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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눅 21:25-36,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깨어서 준비하라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26.06.14|조회수32 목록 댓글 0

21:25-36,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깨어서 준비하라 26.6.14, 박홍섭 목사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종말 강화 마지막 부분을 대하고 있습니다. 임박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셨던 주님은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25절부터 28절을 보십시오.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그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역사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일월 성신에 징조가 있습니다. 해가 빛을 잃고 달이 어두워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립니다.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모습에 사람들이 두려움에 혼절합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때 주의 백성들은 일어나 머리를 들고 주님을 맞이합니다. 다시 28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심판자 그리스도 앞에서 온 세상이 두려움으로 고개를 숙일 때, 성도는 머리를 듭니다. 세상이 기절하여 쓰러질 때, 성도는 일어섭니다. 영광과 권능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심판자가 아니라 신랑으로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종말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소망의 날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속량의 날이고 타락한 세상의 허무함에서 벗어나 완전한 구원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날이 있습니다. 이날이 옵니다. 역사는 주님이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이날을 향하여 진전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이날의 확실성을 강조하십니다. 29절부터 33절입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팔레스틴의 여름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여름도 무화과 잎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날씨가 더워지지 않았지만, 무화과나무 잎이 연해지고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역사의 마지막 날도 그러합니다. 언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갑작스럽게 오십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반드시 여름이 오듯이 주님도 일월성신의 징조와 함께 반드시 다시 오셔서 역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날이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32) 이 세대가 예루살렘 멸망을 앞둔 예수님 당시의 세대인지, 역사의 종말을 가리키는 우주적인 격변의 징조가 나타나는 세대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님이 이 두 세대를 가까운 봉우리와 먼 봉우리로 함께 바라보면서 말씀하셨다는 예언적 원근 통시법의 해석을 취합니다. 어떤 해석이든 주님이 다시 오시고 역사가 끝이 난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날 지금 우리가 보는 천지는 없어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구원이 영광 가운데서 완성됩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이 하늘에 간직해놓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분깃으로 받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그날을 소망하고 기다리면서 삽니다.

 

그런데 그날을 기다리지 못하게 하는 방해가 있습니다. 34-36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주님의 다시 오심은 너무나 확실한 미래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싹이 나면 여름이 오듯이 확실합니다. 예루살렘이 주님의 말씀대로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 멸망했듯이 역사의 마지막에 주님이 이 세상을 완전하게 심판하실 것도 분명하게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확실한 주님의 다시 오심과 역사의 종말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들이 있습니다.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입니다.

 

이것들이 성도의 마음을 둔하게 해서 바른 종말 의식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방탕함은 자기 통제를 잃은 무절제한 삶입니다. 술 취함은 성령 충만과 대조되는 개념으로 알콜을 비롯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자신의 삶을 지배당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생활의 염려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걱정들입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는 자기 욕심을 따라 살 때 나타나는 증상들로 우리의 마음을 둔하고 무디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은 세상을 정신없이 즐기는 상태이고, 생활의 염려는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끝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나는 방탕하지 않아” “나는 술 취하지 않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에 젖어서 날마다 향락을 즐기는 삶만이 방탕함과 술 취함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밑바닥에 떨어지지 않아도 마땅히 살아야 할 성도의 오늘을 외면하고 다른 방향과 목적을 향하여 살아서 하나님이 맡기신 시간을 낭비하는 자체가 방탕함과 술 취함입니다. 방탕하지 않고 술 취하지 않았더라도 생활의 염려에 붙들려 성도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또한 방탕과 술 취함과 같이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만큼 마음이 둔하여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종말을 말하면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심지 않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 또한, 방탕함과 술 취함과 염려하는 생활의 변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내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 년 뒤, 오 년 뒤, 십 년 뒤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일을 세상에 속한 욕심으로 계획하거나 맞이하지 않고 종말을 아는 사람으로, 종말을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맞이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을 기도하고 깨어 있는 날들로 만들 때 그럴 수 있습니다. 36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라.” “모든 일에 깨어 있으라기도할 때 마음이 둔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 마음이 일상의 염려에서 주님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오늘을 깨어 성실하게 믿음으로 심을 수 있고, 기도할 때 내일 영광과 권능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주님을 신랑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종말을 시간적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을 믿음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자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성도는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과 세상의 끝을 생각하는 종말론적 믿음이 그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오늘 나의 일상에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에 영향을 받습니다. 먹는 것의 생각이 다르고 마시는 것의 목적이 다릅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방향성과 추구하는 내용이 다릅니다.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장사하고 공부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려고 애를 씁니다. 어떻게 해서든 말씀에 붙어 있으려고 몸부림치고 노력합니다.

 

벧전 4:7-11절은 깨어 있음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누가 이렇게 살 수 있습니까? 지금보다 더 잘살고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려는 마음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언제든지 내 삶이 끝날 수 있다는 생각, 지금 있는 모든 것이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어야 지금 있는 것으로 사랑하고 봉사하고 대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실 때 도둑처럼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고 없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예고 없이 오신다는 말은 평소의 모습과 평소의 신앙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깨어 있고 준비된 믿음은 특별한 시기에 특출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고 매일을 살아가는 평소의 모습에서 종말을 인식하는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언젠가 자기 인생의 끝이 있음을 알고 언젠가는 주님이 다시 오시며, 세상의 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알고 믿는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깨어 있는 것이고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면 깨어 있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둔하여진 것입니다.

 

폐암 진단을 받고 6개월 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은 분이 있었습니다.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빚도 갚고 사람들 사이의 오해도 찾아가서 풀고, 자녀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도와야 할 주위의 사람들을 돕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면서 자신에 대해서만 깨어 있고 하나님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한 것들을 회개하고 말씀 앞에 자신을 세워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6개월이 지나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살아 있었습니다. 병이 더 나빠지지 않아서 다시 검사해 보니 암이 아니었습니다. 오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들었을 텐데 의사를 고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집사님은 자신의 평생에 지난 6개월처럼 그렇게 진지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남은 일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깨어 있는 것은 그렇게 내일의 종말을 오늘로 끌어와서 평범한 오늘을 주님 맞을 준비를 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시고 언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놀라지 않도록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데 술 마시다가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음란한 짓을 하다가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도박을 하다가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부정부패를 일삼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기도로 늘 깨어 있는 저와 여러분,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잘 단장하는 일상이 되어서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더라도 잘 맞이하는 한우리 식구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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