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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눅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작성자한우리|작성시간25.03.23|조회수3,852 목록 댓글 0

10:38-42, 마르다와 마리아, 25.3.23, 박홍섭 목사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여정이 사마리아를 지나 베다니의 마르다의 집에 이르럽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일행을 섬기는 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 마리아는 언니의 분주함과 상관없이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이런 동생이 거슬렸습니다. 마르다의 거슬림은 마리아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녀는 지금 주님이 놀고 있는 마리아를 용납하고 있다며 항의합니다. 왜 당신을 섬기기 위해 분주한 나의 처지는 돌보지 않고 마리아와 말씀만 하고 계시냐고 따집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있어야 할 곳은 예수님의 발치가 아니라 주방이며 예수님도 당연히 그렇게 말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내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가서 언니를 돕거라.”라고 말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예상을 깨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마르다의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진정하라는 의도였을까요? 아니면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라는 뜻일까요? 여하튼 주님은 마르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필요한 한가지만 해도 괜찮으며 마리아는 좋은 것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르다를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르다가 책망하는 마리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십니다. 마리아의 변호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앞에 나오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논쟁했던 율법 교사와의 대화 뒤에 이어지는 문맥입니다. 누가는 그 사건과 이 사건을 이어서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율법 교사와 이 사건을 대조합니다. 율법 교사는 말씀을 듣다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논쟁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대조적이죠.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은 제자들의 통상적인 모습입니다. 그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나오지는 않지만, 그녀는 어린아이같이 그 말씀이 옳다고 예수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는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고 있지만, 마리아는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그 말씀에 푹 빠져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심지어 언니를 도우던 평소와 달리 언니가 많은 일 때문에 마음이 분주하고 손이 바쁨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 앞에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반면에 마르다는 말씀을 들을 틈도 없이 바쁘고 분주합니다. 왜 그렇게 분주합니까? 예수님을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일은 귀합니다. 마르다 같은 사람이 있어야 밥을 먹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식탁의 봉사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그로 인해 걱정이 많아지고 마음이 분주해지고 짜증과 불평과 원망으로 이어지면 문제가 있습니다. 좋은 편을 선택한 결과가 아닙니다. 마음이 분주해져도 불평과 원망으로 가지 않고 넉넉히 감당하면서 말씀에 집중하고 있는 마리아가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이면 많은 것을 하면서도 좋은 편을 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귀한 일을 하다가 불평과 원망으로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르다를 부릅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그리고 긍휼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제자에게 우선되어야 하는 일, 한 가지” “좋은 편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3세기 밀라노의 주교이자 어거스틴의 스승이었던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아무도 우리한테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을 얻도록 노력합시다. 성실히 귀 기울여 듣는 일을 우리 몫으로 삼읍시다시중드는 일로 바빠서 거룩한 말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다.” 주님은 부엌에서 일하는 마르다는 잘못되었고, 자신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무조건 잘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선택했다고 하십니다.

 

본문은 왜 주님의 발 앞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다의 섬김보다 더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다른 어떤 일보다 부엌 봉사가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마리아는 그것을 분별했고 마르다는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마르다의 섬김이 잘못된 행동은 아니지만, 마리아의 행동이 더 적합하고 좋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를 지키고 있습니다. 변호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내 양으로 내 앞에서 가장 좋은 일을 하고 있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좋아하여 나를 떠나지 않고 있다. 내 말을 좋아하여 그 말에 빠지고 있다. 가장 좋은 편을 택하여 나와 함께 있는 마리아의 이 순간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고 빼앗지 못한다. 나도 그녀를 빼앗기지 않는다

 

마르다는 왜 그 좋은 편을 택하지 못했을까요? 분주함 때문입니다. 여기 분주하다는 말은 끌려다닌다는 뜻입니다. 모든 분주함이 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분주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잘 지키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 마르다는 많은 일에 끌려다니다가 가장 좋은 일을 놓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일을 놓치고 있으니 많은 일을 하다가 짜증을 냅니다. 자기가 아니면 이 일을 다른 사람은 못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이 꼭 자기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과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생깁니다. 그 불평과 원망이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주님에게로 이어집니다.

 

지금 마르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짜증입니다 분노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필요를 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뭐가 필요한지 자기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하다가 많은 것을 준비하려 했고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보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신이 사실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면 짜증이 납니다. 자기 열심, 자기 생각으로 일하면 짜증과 분노와 용심으로 연결될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섬김과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은혜로 나오는 것 중에 무엇을 더 원할까요?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으면서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틈만 나면 어떻게 제자의 길을 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의지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마르다가 준비하려고 하는 많은 음식이 아닙니다. 자기 앞에서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더 주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앞서 자신을 시험했던 율법 교사와의 논쟁을 통해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의 본질을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도 만난 자 같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그 비참한 영혼 속에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그리스도의 은총을 경험하는 일이 우선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는 하나님 사랑에 관한 교훈입니다. 마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마리아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 사랑을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노예로 부름을 받지 않고 주님의 신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자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 전에 먼저 주님의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신부라면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랑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지금은 신랑이 마리아와 말씀으로 교제하는 것을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도 그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거기에 불평과 원망과 용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자신도 마리아를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 대열에 합류하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사랑의 첫걸음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일곱 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제가 너무나 중요한 사역인데 이 일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 유대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시끌시끌했습니다. 그 일 때문에 교회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일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말씀에 심령이 깨어지고 그 말씀으로 두들김을 받아 자신이 부서지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본질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면서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어떻습니까? 주님은 교회가 여러 가지 일로 이렇게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할 때 너희들 잘한다고 칭찬하실까요? “그래 너희들 고생한다. 잘하고 있다고평가하실까요? 주님에게는 필요한 일을 열심히 잘하는 일꾼도 중요하지만, 주님과 연합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당신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신부를 더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자리에 있는 마리아를 변호하십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편들고 지키십니다.

 

교회와 성도는 업적으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이룬 업적과 성공이 하나님께 도움이 되거나 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어떤 우리입니까? 짜증부리는 우리가 아닙니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냐고 불평하는 우리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원하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노예를 찾으러 오시지 않고 신부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모든 일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경중과 우선순위와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찾는 것은 우리입니다. 주님이 찾으실 때 그 발 앞에 있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습니다. 마르다는 그 순간에 주님의 발 앞에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한다고 주님을 섬긴다고 바쁘고 분주했는데 주님 마음을 몰랐습니다.

 

이런 예가 가능할까요? 사랑하는 연인이 나를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나와 상의를 안 하고 혼자 분주합니다. 나는 같이 있고 싶은데 같이 있지는 않고 오늘은 대전에 가서 성심당 빵 사 오고 내일은 서울에 가서 무엇도 사 옵니다. 그 연인이 좋아할까요? 제가 심방을 갔습니다. 사실이 아니고 가정입니다. 집주인이 저를 대접한다고 부엌에서 분주합니다. 그 마음이 너무 귀하고 고맙습니다. 그런데 너무 분주해서 잠시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시간에 마음을 쏟지 못합니다. 들락날락하다가 급기야 말씀도 끊기고 기도도 끊겼습니다. 나중에 식사를 정말 푸짐한 반찬 가운데 대접받았다고 해도 저의 마음이 마냥 좋기만 하겠습니까? 연로한 부모님이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자식들을 불렀습니다. 어떤 자녀가 말씀은 되었고요 같이 맛있는 음식이나 먹읍시다라고 하면 부모가 기뻐할까요? 누가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녀일까요?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마음에 새기는 자녀입니다.

 

교회는 마르다도 필요하고 마리아도 필요합니다. 주님에게 두 사람 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 더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분별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귀한 일을 하면서 마음이 상하고 짜증과 사람과 예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생긴다면 안 좋은 것을 택한 결과입니다. 마리아는 한 가지만 선택했지만, 그 한 가지가 좋은 것이었고 마르다는 많은 것을 선택했지만 그 많은 것 중에 주님이 원하시는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 많은 선택이지만 정작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몰랐습니다. 그 결과는 자신이 선택한 많은 것이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미움과 원망과 용심이 생겼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 옵션이 너무 많을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일을 한다고 해서 주님을 더 기쁘게 하거나 나의 미래가 더 안전해지고 내 심령이 더 평안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될 가능성도 매우 많습니다. 꼭 있어야 할 그 한 가지를 발견하고 그 한 가지를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12:1-8을 찾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마르다는 이때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뭐하고 있습니까? 향유를 깨트려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주님은 향유를 구제에 쓰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냐는 가룟 유다의 항의에 마리아를 지키십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항상 있지 않다며 마리아가 구제보다 나의 장례를 준비하는 너무나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마리아를 변호해주십니다. 주님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께 나와 영생을 말씀을 듣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얌체가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께 집중하고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일에 내 삶을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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