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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증 이조 판서 전여림의 묘표 [ 贈吏曹判書全公墓表 ]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22.07.27|조회수68 목록 댓글 0

[번역문]

증(贈) 이조 판서 전공 여림(全公汝霖)의 묘표

 

공의 휘는 여림(汝霖)이고 자는 공택(公澤)이다. 성은 전씨(全氏)로 옥천군인(沃川郡人)이다. 그 선조는 고려조 때부터 크게 드러나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받았는데, 학준(學浚)이라는 분이 있어 영동 정(領同正)을 지냈고, 효격(孝格)이란 분이 있어 중윤(中允)을 지냈고, 대부(大富)란 분이 있어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고, 필(弼)이란 분이 있어 검교 사순위호군(檢校司巡衛護軍)을 지냈고, 유(侑)란 분이 있어 밀직부사(密直副使)와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냈고, 숙(淑)이란 분이 있어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판도공의 뒤로는 몇 대 동안 침체되어 있다가 공의 고조인 휘 효순(孝順) 때에 이르러서는 관직이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그쳤다. 증조는 휘가 응경(應卿)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고는 휘가 팽조(彭祖)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었으며,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선고는 휘가 혼(焜)으로 선무랑(宣務郞)이었으며,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비(妣)는 곡성 염씨(曲城廉氏)로, 참봉 염정달(廉正達)의 따님인데,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 무술년(1538, 중종33) 6월 계묘일에 군(郡)의 기사포(耆士浦)에서 출생하였다. 나이가 겨우 열 살이 되었을 적에 어머니를 잃고 종모(從母)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이로 인해 학문할 시기를 놓쳤으며, 유학(儒學)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드러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천부적인 자질이 질박하고 독실하여 경솔하게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늙어서는 성품이 더욱더 관대하고 너그러워서 꾸짖거나 욕하는 말을 일찍이 종들에게조차 한 적이 없었다. 큰아들인 부윤군(府尹君)이 만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는데도 기뻐하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혼조(昏朝) 때에는 문을 닫아걸고 지내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또한 자신을 봉양하는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는 대개 가난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있는 그대로 지내는 것이 천성에서 나온 것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나이 54세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몸이 쇠해짐이 이미 심하여 애통해하면서 몸을 손상시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도 오히려 상제(喪制)를 지켜 슬픔을 다하면서 상을 마쳤다. 상을 마친 뒤에는 문을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는데, 비록 향음례(鄕飮禮)나 사회(社會)와 같은 데에도 가지 않았다. 만력 경신년(1620, 광해군12) 1월 9일에 병으로 인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이 83세였다. 그 뒤에 부윤군이 귀하게 됨으로 해서 여러 차례 추증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이르렀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된 월성 이씨(月城李氏)로, 신라 시조(始祖)의 좌명 대신(佐命大臣)인 아찬(阿飡) 알평(謁平)의 후손이며, 참봉을 지낸 이신(李信)의 따님이다. 기해년(1539, 중종34) 12월 갑진일에 태어나 장성해서 공에게 시집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고질병이 있어 56년간을 신음 속에서 지내다가 공보다 한 달 먼저 죽었으니, 바로 기미년(1619, 광해군11) 12월 27일이었으며, 향년은 81세였다. 그다음 해 3월 병오일에 상주(尙州)의 치소(治所) 동쪽에 있는 단밀현(丹密縣) 물흥산(物興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공과 합장(合葬)하였다.

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 식(湜)은 바로 부윤군으로 계묘년(1603, 선조36)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다. 차남 굉(浤)은 통사랑(通仕郞)으로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삼남은 준(濬)으로 금화사 별좌(禁火司別坐)로 있다. 딸 둘이 있는데, 큰딸은 유학(幼學) 이종윤(李宗胤)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훈도(訓導) 양응서(梁應緖)에게 시집갔다. 부윤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극항(克恒)은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이고, 극념(克恬)은 유학(儒學)을 공부하고 있으며, 딸은 유학(幼學) 황덕유(黃德柔)에게 시집갔다. 또 서얼 자식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침(克忱), 극항(克㤚), 극징(克憕), 극층(克𢜻)이고, 큰딸은 강유(康鍒)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통사랑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회(克恢)이고 딸은 정의홍(鄭義弘), 홍상준(洪尙寯), 변사종(邊士宗)에게 시집갔다. 별좌는 1남을 두었는데 이름이 극홍(克弘)이다. 또 서얼 자식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녕(克寧), 극민(克敏), 극명(克明)이고, 딸은 이원인(李元仁)에게 시집갔다. 외손은 남자와 여자가 셋이고, 증손은 남자와 여자가 또 수십 명이다.

공은 만년에 상주의 북촌(北村)으로 이사해 살았다. 내가 향자제(鄕子弟)로서 일찍이 찾아가 뵌 적이 있었는데, 초가집에 사립 대문이었으며, 당(堂)과 실(室)이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공은 땅바닥에 자리를 펴라고 명하고는 함께 더불어 말을 나누었는데, 그 얼굴을 보니 환한 기색이 피어올라 참으로 이른바 걱정하지 않는 분이었다. 그런즉 입으로는 다섯 수레의 책을 줄줄 외면서도 안으로는 터득한 바가 없어 낮은 관직이라도 얻으면 기뻐 춤추고 가난하게 되면 불만스러워 낙담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그 도량의 차이가 또 어떠하겠는가. 아, 이런 분을 어찌 공경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

우복집(愚伏集)

우복집 제18권

묘표(墓表)

 

 

[원문]

증(贈) 이조 판서 전공 여림(全公汝霖)의 묘표

 

贈吏曹判書全公墓表

 

公諱汝霖。字公澤。姓全氏。沃川郡人也。其先自麗朝大顯。世襲冠冕。有曰學浚。領同正。曰孝格。中允。曰大富。刑部侍郞。曰弼。檢校司巡衛護軍。曰侑。密直副使民部典書。曰淑。版圖判書。版圖後數世寢微。至公高祖諱孝順。則官止石城縣監。曾祖諱應卿。早世。祖諱彭祖。成均生員。贈通禮院左通禮。考諱焜。宣務郞。 贈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參贊官。妣曲城廉氏。參奉正達女。 贈淑夫人。以嘉靖戊戌六月癸卯。生公於郡之耆士浦。甫十歲而失所恃。就鞠於從母。以此失學。儒而未顯。天資質實。不輕爲喜怒。旣老則性益寬緩。詬詈之言。未嘗及於僕隷。長子府尹君晩登大科。而不色喜。在昏朝閉蟄不仕。而亦不以爲養語及之。蓋其安貧任眞出於天性者如此。年五十四。遭父憂。衰憊已甚。不任致毀。而猶守制盡哀以終喪。旣則杜門不出入。雖鄕飮社會亦不往。萬曆庚申正月九日。疾終於寢。享年八十三。以府尹君貴。累 贈至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媲 贈貞夫人。月城李氏。新羅始祖佐命大臣阿飧謁平之後。參奉信之女。生於己亥十二月甲辰。長歸公。未久而有沈痼之疾。呻吟五十有六年。先公一月而歿。己未十二月二十七日也。享年八十一。明年三月丙午。合葬于尙州治東丹密縣物興山午向之原。子男三人。曰湜。卽府尹君。登癸卯文科。今慶州府尹。曰浤。通仕郞。累擧不中蚤卒。曰濬。禁火司別坐。女二人。長適幼學李宗胤。季適訓導梁應緖。府尹有二男一女。男克恒。藝文館奉敎。克恬業儒。女適幼學黃德柔。有孼男四孼女二。克忱,克㤚,克憕,克𢜻。康鍒。一女幼。通仕有一男三女。男克恢。女。鄭義弘,洪尙儁,邊士宗其壻地也。別坐有一男克弘。有孼男三孼女二。克寧,克敏,克明。李元仁。外孫男女三人。曾孫男女又數十人。公晩歲移居于尙之北村。經世以鄕于弟嘗往謁焉。草屋荊扉。堂室不具。命席于地而與之語。視其面則有敷腴色。眞所謂不戚戚者也。視世之口誦五車而內無所得。詡儛於一命。隕穫於貧賤者。其度量相去又如何耶。嗚呼。是豈不可敬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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