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1:37-38, 성전에서, 26.6.21, 박홍섭 목사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누가복음 21장의 종말 강화를 살펴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이 예루살렘 멸망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가르쳐주는 징조로 가득 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매일 그것들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도 언젠가는 무너질 것 위에 인생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주님 때문에 미움을 받는 신앙의 박해 가운데서도 인내로 영혼을 얻으라고 하셨고, 술 취함과 방탕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실, 기도로 깨어 있으라는 그 말씀이 종말 강화의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 없이 바로 22장 이후의 십자가를 향한 수난 과정을 이어가도 아무 문제 없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굳이 오늘 본문을 21장 종말 강화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의도적입니다. 무슨 의도일까를 생각하면서 다시 37절과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유숙하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짧은 두 절 안에 성전이 두 번 언급됩니다. 성전을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21장의 종말 강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주제가 성전입니다. 종말 강화의 시작이 성전입니다. 제자들이 화려한 헤롯 성전의 외형과 규모와 아름다움에 감탄했을 때, 주님은 이것들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말씀하심으로 종말 강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는 성전으로 시작한 종말 강화의 마지막도 성전으로 끝맺으려 합니다. 무너질 성전으로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은요? 무너질 그 성전 안에서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각합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38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성전은 무너질 성전입니다. 무너질 건물 성전에서 무너지지 않을 분, 성전의 주인이자 참 성전인 주님이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무너질 옛 건물 성전에서 무너지지 않을 새 성전의 모습을 그리면서 종말 강화의 끝을 맺는 누가의 의도가 보이십니까?
동시에 이 부분은 22장부터 이어질 수난 기사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도 합니다. 주님이 지금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왜 거기 있습니까? 아버지의 때가 되어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에 들어가사 가르치신 일입니다. 19:45-47을 보십시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는 성전을 보시고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 가운데 마지막 가르침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과 역사의 종말을 예고하신 종말 강화입니다.
누가가 종말 강화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끝내고 있습니까?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사역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심”이라는 한 틀로 묶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전이 그 기능과 역할을 잃어버리고 있는데도 건물의 화려함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이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성전을 성전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은 건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 가르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백성이 성전의 핵심입니다. 건물은 무너집니다. 돌은 흩어집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백성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33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바로 그 진리가 오늘 본문에서 펼쳐집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질 성전 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건물 성전은 무너지고 돌도 없어지지만, 그 안에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전을 찾는 백성들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성전입니다.
사실 성전 모티브는 예루살렘 사역과 종말 강화의 핵심 주제만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전체를 이끄는 모티브 중에 가장 핵심 주제가 성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성전은 단순히 자주 등장하는 주제 정도가 아니라, 전체를 열고 닫는 틀로 제시됩니다. 누가복음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요한의 아버지 제사장 사가랴가 주의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 아내 엘리사벳이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는 장면으로 누가복음이 시작됩니다(1:5-23). 마지막은 어떻게 끝납니까? 24:52-53입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제자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누가복음은 성전으로 시작해서 성전으로 끝이 납니다.
처음과 끝만 아닙니다. 누가복음 곳곳에서 성전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2:22-39에는 성전을 배경으로 두 경건한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 정결 예식을 위해 예루살렘에 온 마리아를 성전에서 만나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던 여 선지자 안나가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언합니다. 2:41-50에서는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서 교사들과 문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찾다가 성전에서 발견한 요셉과 마리아를 보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 이 부분은 누가복음 성전 모티브의 핵심입니다.
4:9-12에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성전 꼭대기에서 마귀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증명하라”라는 시험을 당하십니다. 이 시험은 나중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을 먼저 구원하여 증명해 보라”는 시험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13:34-35에는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탄식이 나오고, 18:9-14에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대조가 나옵니다. 그리고 19:28-21:38까지의 예루살렘 사역과 종말 강화도 성전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22-23장의 십자가 수난도 성전 모티브가 이끌어갑니다. 마지막은 제자들이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성전에서 응답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만민의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인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클로즈업합니다. 주님은 성전을 그렇게 만든 종교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대립합니다. 그들의 외식과 부패를 책망하셨고 타락한 성전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곳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어 그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새로운 성전으로 만들어가십니다.
성전은 본래 가르치는 장소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기도하는 집인 제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사하는 곳에서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 영 단번에 드리는 당신의 십자가 제사로 성전 제사를 완성하시면 성전의 제사 용도가 폐기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전은 제사드리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집이 될 것입니다. 이제 주를 믿는 주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성전이 되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며 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이상 건물 성전에서 짐승을 잡아 제사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과 성령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걸어 다니는 성전이 됩니다.
누가는 그 그림을 예수님이 무너질 성전에서 가르치는 모습과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성전으로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이 복음서를 읽고 있는 우리가 그런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이른 아침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모여들고 있는데 여기 백성은 단순한 군중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들이 이른 아침부터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동트기 전에, 날이 밝기도 전에, 부지런히 일어나 나아갔습니다. 마지못해 오지 않았습니다. 의무감으로 온 것도 아닙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을 성전으로 이끈 것은 성전의 건물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이었습니다. 참 성전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사모하여 새벽부터 모여든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짧은 이 본문을 통해 건물 성전이 아닌 새로운 성전 공동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백성, 신약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지금 십자가로 가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입니다. 건물 성전은 곧 무너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이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백성이 되라고 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라고 도전합니다. 어떻게 그런 백성, 그런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에서 성전과 더불어 강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주제가 기도와 성령입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주의 백성 만들 수 있고 새로운 성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누가는 종말 강화의 마지막 부분을 성전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모습만 아니라 기도하는 주님의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신 주님이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감람산으로 갔습니까? 22장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셨다고 했는데 원어는 유숙했다는 뜻입니다.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셨다고 하는데 지금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감람산에 가는 습관이 생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헬라어 '에도스'는 며칠 된 행동이 아니라 몸에 밴 오랜 관행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무슨 습관입니까?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곳마다 한적한 곳과 산으로 물러가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6절은 예수님이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음을 알려줍니다. 6장 12절에서는 산에 올라 밤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9장 28절에서도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는 갈릴리의 산으로 가셨고, 그 오랜 기도의 습관을 따라, 예루살렘에서는 감람산으로 가신 주님입니다. 장소는 바뀌어도 기도의 습관은 한결같았습니다.
22장 40-41을 보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하신 뒤 당신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피땀 어린 기도는 그날 갑자기 나타난 모습이 아닙니다. 평소의 습관을 좇아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그렇게 늘 기도의 삶을 사셨습니다. 습관을 좇아 밤에는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이 제시하는 그림을 다시 보십시오. 건물 성전은 주후 70년에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대제사장, 참 성전이신 그분은 무너지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말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따르는 새 성전인 주의 백성들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무너질 것에 매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말씀 안에 거할 수 있습니까? 누가는 그 원리를 성령 충만함과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가르쳐줍니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성전과 성령을 강조합니다. 성전에서 응답받고 성전에서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했습니다. 엘리사벳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던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평생을 과부로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던 여 선지자 안나도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일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 기도하신 주님은 어떠하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4:1), “성령에 이끌리시어”(4:1),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들어가시니”(4:14),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4:18), 성전의 주인이신 주님의 모든 사역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성령으로 충만하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주님을 모신 새로운 성전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바른 종말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까? 11장 13절을 찾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에서 기도의 가장 큰 응답은 성령입니다.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은 성령을 구하며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명령도 성령 충만과 기도입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24:49). 성전에서 늘 찬송하던 제자들이 무엇을 기다렸습니까? 성령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장에서 그 성령이 불의 혀처럼 임하실 때 손으로 지은 건물 성전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들의 믿음의 공동체가 새로운 성전으로 세워졌습니다. 건물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시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모하면서 구해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우리의 결심으로 깨어 있지 못하기에 성령의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무너질 것에 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바른 종말 신앙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할 때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전의 삶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