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각국사비 앞면 요약 –일연[견명]스님의 일대기
일연스님의 일대기를 뒷받침해 줄 자료로는 스님이 입적하고 세워진 보각국사비(普覺國師碑)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보각국사비의 앞면에 새겨진 문장을 통해 스님의 생애를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자.
성은 전(全)씨, 언필(彦弼)의 아들이다.[주2]
휘(諱: 법명(法名, 불교수행집단에서 정식으로 받은 불교식 이름)는 견명(見明)이고, 자(字: 나이 20세 정도가 넘어 어른이 되면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호칭)는 회연(晦然)이다. [어릴 적 이름은 알 수 없다.]
뒤에 이름을 일연(一然)을 역명(易名)하여[오늘날의 예명(藝名)이나 필명(筆名)처럼]쓰기도 했다.
스스로는 목암(睦庵)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지금의 경산(경상도 경주부의 장산군)출신이다.
1206년(고려 희종 2년)출생하였다.
1214년(9세) 지금의 경상도 밀양지역 해양(海陽)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다.[일반적으로 지금의 전라도 광주라고 하지만 밀양이 맞을 것이다.]
1219년(14세) 진전 장로(長老) 대웅스님으로부터 정식으로 승려가 되는 구족계를 받았다. [이를 두고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 장로를 은사로 하여 득도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지만, 진전은 법호이며 대웅은 법명이다.]
1227년(22세) 승려의 과거시험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상상과(上上科) 즉 최상 등급을 받았다. [대부분이 ‘장원급제’ 또는 ‘수석합격’이라고 풀이하지만, 아홉 등급 중의 최상 등급에 들었다는 말이다. (9등급: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
그 후 현재의 대구 달성- 청도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에 머무르며 마음 깊이 참선(參禪)수행에 몰두하였다.
1234(29세)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여파가 남쪽까지 이르자, 이를 피하고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외우면서 기도하였다.
1236년(31세) 기도 중 갑자기 벽에서 문수보살이 몸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무주의 북쪽에 있으라!”라고 계시하였다.
1237년(32세) 대구 달성 비슬산의 묘문암(妙門庵)에서
[주2] 현재의 대부분의 글과 안내판 등에서는 김(金)씨로 잘 못 된 채로 알려져 있다.
[출처] 삼국유사 초·중기본 복원판각사업
비교대조용 영인본 자료집
발행처: 군위문화원
자료제공: 전홍석 문경문화원장
[개인의견]
2017년 김병헌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김견명(金見明)”이 아니라 “전견명(全見明)”임을 논문을 통해 발표한 이후 위키백과, 나무위키 백과 사전에 일연스님의 속명이 전견명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번에 경상북도 군위군청과 군위문화원에서 발행한 책에 일연스님의 속명이 ‘전견명’으로 등재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