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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휴계전공유사서(休溪全公遺事序) [전희철]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16.06.25|조회수114 목록 댓글 0

 

휴계전공유사서(休溪全公遺事序)------ 허전(許傳, 1797~1886)(1)

 

내가 남몰래 괴이하게 여긴 바, 무릇 은주(殷周) 혁명 즈음에 특별히 뛰어나고 행동이 돋보였던 것은 오로지 백이(伯夷) 한 사람 뿐이었다.

성탕(成湯) 이래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6, 7명이나 있어 다른 사람을 감화시킴이 오래되었고 은혜가 두루 미침이 심원한데, 그 와중에는 응당 복절(伏節)하여 죽은 신하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은거한 선비가 있었을 터이다.

일의 앞뒤가 이러한데 서책에서 이외의 다른 사람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어찌 당연하겠는가, 어찌 그러하겠는가! 다만 누군가 은폐하여 말하지 않고, 일을 축소시켜 드러나지 않게 하고, 문헌이 남지 않게 하여 사리를 알기에 부족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태사 사마천이 말하기를 백이와 숙제(叔齊)가 비록 어질어도 공자의 기록을 얻어야 이름이 더욱 빛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우리 단종(莊陵)께서 왕위를 선양했을 때 사육신이 있었고, 또 생육신이 있었다. 그들의 행적이 명백하고 뚜렷하니 그 굳센 뜻에 빛남이 있어 천지를 가득 채우고 만세를 이어간다. 이에 그들의 제단에 참배하러 오는 이들의 수를 셀 수 없으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어찌 성대하지 않겠는가!

이때 휴계(休溪) 전 공(全公)도 그들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소백산 남쪽으로 이거하여 밭을 갈며 몸을 숨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침묵을 지킨 바, 결국 세상에 그의 흔적을 아는 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오로지 상공 송천(松泉) 최흥원(崔興源)이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 공의 행장을 찬할 때 단종(端廟)이 선위할 때 정지년(鄭知年) 공은 사직 전희철(全希哲) 공과 함께 경회루에 가서 육신과 울며 작별하여 이르기를 공들과 같이 자처(自處)하면 좋겠으나, 비생들은 그러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으니 그저 함께 피해 있으려 합니다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찬탄하여 말하기를 일민(逸民) 백이·숙제·이일(夷逸주장(朱張) 중 백이와 숙제만이 전기에 보이고 이일과 주장은 보이지 않는다. 육신은 그 이름이 드러났으나 (정지년·전희철) 두 공이 드러나지 않은 것은 바로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대군자의 일필이 후세에 징신(徵信)하기에 족하다.

이 글이 아니었다면 공의 뛰어나게 높은 절조와 고상한 행동은 장차 민멸(泯滅)되고 들은 자 없어 백세가 지난 후에는 희미하여 다시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로 인하여 참판 류태좌(柳台佐), 사간 박시원(朴時源), 상국 류후조(柳厚祚), 참판 이휘재(李彙載) 등 여러 사람이 말로써 후세에 남기고 단종(莊陵) 대의 의로운 신하들을 논할 때 아울러 셈��� 수 있게 되었다.

, 사육신·생육신과 행적은 달랐지만 마음은 같았다. 전공의 일은 비록 육신과는 달랐지만 그 의로움은 하나다.

공은 정통(正統, 1436~1449) 때 생원·진사 구중(俱中)이었고 무과에 올랐으나 관직은 사직을 넘지 않았다. 중종(恭僖王)대에 이르러 97세가 되어 통정부호군으로 승진했다.

내가 유람할 때 공의 후손 규병(奎炳), 함석(菡錫), 상렬(相烈)이 나를 따라와 휴계의 유적을 내게 보여주고 글을 써주기를 원하였다. 본래 나는 일이 다만 오래되고 먼 것이라 어찌 감히 망령되이 글을 쓰겠는가 하고 사양했지만 특별히 절의를 사모하고 우러르는 뜻에서 삼가 옛 사람의 남은 행적을 기록하니 알아줄 사람을 기다릴 따름이다.

 

 

休溪全公遺事序

 

余竊恠夫殷周革命之際特立獨行之士惟伯夷一人也自成湯以來六七賢聖作化之感人久澤之浹人深宜其有伏節死義之臣罔僕自靖之士前後相望而無復有一人見於載籍者豈其然哉豈其然哉其或諱而不言歟微而不顯歟抑文獻不足故歟是未可知也太史遷曰伯夷叔齊雖賢得夫子而名益彰此何以稱焉嗚乎我莊陵禪授之際有曰死六臣者又有曰生六臣者此其彰明較著烈烈有光竆天地亘萬世者也其次粤壇配享者不可勝數何其盛哉何其盛哉時則有若休溪全公棄官而歸故山轉入小白之南隱於耕稼默默以沒世世莫有知其迹者獨松泉崔相公興源(2)所撰老松亭鄭公知年(3)行狀有曰端廟遜位之時公與司直全公希哲同往慶會樓掩涕別六臣曰好事公等自處鄙生無足爲也因與俱遯其贊曰逸民伯夷叔齊夷逸朱張夷齊見於傳記逸張不見其意以爲六臣見而二公不見也大君子一筆足以徵信於後世也微��言公之卓節高行其將泯滅無聞百歲之下旣晦而復顯者豈非天耶用是柳參判台佐(4)朴司諫時源(5)柳相國厚祚(6)李參判彙載(7)諸公咸有立言幷數於莊陵義臣噫死六臣生六臣其迹殊其心同全公之事雖若與六臣殊其義則亦一也公正統中俱中生進登武科官不過司直至恭僖王世壽九十七陞通政副護軍公之後孫奎炳(8)菡錫相烈從余遊有年以休溪遺蹟示余願得弁卷之文余旣耋荒事且久遠何敢妄贅一辭特以景仰節義之意謹述前人之緖餘以俟知者

 

 

 

전희철[ 全希哲 ]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이다. 1425(세종 7) 옥천(沃川)에서 지인부록사(知印副錄事)를 지낸 전예(全禮)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부정(副正)을 지낸 김상보(金尙保)의 딸 상산 김씨(商山金氏)이다. 전적(典籍)을 지낸 문손관(文孫貫)의 딸 감천 문씨(甘泉文氏)를 아내로 맞이하여 23녀를 두었다.

세종(世宗) 때에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문종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하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30세의 나이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가 있던 영주(榮州) 휴천(休川)으로 낙향하였다. 그 뒤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죽자 삼년상을 지냈으며, 임종할 때에도 자손들에게 관직에 나서지 말고 매년 영월로 찾아가 단종의 묘소에 참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중종 때에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주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호군(通政大夫護軍)에 올랐으며, 1521(중종 16) 83일에 97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칠성산(七星山) 용상동에 매장되었다.

전희철(全希哲)은 단종에 대한 절개를 지킨 절신(節臣)으로 사림의 존경을 받았으며, 영주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무덤이 있는 칠성산 용상동에는 그의 후손들이 세운 칠성루(七星樓)와 휴계재사(休溪齋舍)가 있는데, 이것들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희철 [全希哲] (두산백과)

 

(1) 허전[ 許傳 ]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 출생. 허병(許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허윤(許玧)이고, 아버지는 허형(許珩)이며, 어머니는 이중필(李重泌)의 딸이다.

내용

1835(헌종 1) 39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 함평현감이 되었다. 1850(철종 1) 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참가해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였다.

1855년 당상관에 오르면서 벼슬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자, 그 해소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고종 1) 김해부사로 부임해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는 한편, 선비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

그 뒤 가선대부(嘉善大夫)를 거쳐,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 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경의(經義)와 관련해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에 바탕한 구체적인 개혁안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宗堯錄)·철명편(哲命編)을 비롯해,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士儀)등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허전 [許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최흥원[ 崔興源 ]

본관 삭녕(朔寧). 자 복초(復初). 호 송천(松泉). 시호 충정(忠貞). 1555(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8(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장령(掌令정언(正言사간(司諫집의(執儀) 등을 지냈다.

부평부사(富平府使) 때인 1578년 감독 소홀로 효릉(孝陵)의 정자각(丁字閣) 보수 기일을 지키지 못해 파직되었다가 다시 승지로 복직했다. 1592년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었고, 그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으며, 세자를 강계(江界)까지 배종한 뒤 의주(義州)에서 왕을 시종했다.

1593년 신병으로 사직,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흥원 [崔興源] (두산백과)

 

(3)정지년[ 鄭知年 ]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자는 유영(有永)이고, 호는 노송정(老松亭망칠(望七)이다. 1438(세종 20)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양현고 승(養賢庫丞) 등을 거쳐 중훈대부(中訓大夫) 성균관사예를 역임하였다. 세조의 압력으로 단종이 왕위를 양위하자,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나 관직에 뜻을 잃고 향리로 내려가 노송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네 아들 정효항(鄭孝恒정효상(鄭孝常정효종(鄭孝終정효본(鄭孝本)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좌찬성에 증직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순천 옥계사(玉溪祠), 남원 덕암서원(德巖書院),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위패가 봉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지년 [鄭知年] (두산백과)

 

(4)유태좌[ 柳台佐 ]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서울 출생.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사춘(師春)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예조판서 억지(億之)의 딸이다.

1794(정조 1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가주서가 되고 주자서(朱子書) 3책을 하사받았다. 1796년 경연에서 주자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진강하였고, 1800년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곧 부여현령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북평사가 되어서는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다. 이듬해에 성균관사성을 지내고, 1807(순조 7)에 안변부사가 되었을 때 화재로 소실한 무기고와 병기를 복구하였다. 1810년 군자감정과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1820년 예조참의, 1822년 동부승지, 1829년 부총관·우승지·호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향리에 돌아가 후진을 가르치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따랐으며,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

[네이버 지식백과] 유태좌 [柳台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박시원[ 朴時源 ]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치실(穉實)이고 호는 일포(逸圃)이다.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98(정조 2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지평(持平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영천(榮川:지금의 영주)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이인행(李仁行)과 이산서원(伊山書院)을 정비하고 경서를 강독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언행이 진실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시문집 일포집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시원 [朴時源] (두산백과)

 

(6)유후조[ 柳厚祚 ]

본관 풍산(豊山). 자 재가(載可). 호 매산(梅山낙파(洛坡). 시호 문헌(文憲). 류성룡(柳成龍)8대손. 1858(철종 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호군(副護軍이조참판·공조판서를 거쳐, 1866(고종 3)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중국에 와 있는 서양인들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1867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1872년 중추부판사로 퇴임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후조 [柳厚祚] (두산백과)

 

(7)이휘재[ 李彙載 ]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덕여(德輿), 호는 운산(雲山)이다. 퇴계(退溪)10대손이다. 1827(순조 27) 증광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선릉참봉(宣陵參奉장악원주부·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842(헌종 8) 경산현령(慶山縣令)으로 있으면서 문회재(文會齋)를 창건하여 문풍(文風)을 진작하였고, 안성군수(安城郡守)와 청풍부사(淸風府使)를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있을 때는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공덕비를 세웠다. 1853(철종 4) 벼슬에서 물러나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 뒤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왕명(王命)을 받고 나가 많은 공을 세운 후 호조참의·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시문집에운산문집6책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휘재 [李彙載] (두산백과)

 

(8)전규병(全奎炳)

자 여명(汝明)

호 우암(愚奄)

생년 1840(헌종 6)

졸년 1905(광무 9)

시대 조선후기

본관 옥천(沃川)

활동분야 학자 > 유학자

[관련정보]

[생원시] 철종(哲宗) 12(186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三等) 46(74/94)

[상세내용]

전규병(全奎炳)에 대하여

1840(헌종 6)1905(광무 9).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여명(汝明)이고, 호는 우암(愚奄)이다. 본관은 옥천(沃川)이고,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천(榮川)이다.

부친 전승렬(全承烈)과 모친 송상종(宋相宗)의 딸 야로송씨(冶爐宋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은 전규엽(全奎燁)이다.

1861(철종 12) 신유 식년시 생원 346위로 합격하였다.

문집으로 우암유고(愚奄遺稿)가 전하는데, 아들 전건석(全建錫) 등이 편집하여 경상북도 영주 대암정사에서 간행하였다. 문집 가운데 반재원조(泮齋元朝)312성상수재생알성(三月十二日聖上率再生謁聖)은 성균관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각오를 기록한 것이고, 산거추경사수(山居秋景四首)남재추야(南齋秋夜)는 선비의 전형적인 이상을 나타낸 것이며, 편지글은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와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주고받은 것이다.

[참고문헌]

[집필자]

박경이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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