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지구인구를 지금까지는 낮게 잡아온 이유는 지구라는 자원의 활용방법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는 미활용의 자원(물질과 에너지 및 공간)이 매우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막과 바다(해상 및 해저) 하늘 및 우주공간과 천체들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고 활용할 수 있는 자원입니다.
공해를 만들지 않는 친환경적인 자연활용법을 사용한다면 5000억명이 살아도 인구1인당 배당되는 지표면적은 1000m²이상이 되며, 모든 사람들은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습니다.
자원의 활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공기엔진만 활용하여도 충분합니다.
공기 1kg이 가진 분자운동에너지는 약 125 kJ
(주)삼진ENG 발명실장 주남식 올림
011-626-5660
jns007@freechal.com
http://www.freechal.com/airengine
현재 세계 인구(U.S. Census Bureau reports)
http://www.stat.go.kr/statcms/main.jsp
http://news.empas.com/show.tsp/20040806n05708/?s=1099&e=1276
| [과학세상]권재술/아보가드로數의 신비
[동아일보]
내가 방금 들이마신 공기 분자 중에 2000년 전 예수의 허파 속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가 있다면…. 예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석가모니로 바꾸어도 좋고, 마호메트로 해도 좋겠다.
한 사람이 한번 들이마실 수 있는 공기의 최대량을 폐활량이라고 한다. 폐활량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4L 정도다. 보통 숨쉴 때는 이보다 작은 양을 마시기 때문에 그 반으로 잡아서 약 2L로 하자. 공기 2L 속에 들어 있는 분자의 수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아보가드로수를 사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아보가드로수는 상온 1기압인 기체 약 22.4L에 들어 있는 분자의 수를 의미한다. 대략 6×10²³개다. 이 수는 분자의 종류에 관계없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보가드로의 원리다. 사람의 한번 숨에 해당하는 2L의 공기에 들어 있는 분자 수는 약 5×10²²개가 된다. 이 숫자만큼 돈을 쌓으면 지구에서 태양까지 수천만번 왕복할 수 있는, 엄청나게 큰 수다.
공기 분자들은 매우 활발하게 운동한다. 예수가 들이쉬었던 공기는 지금쯤 이 대기에 골고루 퍼졌을 것이다. 그것도 매우 균일하게 섞여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5×10²²개라는 엄청난 수의 공기 분자가 퍼졌으니, 지금 내 코앞에도 예수가 숨쉬었던 바로 그 공기 분자가 있지 않을까.
지표면 1cm²를 누르는 대기의 무게는 약 1kg이다. 지구의 표면적은 약 5×10¹8cm²이니, 공기 전체의 무게는 약 5×10¹8kg인 셈이다. 예수가 한번 들이마셨던 공기 2L의 분자 5×10²²개가 골고루 퍼졌다면, 지금 대기 1kg에는 그 공기 분자가 약 1만개, 1g에는 약 10개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즉, 대기 1L마다 그 공기 분자 10개, 우리가 한번 들이켜는 2L의 공기에는 20개가 들어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수는 1분에 최소 15회 이상 숨을 쉬었을 것이고 적어도 30년 이상 계속했으니, 결국 우리는 한번 숨쉴 때마다 예수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 약 5×109개를 들이쉰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이 계산은 항상 다른 공기분자를 들이쉰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좀 적은 수일 것이다. 또 그 공기 분자 중의 일부는 식물이나 바닷물 속에 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대략 100분의 1로만 잡아도 107개나 된다. 1000만개다.
석가모니는 예수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다. 세종대왕이나 공자의 속에 들어갔던 공기도 마찬가지다. 한번의 내 숨에는 지구상에 있었던 모든 사람의 폐 속에 들어갔던 그 모든 분자가 섞여 있는 셈이다.
또 저 아프리카의 시골 한 동네 어린아이가 길거리에 눈 오줌 속에 있던 물분자가 며칠 후 내가 마시는 물 컵 속에 들어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서로 연결돼 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인간뿐 아니라 동물, 자연과도 대립하면서 산다. 서로 반목하고, 전쟁을 하고, 자연을 파괴한다.
아보가드로의 법칙은 단지 자연법칙으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임을 가르쳐준다. 아보가드로수는 너와 나를 ‘우리’가 되게 하는 신비의 수다. 이 자연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를 묶어 놓고 있는 것이다.
권재술 한국교원대 교수·물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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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4-08-06 18:46:00 |
| "가장 적정한 지구 인구는 얼마일까?" - 장회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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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호: 158 |
글쓴이: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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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0 |
날짜: 2004/12/10 1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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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정한 지구 인구는 몇명일까?
장 회 익 / 서울대 교수․물리학
사람은 귀하다고 한다
세상에서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반드시 우리 자신이 사람이어서 스스로를 귀하게 생각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양이도 귀하고 소나무도 귀하다. 이 땅에 태어난 생명치고 귀하고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이들을 사람과 견주어 보면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 칭하기도 했다. 이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정신 세계라고 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열어 간다는 것,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에게서 생각하는 능력을 빼 버린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렇게 된 사람을 ‘식물 인간’이라 한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우리 가족 가운데 누가 식물 인간이 되어 영영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양이도 의식은 가지고 있다. 어쩌면 우리처럼 생각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정말 고양이가 사람에게 다가와서 재롱을 부릴 때에는 이것이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방법이 없다. 그렇기는 하나 역시 고양이는 사람처럼 넓은 정신 세계를 열어 나가지는 못한다. 고양이와 함께 삶의 의미를 놓고 토론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비단 고양이가 말을 못해서만이 아니다. 그의 두뇌 기능이 이러한 세계를 상상하는 것까지 허용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은 물론 소나무도 마찬가지이다. 방법이 다르기는 하나 소나무도 숨을 쉰다. 영양소를 흡수도 하고 불필요한 것을 내보내기도 한다. 또 사람과는 달리 직접 햇볕을 받아 영양소로 바꾸어 내기도 한다. 정말 놀라운 존재이다. 그러나 역시 생각은 못한다. 동화 속에 나오는 소나무는 생각도 하고 말도 하겠지만, 이것은 사람의 상상의 세계이고, 현실의 소나무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따라서 사람과 같은 정신 세계를 열어 나가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특별하며, 또 그래서 귀하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 없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 없어지는 것이고 정신 세계가 하나 없어진다는 것이다. 가족의 한 사람 또는 특별히 가까웠던 그 누구가 없어질 때에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도저히 이러한 없어짐을 그대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 설혹 몸은 죽어도 영혼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있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정말 그렇게 믿는 것 외에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은 소중한 것이다.
참 이상한 논리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중함의 정도를 숫자의 세계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 한 명이 있는 것보다 열 명이 있으면 열 배로 더 소중한 것인가? 그럴 것 같기도 하거니와 그렇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무슨 일을 잘못하여 한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보다는 열 사람에게 불편을 주는 것이 그만큼 더 나쁘다. 물건을 나누어 가질 때에도 열 사람은 당연히 열 배의 몫을 차지해야 하며,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한 사람이 사는 것보다 열 사람이 살면 열 배로 더 가치로운가? 물론 지구상에 한 사람만이 살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을 바꾸어 열 사람이 사는 것보다 백 사람이 사는 것이 열 배로 더 가치로운가 하고 물어 보자. “아마 그렇지 않겠는가?” 정도의 대답이 나올 듯하다. 그렇다면 지구상에 1억 명의 사람이 사는 것보다 10억 명의 사람이 사는 것이 역시 열 배로 더 가치로운 일인가? 아마 여기에 이르러서는 “글쎄, 그렇지 않을 것도 같은데” 정도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떠한 논리가 적용되는 것일까? 하나하나는 소중하지만 그 소중한 정도는 그대로 가산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단지 사람이 많아져 희소 가치가 줄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이 많아졌다고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전체 가치는 숫자가 늘어나는 데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지구의 인구가 60억을 넘어섰다는 보도가 있었다. 1백 년 전 16억에서 무려 4배가 증가한 것인데, 이것을 보고 자축하는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다. 오히려 우려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렇게도 소중한 사람들이 한 세기 동안에 44억이나 증가했는데, 이것이 자축할만한 일이 아니라니? 참 이상한 논리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원시 생태계의 부양 능력
이 논리를 이해하려면 생태계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사람이기 이전에 생태계의 한 성원이다. 생태계가 구성되지 않고는 인간 또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잉의 인구는 생태계를 파손시킨다. 지구상의 인류는 이미 생태계를 엄청나게 파손시켜 왔다. 물론 생태계를 파손시키는 것은 단순히 인구 그 자체만은 아니다. 같은 인구라도 생활 방식에 따라 그 파손의 정도는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생존 방식을 채용한다 하더라도 무제한의 인구를 부양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생태계의 논리를 이해해야 한다. 우선 한 가지 사실부터 확인하자.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가장 원시적인 석기 이외에 아무런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지 않는 상태로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며 생존해 가던 시기에 이 원시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었던 적정한 사람 수는 얼마였던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시기는 지금부터 대략 4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에 이르던 기간인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지구상에 퍼져 살아 가던 사람의 총 수는 약 4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에도 이미 남북 아메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에 퍼져 살아 가고 있었으나, 그 총 인구는 현재 부산 지역 한 곳에 몰려 살고 있는 인구 정도에 해당한다. 우리가 만일 이 숫자를 인간의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건강한 생태계가 수용할 수 있었던 적정의 인구였다고 본다면, 현재의 인구는 이 적정 인구의 1천5백 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원시 생태계로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숫자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인공 생태계와 인구의 증가
인간은 문명을 이루어내면서 그 생태계 또한 인위적으로 조절해 왔다. 상대적으로 발달된 수렵과 채취의 방식이 이미 생태계의 균형을 일정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으며, 여기에 다시 경작과 목축이 이루어지면서 본격적인 인위적 생태계로 전환하게 된다. 이렇게 전환된 생태계가 여타의 동․식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을 것이 분명하며, 또 적지 않은 생물종들이 이 과정에서 멸종의 비극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적어도 인간에게는 이것이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바탕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인류의 문명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자 실제 생태계가 부양해 낸 사람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대략 4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줄곧 4백만 정도를 유지해 오던 인구가 지금부터 4천 년 전 이른바 고대 문명의 발흥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7배에 가까운 2천7백만에 이르게 된다. 다시 2천 년이 더 지나 지금부터 2천 년 전, 그러니까 기원 원년 경에는 인류의 인구가 1억을 돌파하였고, 1천 년이 더 지나 기원 1000년에 이르러서는 3억5천만이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산업 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인 1825년 경에 이르러서는 10억을 돌파하게 된다. 이것이 1900년에는 16억이 되었고, 20세기가 끝나가는 바로 이 시점에 60억을 넘어선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우리 지구 생태계는 인위적 변형을 받으면서 인구를 부양할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지구 생태계의 건강과 안정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까지 이러한 인위적 생태계가 원시 지구 생태계에 비해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를 판별해 낼 그 어떤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태계가 인간 문명 이전의 원시 생태계에 비해 크게 취약한 것임을 말해 줄 증좌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현대 생태계는 인간의 손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전 세계의 농부가 일 년만 일손을 놓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겠는가? 대부분의 사육 동․식물이 사멸하거나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이러한 인위적 관리가 야생 생물종들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멸종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산업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50만 종 이상의 생물종이 멸종했으며, 현재 생물종들이 멸종되어 가는 속도는 자연 생태계 내에서의 멸종 속도의 1천 배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당장 멸종 위기에 놓인 생물종만도 식물의 14%, 조류와 포유류의 11%, 어류의 1/3에 이르고 있으며, 여기에 멸종이 우려되는 생물종까지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불어난다. 여기에 대기․해양․수질 및 토질에 있어서 엄청난 공해가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 인간 생존을 위한 필수 생태 자원이라고 할만한 담수․산림․수산 자원․목초지 등의 훼손과 감축 또한 급격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결국 이렇게 보자면 인간은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을 통해 우리 생태계에 치명적인 부담을 안겨 주면서 인구를 증가시켜 온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앞으로도 이러한 추세대로 진행되어 나간다면 불과 몇 년이 더 지나지 않아 우리 생태계에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이 초래될 것임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온생명’과 인구의 관계
놀랍게도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고서도 전인류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아무런 대책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기껏 내세울만한 것이라고는 몇 년 전 리우 환경회의에서 채택한 이른바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ESSD)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이다. 여기서 ‘지속’이라는 것이 몇 년을 기준으로 지속을 말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1백 년 지속할 것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보는지, 혹은 1천 년 지속되는 것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보는지, 혹은 1백만 년 지속되는 것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보는지에 대한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구 생명은 35억 년을 지속해 왔고, 현생 인류도 몇 백만 년은 지속해 왔으며, 앞으로 우리 태양은 적어도 50억 년을 더 지속할 것이니, 우리는 적어도 몇 십억 년의 지속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인류만 생각하더라도 몇 백만 년은 헤아려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른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말하는 사람들도 아마 1천 년 간의 지속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1천 년 이후 우리 생태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환경 영향을 평가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런데 우리가 만일 지구상의 생명 출현 이후 지금까지 쭉 연계되어 생존해 나가고 있는 이 전체 생명을 필자의 표현대로 ‘온생명’이라 부르기로 한다면, 이 1천 년이라고 하는 것은 온생명의 생애에서 불과 10분에 해당하는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온생명은 이미 35억 년을 생존해 왔고, 앞으로 우리 태양계 안에서만도 50억 년을 더 생존할 수가 있는 존재이니, 온생명의 1억 년이 사람의 1년에 해당하고 온생명의 1천 년이 사람의 10분에 해당하는 것이라 보면 사람의 한 생애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만일 온생명의 건강한 생존을 1천 년, 즉 10분 이상 장담할 수 없다고 하면 이는 말기암 환자의 경우보다도 더 암담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이 지구상에 몇 명의 사람이 사는 것이 적절하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가 결정되지 않으면 아무리 개발을 해도 부족하며, 아무리 절약을 해도 남는 것이 없다. 모든 노력이 증가되는 인구의 몫으로 돌아가고, 남는 것이라고는 파손된 생태계일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에 도대체 몇 사람이 살아야 하는가?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몇 명의 사람이 사는 것이 우리 온생명으로 하여금 앞으로 50억 년간 건강하게 그리고 그 놀라운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생존해 나가게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보아 왔듯이 사람이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더욱 소중한 것은 사람이 온생명 안에서 온생명의 의식과 정신을 이루며 살아 가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한때 몇 십억 몇 백억이 되었다가 몇 세대만에 생태계를 완전히 소진시키고 없어지는 것보다, 온생명의 현명한 두뇌가 되기에 충분한 숫자로서 온생명의 자연스런 수명이 다할 때까지 생존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낱생명으로서의 인간으로 보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더 보람되게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적정한 인구는 과연 몇 명일까?
그렇다면 얼마의 수치가 가장 적절한가? 필자로서도 똑 떨어지는 수치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는 후에 생각이 좀더 깊어짐에 따라 보다 나은 해답으로 바꾼다는 전제 아래, 현재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말해 본다면 대략 1억에서 10억 사이 그 어느 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만일 온생명의 신체적 건강만을 생각한다면 4백만이라는 수치를 제시할 수도 있겠으나, 온생명은 단지 신체적 건강만이 아닌 정신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정신 문화를 가능하게 할 여건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아갈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의 인구는 수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구 10억을 넘어서면 이미 생태계에 과부담이 가해질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지구 생태계에 대량의 멸종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한계를 넘어서면서부터였다는 것이 이를 말해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대체로 이 한계를 넘어서면 온생명으로서는 신체에 비해 머리가 너무 무거워지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들은 일단 필자의 느낌 속에 떠오르는 추정치일 뿐 그 자체로 어떤 절대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이 범위 안에 속하는 인구를 가진다면 자신들이 지닌 최선의 지혜를 짜냄으로써 생태계의 건강을 유지시키면서도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판단이 옳은 것이라 한다면, 현재의 60억을 어떻게 10억 이하로 낮추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방향이 정해지고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이것 또한 인류의 집합적 지혜를 통해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 보고 싶다.
장회익: 1938년생.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물리학 박사. 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과학사 과학철학 협동과정 겸임). 저서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현대 과학과 윤리』(공저), 『현대 과학의 제 문제』(공저), 『인간이란 무엇인가』(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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