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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전

[스크랩] 七星樓및休溪齋舍 文化財指定記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16.07.17|조회수65 목록 댓글 0

 

七星樓休溪齋舍 文化財指定記

 

嶺南은 옛부터 文獻의 고장이요 名勝의 임총이다明麗江山이 말없이 옛빛을 띄우고 悠久歷史가 그 자취를 證明하고 있다그 사이에 세워진 이 있고 그 風景을 읊은 가 있다

 

嶺南韓國文化精神的 念願이며 그 故鄕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곳에서 生成發展되고 維持發展되어온 文化力量으로 말미암아 우리 民族史發展原動力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上下二千載長久時間起伏과 함께 嶺南地方民族史發展過程에서 항상 重要役割을 담당하여 왔고 이곳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은 文化生命獨自的이고 個性的인 그 고장의 精神的雨露를 맞으며 開花하였다精華新羅時代新羅文化는 곧 花郞道精神이며 元曉和靜思想이다그리고 이 고장에서 退溪哲學 또한 東方精神文化의 일대 頂点이다

 

여기에 榮州嶺南文化一翼을 담당하는 고장으로서 古來錚錚先賢이 많이 輩出된 곳으로써 休溪公 全希哲 先生께서는 朝鮮朝六代王端宗時首陽大君王位簒奪 사건에 悲憤慷慨하여 벼슬을 버리고 六臣泣別하고 慶尙道 榮州에서 隱居生活을 하였다

이와 같이 休溪先生께서는 不事二君忠節을 다하기 위하여 漢陽을 버리고 이곳 榮州에서 隱居하며 매일 七星山에 올라 멀리 寧越을 바라보며 望拜痛哭하고 社稷運命을 걱정하였다端宗昇遐함에 三年間服喪하였고 臨死諸孫들에게 하기를 今後一年에 한 번씩 寧越에 있는 端宗陵에 배알하라고 吩咐를 하였다

 

愚伏 鄭經世 先生榮州에 와서 休溪先生流芳이 서려있는 由緖 깊은 方山에서 一句節名詩를 남겼다

一抹方山何處是 南來復見杜門洞이라 하였으니 그 뜻을 새겨보면

내님 계시는 方山이 아련하여 어딘가 와서 보니 쪽에도 杜門洞이 있었구나

 

그리고 刑曹 吏曹判書를 지낸 바 있는 陽川 許傳先生休溪遺蹟序에 다음과 같이 썼다

節介 가짐이 우리 東方에 빛나도다

높은 저 方山蒼穹에 닿았도다

를 품고 으로 오심이여

高潔安臥하여 考終하였도다

竹帛記載됨이 있음이여

百世遺風하였도다

後孫들이 어질고 착함이여

先祖를 위하여 뜻을 돈독히 하도다

이도 역시 休溪先生忠節을 기린 글이다

 

休溪先生五代孫雪月堂(諱全益禧)선생 나시니

하늘이 忠良한 이를 낳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社稷을 붙잡을 功勳을 세우려 함이요

선비가 六韜三略硏磨하는 것은 나라에 을 평정하려고 하는 거룩한 뜻이 스며있는 것이다그윽히 생각컨대 善山府使 雪月堂 全公이여 七星山이 뻗친 精氣榮川에서 빛난 家閥이로다

하는 말은 雪月堂 先生讚揚鶴沙 金應祖 先生의 글이다

 

七星樓一六三一年(仁祖九)休溪公 全希哲先生遺德追慕하기위하여 그 五代孫雪月堂 全益禧先生께서 創建하였고 休溪齋舍休溪先生祭享을 모시기 위하여 그 曾孫되는 望日堂 全漑先生一五七六年(宣祖九)創建하였다

그후 參奉公 全珀 松坡公 全應斗 望日堂 全漑 雪月堂 全益禧 先生 등을 함께 모시는 齋舍로서 朝鮮朝 初中期嶺南名門家名賢들의 遺德追慕하기 위하여 創建代表的建築樣式으로서 審査委員들의 現地踏査三十餘種에 달하는 文獻考證根據하여 엄격한 審査 끝에 文化財로서의 保存價値가 높다고 判斷되어 一九八三年 七月 十六日字慶尙北道 有形文化財 第二八四號指定된 것이다

 

本遺蹟地方文化財指定되기까지에는 이들 資料考證文獻을 찾아 提示하는 등 알찬 結實을 맺기까지의 많은 精誠을 쏟은 後孫으로는 全河禹氏努力이 컸다고 한다

全河禹氏公職在任期間에도 透徹國家觀歷史意識으로 맡은 바 所任을 가장 模範的으로 遂行하여 왔다뿐만 아니라 二十餘星霜을 두고 많은 私財投入하여 方山書院 復元事業을 비롯하여 方山宗宅 重建 四代石物建立 그리고 各種 文獻發掘 遺蹟保存事業 崇祖事業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榮州는 예로부터 文鄕이라 불리어 朝鮮朝 儒敎 形成主導的 役割을 담당하여 왔으며 우리 民族文化史에 있어서도 많은 比重을 차지하여 왔다오늘날 外來文化의 범람으로 우리의 精神保存하기가 어려운 狀況에서 鄕土 固有文化遺産과 그 歷史傳乘하려는 後孫들의 끈질긴 努力은 더욱 意義 깊고 값진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燦然했던 鄕土史再照明하는 데도 크게 보탬이 되리라 믿는 바이다

 

古來榮州는 선비의 고장인지라 麗末安文成公 같은 碩學名賢을 비롯하여 錚錚名士繼繼承承하였으므로 일찌기 李退溪先生地靈而風美爲人材之淵藪라 하였으니 진실로 그 赫赫學行 深奧經綸 卓越文章 崇高忠節 潔白志操 至極孝烈 先賢行蹟流芳百世不朽榮名이요 鄕史에 길이 남을 光輝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休溪公 全希哲 雪月堂 全益禧 先生 같은 우뚝한 人物이 나왔으니 榮州名實共鄒魯이라 할 수 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儒學淵源氣槪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七星樓休溪齋舍는 우리 鄕土文化의 새로운 비전提示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올바른 우리의 文化遺産永遠後代 傳授하는 記念碑的 役割을 담당하게 될 것이며 이는 곧 全門發展과 더불어 榮州 鄕土史永遠發展金字塔이 될 것이다

 

一九八六年 參月 壹日 前大法院長 國政諮問委員 全義後人 李英燮謹撰

 

 

번역

칠성루 및 휴계재사를 문화재로 지정한 기록

七星樓休溪齋舍 文化財指定記

이영섭(李英燮 1919-2000)

 

영남(嶺南)은 옛날부터 문헌(文獻)의 고장이요 명승(名勝)의 고을이다. 밝고 수려한 강산(江山)이 말없이 옛 빛을 띄고 유구한 역사(歷史)가 그 자취를 증명하고 있다. 그 사이에 세워진 다락과 누대와 정자가 있고 그 풍경을 읊은 철인(哲人)과 현인(賢人)과 호걸(豪傑)과 선비가 있다.

영남이 한국문화의 정신적 염원이며 그 고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이곳에서 생성되어 발전되고, 유지되고 발전되어온 문화역량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사발전에 원동력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상하 이천년의 장구한 시간의 기복과 함께 영남지방은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고, 이곳에서 꽃피우고 열매 맺은 문화생명은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그 고장의 정신적인 비와 이슬을 맞으며 꽃을 피웠다.

그 정화가 신라시대의 신라문화로 곧 화랑도(花郞道)(01)의 정신이며 원효(元曉)의 화정사상(和靜思想)(02)이다. 그리고 이 고장에서 퇴계(退溪)(03)의 철학 또한 우리 동방 정신문화의 일대 정점이다.

 

여기에 영주(榮州)도 영남문화의 한 날개를 담당하는 고장으로서 고래로 쟁쟁한 선현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써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04) 선생께서는 조선조(朝鮮朝)6대 임금인 단종(端宗) 때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王位簒奪) 사건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벼슬을 버리고 사육신(死六臣)(05)과 눈물로 이별하고 경상도(慶尙道) 영주(榮州)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와 같이 휴계선생께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성과 절개를 다하기 위하여 정든 한양(漢陽)을 버리고 이곳 영주에서 은거하며 매일 칠성산(七星山)에 올라 멀리 영월(寧越)(06)을 바라보며 절하면서 통곡하고 사직(社稷)의 운명을 걱정하였다. 단종이 승하(昇遐)하자 3년간을 상복(服喪)하였고 죽음에 이르자 여러 자손들에게 지금 이후로 1년에 한 번씩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에 배알하라.”라고 분부를 하였다.

 

뒤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07) 선생은 영주에 와서 휴계선생의 아름다운 명성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방산(方山)(08)에서 한 구절의 명시(名詩)를 남겼다.

일말방산하처시(一抹方山何處是)

남래부견두문동(南來復見杜門洞)”이라 하였으니 그 뜻을 새겨보면 다음과 같다.

 

내님 계시는 방산(方山)이 아련하여 어딘가?

와서 보니 남쪽에도 두문동(杜門洞)(09)이 있었구나!

 

그리고 형조(刑曹) 및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바 있는 양천(陽川) 허전(許傳)(10) 선생은 휴계유적서(休溪遺蹟序)에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의 절개 가짐이여!

우리 동방에 빛나도다.

높은 저 방산이여!

창궁(蒼穹)에 닿았도다.

()를 품고 남으로 오심이여!

고결(高潔)하게 편안이 누워 고종(考終 : 죽음)하였도다.

죽백(竹帛 : 역사)에 기재(記載)됨이 있음이여!

백세유풍(百世遺風)을 전하였도다.

후손들이 어질고 착함이여!

선조를 위하여 뜻을 돈독히 하도다.

 

이것도 역시 휴계선생의 충절(忠節)을 기린 글이다.

휴계선생의 5대손인 설월당(雪月堂 : () 전익희(全益禧)(11) 선생이 나시니

하늘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를 낳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사직(社稷)을 붙잡을 공훈(功勳)을 세우려 함이고, 선비가 육도삼략(六韜三略)(12)을 연마하는 것은 나라에 난리를 평정하려고 하는 거룩한 뜻이 스며있는 것이다.

 

그윽하게 생각해보니 선산부사(善山府使) 설월당(雪月堂) 전공(全公)이여!

칠성산(七星山)이 뻗친 정기(精氣), 영주(榮川)에서 빛난 가문이로다.

이 말은 설월당 선생을 찬양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13) 선생의 글이다.

 

칠성루(七星樓)(14)1631(인조 9)에 휴계공 전희철 선생이 끼친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그 5대손인 설월당 전익희 선생께서 창건하였고, 휴계재사(休溪齋舍)(15)는 휴계선생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그 증손되는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16) 선생이 1576(선조 9)에 창건하였다. 그 후 참봉공(參奉公) 전박(全珀), 송파공(松坡公) 전응두(全應斗),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선생 등을 함께 모시는 재사(齋舍)로써 조선조 초중기의 영남명문가의 명현들이 끼친 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한 대표적인 건축양식으로써 심사위원들의 현지답사와 30여종에 달하는 문헌과 고증에 근거하여 엄격한 심사 끝에 문화재로서의 보존가치가 높다고 판단되어 1983716일자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284호로 지정된 것이다.

 이 유적이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기까지에는 이들 자료와 고증문헌을 찾아 제시하는 등 알찬 결실을 맺기까지의 많은 정성을 쏟은 후손으로는 전하우(全河禹) 씨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전하우 씨는 공직에 재임하는 기간에도 투철한 국가관과 역사의식으로 맡은 바 소임을 가장 모범적으로 수행하여 왔다. 뿐만 아니라 20여 성상을 두고 많은 사재를 투입하여 방산서원(方山書院)(17) 복원사업(復元事業)을 비롯하여 방산종택(方山宗宅) 중건 4() 석물(石物) 건립 그리고 각종 문헌발굴과 유적보존사업 등 조상을 높이는 사업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영주는 예로부터 문향(文鄕)이라 불리어 조선조 유교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며 우리 민족문화사에 있어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오늘날 외래문화의 범람으로 우리의 정신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향토 고유의 문화유산과 그 역사를 전승하려는 후손들의 끈질긴 노력은 더욱 의의 깊고 값진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나아가서는 찬연했던 향토사를 재조명하는 데도 크게 보탬이 되리라 믿는 바이다.

 

고래로 영주는 선비의 고장인지라 고려 말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18) 같은 석학(碩學)과 명현(名賢)을 비롯하여 쟁쟁한 명사가 잇고 이어졌으므로 일찍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도 땅이 신령하고 풍속이 아름다워 인재들이 모여드는 못과 숲이다.[地靈而風美 爲人材之淵藪]”라 하였으니 진실로 그 혁혁한 학행(學行), 심오한 경륜(經綸), 탁월한 문장(文章), 숭고한 충절(忠節), 결백한 지조(志操), 지극한 효열(孝烈) 등 선현의 행적은 유방백세(流芳百世)(19)할 불후의 영광스런 이름으로 향토사에 길이 남을 광채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휴계공 전희철과 설월당 전익희 선생 같은 우뚝한 인물이 나왔으니 영주는 명실공히 추로(鄒魯)의 고을(20)이라 할 수 있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학연원(儒學淵源)의 기개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칠성루와 휴계재사는 우리 향토문화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올바른 우리의 문화유산을 영원히 후대에 전수하는 기념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전씨(全氏) 문중의 발전과 더불어 영주 향토사의 영원한 발전에 금자탑(金字塔)(21)이 될 것이다.

 

198631일 전대법원장(前大法院長)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 전의(全義) 후인 이영섭(李英燮)(22)이 삼가 짓다.

 

 

주석

(01)화랑도(花郞道) : 신라의 화랑과 그 낭도들이 사상적으로 간직하고 실천하려고 힘썼던 도리(道理), ((()의 삼교(三敎), 삼덕(三德), 오계(五戒)를 신조로 하였다.

원효(元曉) : 원효(元曉 617-686). 성은 설씨(薛氏), 원효는 법명(法名), 아명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신라시대의 승려로 일심(一心)과 화쟁(和諍) 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으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화정사상(和靜思想) : 화쟁사상(和諍思想)의 잘못된 표기이다. 원융회통사상(圓融會通思想)이라고도 하며, 원효의 저술인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에 전개되어 있다.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사상이다.

(02)和靜思想 : 화쟁사상(和諍思想)의 잘못된 표기이다.

(03)퇴계(退溪) : 이황(李滉 1501-1570).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 주자의 사상을 연구해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04)전희철(全希哲) : 전희철(1425-1521).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05)사육신(死六臣) : 1456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신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여섯 사람을 말한다.

(06)영월(寧越) : 조선의 제6대 왕 단종의 유배지.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당한 뒤 영월의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장릉에 묻혔다.

(07)정경세(鄭經世) : 정경세(1563-1633).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유성룡의 문인으로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냈다. 저서로는 우복집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08)방산(方山) : 경상북도 영천시의 남서쪽에 위치한 북안면 고지리와 신촌리 경계에 있는 산이다.

(09)두문동(杜門洞) : 경기도(京畿道)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는 땅으로 조선 왕조를 섬기는데 부끄러움을 느낀 고려의 충신 72인이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여기서는 전희철이 영주 휴천에 숨은 일을 견주었다.

(10)허전(許傳) : 허전(許傳 1797-188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병조참의에 올랐다.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 저서로 성재집이 있다

(11)전익희(全益禧) : 전익희(1598-1659).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자수(子綬), 호는 망일당(望日堂설월당(雪月堂).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5세손으로 선산부사를 지냈다. 저서로 설원당문집과 유고(遺稿)가 전한다.

(12)육도삼략(六韜三略) : ()의 강태공(姜太公)이 지었다는 육도와 황석공(黃石公)이 지어 장량(張良)에게 주었다는 상중하 3권의 병서를 말한다.

(13)김응조(金應祖) : 김응조(1587-1667).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안동 출신. 예조참의를 지냈다. 저서로 학사집이 있다.

(14)칠성루(七星樓) : 전희철(全希哲)이 살아서는 단종(端宗)이 유배된 영월(寧越)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힌 그의 사적에서 5대손 전익희(全益禧)가 칠성루라 하였다.

(15)휴계재사(休溪齋舍) : 휴계(休溪)는 전희철(全希哲)의 호로 그가 은거했던 영주(榮州) 휴천(休川)에서 따온 것이며, 그의 유덕을 기려, 증손인 망일당(望日堂) 전개(全漑)1576(선조 9)에 짓고 휴계재사라고 하였다.

(16)전개(全漑) : 본관은 옥천(沃川). 호는 망일당(望日堂)이다. 상장군(上將軍) 희철(希哲)의 증손으로 직장(直長)을 지냈다.

(17)방산서원(方山書院) :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에 있는 서원. 1633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세워 전희철(全希哲전익희(全益禧전명룡(全命龍)의 위패를 모셨다.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38년에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안향(安珦) : 안향(1243-1306).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경북 영주 출신이다. 첨의중찬으로 사직했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수용해온 분으로 동방의 주자로 불린다.

(19)유방백세(流芳百世) : 향기가 백세에 흐른다는 뜻으로, 훌륭한 명성이나 공적이 후세에 길이 전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동진(東晉)의 장군 환온(桓溫)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되었다.

(20)고을 : 공자(孔子)는 노()나라의 사람이고, 맹자(孟子)는 추()나라의 사람이므로, 공맹(孔孟)의 고향(故鄕)이란 뜻에서,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21)금자탑(金字塔) : 이집트의 피라밋을 번역(飜譯)한 말. 그 모양이 ()’자와 비슷한 데서 온 말로 불후의 업적을 비유한다.

(22)이영섭(李英燮 1919-2000) : 본관은 전의(全義). 7대 대법원장. 서울지역에서 판사 생활을 하였으며, 이화여대 법정대학장을 역임하고 대법원 판사와 헌법위원(憲法委員)이 되었다. 저서에 민법총칙(民法總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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