서도 이들을 하나님의 온 집으로 만드는 일에 신실하게 충성했습니다. 모세가 신실했다는 평가는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민12:6-8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네 온 집에 충성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를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다고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구스 여자를 취했다는 것은 핑계고 사실은 민 12:2의 말씀처럼 여호와가 모세 너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너만 지도력을 발휘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온유한 모세가 이를 다 듣고 있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회막으로 콜 하십니다. 그리고 6-8의 말씀, 모세는 나의 온 집에 충성했다. 신실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다르고 너희들과도 다르다. 그는 내가 직접 대면해서 나의 뜻을 알리는 나의 종이다. 그런데 어찌 너희들이 그를 비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형제와 누이였던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거역하고 비방하고 대들 정도였다면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이들은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모세를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 한가운데에 모세를 세워 그들을 하나님의 온 집으로 만들어가시려 했고 모세는 이 일에 신실했습니다.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나의 온 집에 신실했다고 칭찬하십니다.
광야 이스라엘은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종 모세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 당한 완고한 실패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실패한 광야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지금 독자들이 모세보다 더 신실하게 하나님의 집에 충성했던, 하나님의 아들, 그 집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이스라엘 조상들이 갔었던 멸망의 길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7-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에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저자는 민수기 13-14장에 나온 광야 이스라엘의 배도를 해석한 시편 95편을 인용하여 너희들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한 이 길을 가려 하냐고 책망합니다. 광야 이스라엘은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훈련시키기 위한 광야의 시험을 거스르고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고난이 싫었습니다. 왜 고통스러운 애굽에서 나왔는데 또 고난이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신 하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로지 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고난 없는 편안함과 부와 성공을 누리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이 아니라 떡이었습니다. 이들은 떡으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라 더 많은 떡을 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떡을 주시지 않고 광야의 고난으로 이들을 거룩함으로 훈련시키자 이들의 마음은 완고해졌고 그 완고한 마음으로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배도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십시오. 고전1:22-24절입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무엇을 구한다고요?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인생들을 대변합니다. 이들이 구하는 표적은 무엇을 위한 표적입니까? 떡을 위한 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더 많은 떡, 부족함이 없는 떡을 보장해주는 신적 능력을 베푸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그런 경제적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인줄 알고 따르다가 주님이 주시는 떡은 그런 떡이 아님을 알고 실망하여 떠납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시고 진짜 표적이 되는 십자가로 가십니다.
마16:1-4절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길을 신실하게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어 끝없이 떡을 위한 표적을 구하는 우리의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고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자기 백성을 만들어내십니다. 이 일에 예수님은 신실하셨습니다. 충성하셨습니다. 그 신실하심으로 우리가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 예수님을 떠나 다른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유대교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독자들이 이길을 가지 않도록 경고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권합니다. 12-1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광야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고난이 오면 악한 마음을 품고 불평과 원망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이런 완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백성이라면 품을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많은 떡을 주는 메시아로 기대하던 사람들만 그렇게 악한 마음으로 배교하고 배도하는 것이죠. 참된 주의 백성들은 아무리 힘든 고난이 있어도 완고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떡으로만 살던 인생에서 말씀으로 사는 인생으로 탈바꿈합니다.
그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온 집,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은혜의 날개 아래 모여서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가졌던 그 확신의 마음을 인내로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에 참여하고 안식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신실함의 요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우리에게 주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신실하게 충성하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온 집, 주의 몸 된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모세의 신실함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졌고 그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온 집, 곧 주의 몸 된 교회가 되는 은혜와 영광을 입었습니다. 이는 인격적 책임과 반응으로의 우리의 신실함을 요구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했던 모세처럼, 그 집의 주인이되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충성했던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여러 인생의 고난을 통해 배우면서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는 일에 믿음과 인내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이런 교회를 세상 가운데 보여주지 못하고 개독교와 목레기로 조롱당하고 있습니다. 불신 가정의 부모들이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기를 거부하고 임대교회들은 건물 주인으로부터 예배당 재계약을 거부당하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히브리서의 독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나 유대교로 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신앙에서 보는 신앙으로 가고, 표적을 구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를 찾는 유대주의의 위험은 그 어느 때보다 큽니다. 저는 이런 엄중하고 시급한 상황에서도 교회가 복음의 거룩함을 회복하는데 진력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정치이념의 시녀와 맘몬의 부하로 전락 되는 작금의 배교적인 모습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로마정치에 관여하면서 제자들을 정치이념으로 무장시킨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교회들은 언제부터인가 목사들과 성도들이 기독교 신앙과 반공사상을 동일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사회주의 사상을 동일시하는 정치이념의 포로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과 생명이 아니고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저급한 기복주의를 퍼트리는 온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언제 우리를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성경이 언제 열혈당을 지지했습니까? 왜,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태극기 부대가 되었고 좌파 부대가 되었습니까? 왜 교회 안에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투고 싸웁니까? 예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한다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도리이며 신앙고백의 내용이며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펜데믹의 고난이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지 않도록 더욱 들은 말씀을 간직하여 떡으로만 사는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기회로 삼으시고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붙들고 인내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여기 있음을 보이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