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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수 9:1-27, 기브온 주민과의 화친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22.02.23|조회수185 목록 댓글 0

수 9:1-27, 기브온 주민과의 화친, 22.2.23, 박홍섭 목사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넜을 때 가나안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애굽을 나오게 하신 일과 요단 동편의 아모리의 두 왕, 헤스본의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에 의하면 이들은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들어온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여리고와 아이 성도 점령했습니다.

 

여호수아 9장은 그 후에 가나안 주민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반응이 나타납니다. 먼저 1-2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려 하더라” 가나안의 여섯 왕이 마음을 모아서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자는 결정을 합니다. 두려워서 간담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한 사람들이 왜 이런 태도의 변화를 보였을까요? 조금 전에 비록 아이 성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한번은 이스라엘에게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힘을 합하면 이스라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기브온 주민들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인근 지척의 여리고와 아이성이 점령 당함을 보고 그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임을 안 이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행색을 꾸미는 꾀를 내어 화친을 요청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겠냐고 하자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 곧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일과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격파하신 일을 듣고 당신들의 종이 되기 위해서 먼 나라에서 왔으니 제발 화친을 맺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이들의 말과 행색을 믿고 그들을 살리고 보호하겠다는 화친 조약을 맺고 맹세합니다(3-13).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사흘이 지나 이들이 먼 나라에서 오지 않고 바로 옆 기브온의 주민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맹세로 화친의 조약을 맺었기에 이들을 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종으로 삼습니다. 여호수아가 왜 우리를 속였냐고 책망하자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24-25이죠.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이같이 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많은 사람들이 9장의 내용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경솔하게 기브온 주민들에게 속임을 당한 실패의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에게 화친을 청한 기브온 주민들과 힘을 모아 이스라엘을 대적하기로 한 나머지 가나안 족속들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같은 말을 들었고 같은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한쪽은 자신들의 힘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맞서고 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께 굴복하고 화친을 요청합니다.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기브온 주민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하고 그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일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가나안 주민들과 힘을 합쳐 여호와를 대적할 것인가? 아니면 그 연합을 깨고 여호와께 항복하고 이스라엘게 화친을 요청하여 살길을 찾을 것인가? 이들은 후자를 선택합니다. 그래서 꾀를 생각합니다. 이 꾀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할수도 있지만, 잠언에서는 모두 “지혜”, “신중함” 등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번역됩니다.

 

분명히 이들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호수아도 왜 우리를 속였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했고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 앞에 항복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들이 거짓말을 해서 이스라엘이 피해 본 일이 있습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누가 손해 봤습니까? 지금은 전시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아이 성을 점령할 때 매복 작전을 지시하셨습니다. 패배하여 물러가는 척 속여서 그들을 유인하여 빈 성을 점령하고 아이 성 군대를 포위하여 전멸시켰습니다. 일종의 속임수입니다. 아이 성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속이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술이고 전략이라고 하죠.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접근해서 거짓말을 한 기브온 주민들을 비난하고 그 거짓말에 속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을 경솔하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 성경을 근거로 우리의 거짓과 속임수를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은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구속사적인 시각으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 본문은 기브온의 속임수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화친을 맺은 경솔함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을 제멋대로 결정한 잘못으로 규정한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어야 하는데 본문은 그 점을 조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족을 속이고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을 불쌍히 여기사 그를 구원의 은혜에 동참시키어 그와 그의 가족들을 살려주셨듯이 꾀를 내어 화친을 청한 기브온 주민들도 불쌍히 여겨 살려주시고 그들에게 여호와의 집을 위해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맡겨주신 구원의 은혜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여호수아에게 맡겼습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옳고 좋은 대로 행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생명과 운명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편에 연합되기 위해서 같은 가나안 거민과의 연합을 탈퇴했고, 동족을 배신하면서까지 생사를 하나님께 위탁했습니다. 실제로 10장에 가면 가나안 연합군이 자신들을 배신한 기브온을 치러 오는 위기를 만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생사를 걸고 하나님께 연합되기를 원하는 기브온 주민들의 행동을 믿음의 행동으로 인정해주십니다. 은혜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했을 뿐 아니라 레위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성막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천년을 사느니 내주와 함께 하루를 살 수 있는 복을 받았습니다. 저 유명한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는 기적도 하나님께서 이 기브온 성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행하신 기적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 9장이 말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일, 요단 동편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격퇴하신 일, 요단을 건너 여리고와 아이성을 점령하신 일을 모두 함께 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달랐습니다. 기브온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생사화복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종이 되었지만, 교만한 가나안 족속들을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싸우려 한자들은 멸망 당하고 화친을 요청한 자들은 목숨을 건지고 여호와를 섬기는 복된 일을 맡게 됩니다.

 

이 기사는 기브온의 히위 족속이 이스라엘을 속이고 꾀를 낸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화친을 맺은 것을 책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그런 실수까지 사용하셔서 기브온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신비와 주권을 보여줍니다. 그를 위해 처음부터 가나안의 여섯 왕들의 반응과 기브온의 반응을 대조합니다. 이들은 똑같이 들었습니다. 1절 끝에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했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듣고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로 힘을 합했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반면에 기브온 주민들도 똑같이 들었습니다. 3절에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똑같이 들었는데 이들은 꾀를 내어 화친을 요청합니다. 저들은 멸망하고 이들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9장의 내용은 명백합니다. “이 일”을 듣고 대항하여 싸우려 하는 자들은 멸망이요, 화친하고자 하는 자들은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멸망 당해 마땅한 히위 족속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화친을 요청하여 살았습니다. 이는 시편 2:12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화친의 명령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에게 화친을 요청하면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라 할지라도 진노로 죽습니다.

 

성경을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보기 이전에 영적으로, 구속사적으로 먼저 보아야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표면적으로는 속여서 목숨을 구했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 곧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그들이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들을 다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게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렸사오니”(24) 신앙고백 아닙니까? 이방인 히위 족속이라도 들려온 말씀 앞에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은혜의 현장이 있는 반면, 하나님의 행사를 보고 듣고도 불신앙의 반응을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여섯 왕들만 아닙니다. 이스라엘 안에도 있습니다.

 

누가 참 이스라엘입니까? 혈통이 아닙니다. 육정이 아닙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아닙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면적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행사를 듣고 자신의 생사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브온의 히위족속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음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속아서가 아닙니다. 구원은 그렇게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실수마저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누가 화친할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가나안 족속 중에 기브온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과 화친할 생각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직 기브온만 그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럼 그 마음은 누가 주셨을까요? 하나님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행사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 화친을 청해야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화합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화친할 수 없는 기브온이 화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처럼 천만번 멸망 받아 마땅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친을 맺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십자가로 막고 서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아내신 무궁한 긍휼의 결과입니다. 그 은혜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으니 왜 나는 나무를 패게 합니까? 물을 긷게 합니까? 불평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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