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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스크랩] 전씨족보 서 [ 全氏族譜 序 ]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20.11.26|조회수215 목록 댓글 0

전씨족보 서

 

뿌리가 깊으면 가지가 무성하고 물은 근원이 깊고 멀어야 장류가 흐르는 것인데 만물의 이치도 그러하거니와 하물며 사람에 있어 어찌 다르리오.

 

모든 사람의 선대에 적덕이 두터우면 자손에게 넉넉한 경사가 아주 멀리 파급되는 것과 같이 우리 전씨 선조께서 누대에 걸쳐 백제와 고려조에 높은 관직에 올라 당세에 명성을 떨쳤기에 그 후 자손이 일국에 널리 번지어 펴졌으며, 공후(公侯)와 경상(卿相)의 위계에 오른 분이 어찌 한 두 분이였겠는가?

 

이제 조선조가 들어서서는 전사(음직을 받음)를 하신 분이 역시 많으니 족보를 살펴보면 가히 선대 조상들의 적덕하신 은덕이 아니고 무엇이라?

 

다만 보책(譜冊)중에 기록한 세계(世系)와 이름자(名字)와 직질(職秩:관직과 품계)이 혹 선대로부터 전해들은 경우가 있어서 자못 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 자손(子孫)으로서 마땅히 자세하고 확실하게 개정하여 행하기 바랄 뿐이다.

 

명종9년 갑인(1554년) 7월 일

 

후손 가선대부 행 강원관찰사 팽령 삼가 序하노라

 

 

 

全氏族譜 序

 

根深而末茂 源深而流長 物固然矣 在人何異 凡人 積德於先世者厚則餘慶之及於遠者遠矣

吾全氏先祖仕於百濟高麗 登崇品名當世 其後子孫 蔓延於一國 位至公侯卿相者豈可一二數哉

今之立于朝而爲腆仕者亦多 觀此譜則可知先世積德之所致矣

但譜中所錄世系名字職秩 或出於傳聞 頗有錯誤 爲子孫者當詳覈而改正之

 

嘉靖甲寅(明宗九年) 七月 日

後孫 嘉善大夫 行 江原觀察使 彭齡 謹序

 

 

○ 腆 두터울 전

1 두텁다, 넉넉하다

2 차린 음식(飮食)이 많다

3 좋다

 

○ 覈 핵실할 핵, 보리 싸라기 흘

1. 핵실하다(覈實--: 사실을 조사하여 밝히다)

2. 엄하다(嚴--: 매우 철저하고 바르다)

3. 씨

a. 보리 싸라기(부스러진 쌀알) (흘)

 

○ 숭품 [ 崇品 ]

고려(高麗)와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열여덟 등급(等級)으로 가른 문무관(文武官)의 품계(品階)에서 위로부터 두 번째의 품계(品階). 종1품(從一品)

 

○ 공후 [ 公侯 ]

봉작(封爵)의 하나.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등의 다섯 등급의 작위 가운데 그 첫째 등급인 공작(公爵)과 둘째 등급인 후작(侯爵)을 말함. [참고어] 봉작(封爵).

[네이버 지식백과] 공후 [公侯]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경상 [ 卿相 ]

재상(宰相). 삼정승(三政丞)과 육판서(六判書)

 

○ 음직 [ 蔭職 ]

고려시대 공신(功臣)과 5품 이상의 고급관료 자제들에게 부조(父祖)의 문음(門蔭)으로 주어진 관직.

[네이버 지식백과] 음직 [蔭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찰사 [ 觀察使 ]

 

요약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외헌(外憲)·도선생(道先生)·영문선생(營門先生) 등으로도 불렀다. 고려의 안렴사(按廉使)·안찰사(按察使)의 후신으로 조선 초기에는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안렴사 등으로 불리다가 관찰사로 굳어진 것은 1466년(세조 12)이다.

 

관찰사의 임기는 조선 초기에 1년이었다가 후에 2년으로 되었으며, 고려말 4~6품의 관리가 임명되던 것을 조선시대에는 종2품으로 품계를 높였다. 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보는 관아를 감영(監營)·영문(營門)·순영(巡營)이라고 하며, 관원으로는 도사(都事)·판관(判官)·중군(中軍) 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고, 일반 민정은 지방민에서 선출된 향리(鄕吏)로 하여금 감영에 속한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지방관제

 

관찰사의 업무

관찰사의 주된 업무는 임금을 대신하는 지방 장관으로 도내의 군사와 행정을 지휘 통제하였다. 따라서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별도로 수군절도사와 병마절도사가 파견되어 있을 경우에도 관찰사의 우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다. 일부 국가의 안위와 관련되는 중요한 업무에 대해서는 중앙의 명령을 따라 시행하였지만, 관찰사가 관리하는 도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지방행정상 절대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도 내의 모든 수령(守令)을 지휘 · 감독하면서 수령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보고하는 권한이 주어졌으며, 도 내를 순찰하면서 관리들을 규찰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러한 관찰사 제도는 지방 통치의 근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앙집권제의 확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으로 전국을 23부로 구획할 때 각 부의 장관 이름이 되었으며, 내무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았다. 이후 1896년 전국을 다시 13도로 편제하면서 각 도의 장관이 되었다가 1910년 일제에 강점당하면서 폐지되었다.

 

분포

조선시대 지방별로 경기관찰사는 수원·광주(廣州)·서울에, 충청관찰사는 충주 또는 공주에, 경상관찰사는 경주(慶州)·상주(尙州)·성주(星州)·달성(達城:대구)·안동(安東)에, 전라관찰사는 전주(全州)에, 함경관찰사는 함흥(咸興)·영흥(永興)에, 평안관찰사는 평양에, 황해관찰사는 해주(海州)에, 강원관찰사는 원주(原州) 등지에 두었다.

 

참조항목

도관찰출척사, 안찰사

 

역참조항목

가의대부, 강유후, 강윤, 경상도선생안, 관찰사회의, 금영, 기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관찰사 [觀察使] (두산백과)

 

 

◎ 전팽령[ 全彭齡 ]

이칭별칭

자 숙로(叔老), 호 송정(松亭)

유형/인물

시대/조선

출생 - 사망

1480년(성종 11) ~ 1560년(명종 15)

성격/문신

성별/남

본관/옥천(沃川)

대표관직(경력)

부호군, 상주목사

정의

조선전기 상주목사, 통정, 부호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숙로(叔老), 호는 송정(松亭). 전오례(全五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효순(全孝順)이고, 아버지는 참판 전응경(全應卿)이며, 어머니는 좌사간 김사렴(金士廉)의 손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04년(연산군 1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24년(중종 19)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조와 공조의 좌랑과 정랑을 역임한 뒤, 이어서 사도시첨정(司䆃寺僉正)·성균관사성·통례원우통례·평안평사·단천군수, 삼척과 밀양의 부사를 역임하였다.

 

1550년(명종 5)에 상주목사로 나가 청렴한 치정을 하여 청백리의 별칭인 염근(廉謹)에 선발되어 통정(通政)에 특승되었다. 1559년에 가선(嘉善)에 승직, 부호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이암유고(頤庵遺稿)』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전팽령 [全彭齡]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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