七星樓記
昔在景泰年間。休溪全公。以西班微御。棄官南歸。處龜城之南。休川之上而終年焉。其時節。端廟東巡之歲。禪受事作。天人有難。六臣死而其義烈烈。爭日月而炳宇宙。或有不死而生。而東峯髠。秋江放曠。耕隱瞽。其志雖晦。而其迹微露。亦有自靖。其身去而逃。逃而隱。雖家人子弟。無得以知其意。況後世乎。余竊悲其苦忠隱義不欲有知。而亦恨夫當日山野之史多逸文也。公之南下之時。年三十。混迹耕樵。無意西向。優游林泉。壽九十七而終。其間言行事爲。自居室而至於鄕黨。一何泯其迹而無得以稱也。碣文之書。剛直守約。不撓不屈。豈以此八字而槩其微意乎。其後得崔相公興源。撰鄭司藝知年行狀。有曰。當乙亥遜位之時。與司直全公希哲。同往慶會樓。掩涕別六臣曰。好事。公等自處。鄙生無足爲。因與俱遜云。於是乎。公之心事。較然著明於後世。此天理之久而必顯也。異矣。公之葬。在龜城東十里。七星山下。龍洞之原。子孫謹其守護。已經十餘世。公之廟。舊在望洞方山祠。春秋而薦享之。今以邦制見撤。後孫之專意於追遠者。惟邱壟是已。龍山之脊。舊有齋舍。病其湫隘。遠近齊會。有不能容。今上丙子。移建于墓下。其後十年丙戌。又廣其制。占地於其右。起樓。爲東西兩室而堂其中。幽敞俱愜。霜露登壟之餘。退而讌酬一堂。同欲周旋有餘地。扁樓以七星。余惟諸孫誠慤之意。可謂篤矣。而追惟其志。事於면(辶綿)遠之後。以之揭號。而常目者。其意重可感也。方公之時。星辰易次。蓁蓁百粤之山。爲辰居之所。公之每夜。冠帶向北稽首者。卽拱極之義也。星霜屢移。天道幾變而莊園之仙寢加隆。諸臣之壇享肹蠁。而公之藏。遠在南州窮山之中。其精靈。安知不乘箕尾而隨雲霓。徠往于太白飛磴之外耶。生而拱七星。歿而塟七星。遺孫之能發潛德而揭幽光。使公之隱節邃衷。炳烺如星斗之耀者。盍於此樓而觀之。
上之二十七年歲庚寅維夏節。永嘉權璉夏謹記。
칠성루기[七星樓記]
권연하(權璉夏 1813-1896)주1)
옛적 경태(景泰)주2) 연간에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주3) 공이 서반의 낮은 벼슬의 장수주4)로 있다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서 구성(龜城)의 동쪽 휴천(休川) 가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었다.
그 때는 바로 단종(端宗)이 동쪽 영월(寧越)로 가시던 해였다. 왕위를 선양하는 일이 생기자 임금과 백성들에게 어려움이 있게 되었다. 육신(六臣)은 죽어서 그 의가 열렬하였으니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퉈 우주에 찬란하였다. 혹은 죽지 않고 사신 분이 있었으니 동봉(東峯) 김시습(金時習)주5)은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주6)은 행동에 구애받지 않았고,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주7)은 장님 행세를 하였으니, 그 뜻은 비록 숨겨졌으나 그 자취는 은미하게 드러났으니 또한 자정(自靖)주8)함이 있다. 그 자신이 떠나가 세상을 피하였는데, 피하여 숨기는 하였지만 비록 그 집안의 자제라 하더라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나는 그 괴롭게 지킨 충절과 의리를 숨겨 남이 알아줌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가만히 슬퍼하고, 또한 저 그 때 당시의 산야(山野)의 역사가 대부분 문헌에서 빠졌음을 한스러워 한다. 공이 남쪽 땅으로 내려왔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 자취를 감추어 밭 갈고 나무하면서 서쪽 서울로 향할 뜻이 없었고, 임천(林川)에 넉넉히 놀아서 97세의 수명을 누리다 삶을 마쳤다. 그 사이의 언행과 사업은 집안에서 거처한 일에서부터 고을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도 자취를 감추어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도록 하였던가! 비석의 글에서는 다만 ‘강직하고 지킨 것이 요약되어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굽히지도 않았다.[剛直守約 不撓不屈]’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 여덟 글자로서 그 은미한 뜻을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 뒤에 정승(政丞) 최흥원(崔興源)주9)이 지은 사예(司藝) 정지년(鄭知年)주10)의 행장을 보았는데 쓰인 내용에 “을해년(1455) 단종이 왕위를 사양할 때를 만나 사직(司直) 전희철(全希哲) 공과 경회루(慶會樓)에 함께 가서 눈물을 닦으면서 육신(六臣)과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은 공들께서 스스로 처리하십시오. 어리석은 저희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함께 사양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공의 심사가 후세에 환히 드러난다. 이것은 천리(天理)가 오랜 세월이 지나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다.
이상하도다! 공을 장사지낸 곳은 구성(龜城)의 동쪽 십리 되는 칠성산(七星山) 아래 용동(龍洞)의 언덕인데, 자손들이 삼가 수호한 지가 이미 10여 대를 지났고, 공의 사당이 옛날에는 보름골[望洞] 방산사(方山祠)에 있어 봄과 가을로 제향하였다. 그런데 지금 나라의 제도로 인하여 철폐주11)되었으니 후손들이 조상을 제사 지내는 오롯이 할 곳은 오직 이 산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용산의 등마루에 옛적 있었던 재사(齋舍)는 낮고 비좁다는 폐단이 있어 원근의 후손들이 제사 모임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주상(고종) 병자년(1876)에 묘의 아래에 옮겨 세우고, 그 후 10년 되는 병술년(1886)에 또 그 규모를 넓혀서 그 오른쪽에 땅을 사서 누각(樓閣)를 세워 동서 양쪽에는 방을 만들고 가운에는 당을 만드니 아늑하고 시원하기가 모두 알맞았다.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계절이면 산소에 올라가 제사 올린 뒤에 물러나 한 당(堂)에 모여 음복하면서 함께 일처리 하고자 할 때 넉넉한 땅이 있게 되었다. 다락의 이름을 ‘칠성(七星)’이라 편액을 걸었다. 내가 생각해 보니, 여러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뜻이 돈독하다고 이를 만하다. 오직 그런 뜻을 뒤따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일삼는다면 그 조상의 지조와 사업을 추모하여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까지 섬기어 그것으로 이름을 걸고 항상 바라보는 자는 그 뜻이 무거워 감동할 수 있으리라.
공이 있던 당시에 별자리가 차서(次序)를 바꾸어 황폐한 백월(百越)의 산하(山河)는 임금님이 거처하는 장소가 되었다. 공은 매일 밤 의관(衣冠)을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 것은 곧 그 북극성을 향해 읍(揖)한주12) 뜻이었다. 해가 자주 바뀌어 천도(天道)가 여러 차례 변하여 장원(莊園)의 선침(仙寢)주13)에 존호가 더하여지고, 여러 신하들의 단(壇)에도 신령스런 영혼에게 제향하게 되었다. 공이 묻힌 곳은 멀리 남쪽 고을 궁벽한 산속에 있지만 그 정령(精靈)이 어찌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타고주14) 구름과 무지개를 따라 태백산(太白山)의 날아오르는 돌층계 밖에 왕래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살아서는 칠성에 읍하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장사지냈으니 남은 자손들이 능히 조상의 숨겨진 덕을 밝히고 깊은 빛을 드러낼 수 있어서 공의 숨은 절조(節操)와 깊은 충심으로 하여금 북두성이 빛나는 것처럼 환희 밝히고자 하는 자는 어찌 이 칠성루를 보지 않겠는가?
주상(고종) 27년 경인년(1890) 유하절(維夏節 : 4월)에 영가(永嘉 : 안동) 권연하(權璉夏)가 삼가 짓다.
주1)권연하(權璉夏 1813-1896) :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기(可器), 호는 이재(頤齋). 용양위호군(龍驤衛護軍)을 지냈다. 저서로 『이재집』이 있다.
주2)경태(景泰) : 명(明)나라 제7대 황제 대종(代宗) 연호로 1450-1457의 8년간 사용되었다.
주3)전희철(全希哲) : 전희철(1425-1521).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주4)장수 : 전희철이 어모사직상장군(禦侮司直上將軍)을 지낸 것을 말한다.
주5)김시습(金時習) : 김시습(1435-1493).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설잠(雪岑). 생육신의 한 사람. 시호는 청간(淸簡). 저서로 『매월당집』이 있다.
주6)남효온(南孝溫) : 남효온(1454-1492).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생육신의 한사람. 『육신전』을 지었으며, 저서로『추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주7)이맹전(李孟專) : 이맹전(1392-1480).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승문원정자를 지냈다. 생육신의 한 사람. 고향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
주8)자정(自靖) : 『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채전(蔡傳)에는 사람마다 각자 극진히 해야 할 바의 의리를 편안히 여겨 자신의 뜻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주9)최흥원(崔興源) : 최흥원(1529-1603).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주10)정지년(鄭知年) : 정지년(1395-1462).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영(有永), 호는 노송정(老松亭). 자호(自號) 망칠(望七). 중훈대부 성균관사예 등을 역임하였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향리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주11)철폐 :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방산사가 철폐된 일을 말한다.
걸었다. : 전희철(全希哲)이 살아서는 단종(端宗)이 유배된 영월(寧越)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받들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힌 그의 사적에서 5대손 전익희(全益禧)가 칠성루라 하였다.
백월(百越) : 옛날 교지(交趾)에서 회계(會稽)까지 칠팔천 리 주위에 군소 월족(越族)들이 모여 각기 작은 나라들을 매우 많이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는 단종이 유폐당한 영월(寧越)을 가리킨다.
주12)읍(揖)한 : 공극(拱極)은 뭇 별들이 북극성(北極星)을 향하는 것이니, 신하가 임금을 향한다는 뜻이다. 『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으로 정치하면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 위치에 있자 뭇별들이 거기로 향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주13)선침(仙寢) :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4리 에 있는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으로 노산군으로 있다 죽었기에 장원이라 한 것이다. 숙종 때 단종으로 추복되고 능호도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주14)타고 : 기미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사이로, 부열(傅說)의 별자리가 있는 곳이다.은(殷)나라 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기성(箕星)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