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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칠성루기[七星樓記]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16.08.16|조회수71 목록 댓글 0




七星樓記


昔在景泰年間休溪全公以西班微御棄官南歸處龜城之南休川之上而終年焉其時節端廟東巡之歲禪受事作天人有難六臣死而其義烈烈爭日月而炳宇宙或有不死而生而東峯髠秋江放曠耕隱瞽其志雖晦而其迹微露亦有自靖其身去而逃逃而隱雖家人子弟無得以知其意況後世乎余竊悲其苦忠隱義不欲有知而亦恨夫當日山野之史多逸文也公之南下之時年三十混迹耕樵無意西向優游林泉壽九十七而終其間言行事爲自居室而至於鄕黨一何泯其迹而無得以稱也碣文之書剛直守約不撓不屈豈以此八字而槩其微意乎其後得崔相公興源撰鄭司藝知年行狀有曰當乙亥遜位之時與司直全公希哲同往慶會樓掩涕別六臣曰好事公等自處鄙生無足爲因與俱遜云於是乎公之心事較然著明於後世此天理之久而必顯也異矣公之葬在龜城東十里七星山下龍洞之原子孫謹其守護已經十餘世公之廟舊在望洞方山祠春秋而薦享之今以邦制見撤後孫之專意於追遠者惟邱壟是已龍山之脊舊有齋舍病其湫隘遠近齊會有不能容今上丙子移建于墓下其後十年丙戌又廣其制占地於其右起樓爲東西兩室而堂其中幽敞俱愜霜露登壟之餘退而讌酬一堂同欲周旋有餘地扁樓以七星余惟諸孫誠慤之意可謂篤矣而追惟其志事於(辶綿)遠之後以之揭號而常目者其意重可感也方公之時星辰易次蓁蓁百粤之山爲辰居之所公之每夜冠帶向北稽首者卽拱極之義也星霜屢移天道幾變而莊園之仙寢加隆諸臣之壇享肹蠁而公之藏遠在南州窮山之中其精靈安知不乘箕尾而隨雲霓徠往于太白飛磴之外耶生而拱七星歿而塟七星遺孫之能發潛德而揭幽光使公之隱節邃衷炳烺如星斗之耀者盍於此樓而觀之


上之二十七年歲庚寅維夏節永嘉權璉夏謹記





칠성루기[七星樓記]


권연하(權璉夏 1813-1896)1)


옛적 경태(景泰)2) 연간에 휴계(休溪전희철(全希哲)3) 공이 서반의 낮은 벼슬의 장수4)로 있다 벼슬을 버리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서 구성(龜城)의 동쪽 휴천(休川가에서 살다가 일생을 마치었다.

그 때는 바로 단종(端宗)이 동쪽 영월(寧越)로 가시던 해였다왕위를 선양하는 일이 생기자 임금과 백성들에게 어려움이 있게 되었다육신(六臣)은 죽어서 그 의가 열렬하였으니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퉈 우주에 찬란하였다혹은 죽지 않고 사신 분이 있었으니 동봉(東峯김시습(金時習)5)은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며추강(秋江남효온(南孝溫)6)은 행동에 구애받지 않았고경은(耕隱이맹전(李孟專)7)은 장님 행세를 하였으니그 뜻은 비록 숨겨졌으나 그 자취는 은미하게 드러났으니 또한 자정(自靖)8)함이 있다그 자신이 떠나가 세상을 피하였는데피하여 숨기는 하였지만 비록 그 집안의 자제라 하더라도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는데 하물며 후세 사람들에게 있어서랴!

나는 그 괴롭게 지킨 충절과 의리를 숨겨 남이 알아줌이 있기를 바라지 않았음을 가만히 슬퍼하고또한 저 그 때 당시의 산야(山野)의 역사가 대부분 문헌에서 빠졌음을 한스러워 한다공이 남쪽 땅으로 내려왔을 때 나이가 서른이었다자취를 감추어 밭 갈고 나무하면서 서쪽 서울로 향할 뜻이 없었고임천(林川)에 넉넉히 놀아서 97세의 수명을 누리다 삶을 마쳤다그 사이의 언행과 사업은 집안에서 거처한 일에서부터 고을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어찌 그렇게도 자취를 감추어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도록 하였던가비석의 글에서는 다만 강직하고 지킨 것이 요약되어 흔들리지도 않았으며 굽히지도 않았다.[剛直守約 不撓不屈]’라고 하였으니 어찌 이 여덟 글자로서 그 은미한 뜻을 정리할 수 있겠는가?

그 뒤에 정승(政丞최흥원(崔興源)9)이 지은 사예(司藝정지년(鄭知年)10)의 행장을 보았는데 쓰인 내용에 을해년(1455) 단종이 왕위를 사양할 때를 만나 사직(司直전희철(全希哲공과 경회루(慶會樓)에 함께 가서 눈물을 닦으면서 육신(六臣)과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은 공들께서 스스로 처리하십시오어리석은 저희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함께 사양했다고 한다여기에서 공의 심사가 후세에 환히 드러난다이것은 천리(天理)가 오랜 세월이 지나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다.

이상하도다공을 장사지낸 곳은 구성(龜城)의 동쪽 십리 되는 칠성산(七星山아래 용동(龍洞)의 언덕인데자손들이 삼가 수호한 지가 이미 10여 대를 지났고공의 사당이 옛날에는 보름골[望洞방산사(方山祠)에 있어 봄과 가을로 제향하였다그런데 지금 나라의 제도로 인하여 철폐11)되었으니 후손들이 조상을 제사 지내는 오롯이 할 곳은 오직 이 산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용산의 등마루에 옛적 있었던 재사(齋舍)는 낮고 비좁다는 폐단이 있어 원근의 후손들이 제사 모임에서 수용할 수 없었다.

주상(고종병자년(1876)에 묘의 아래에 옮겨 세우고그 후 10년 되는 병술년(1886)에 또 그 규모를 넓혀서 그 오른쪽에 땅을 사서 누각(樓閣)를 세워 동서 양쪽에는 방을 만들고 가운에는 당을 만드니 아늑하고 시원하기가 모두 알맞았다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계절이면 산소에 올라가 제사 올린 뒤에 물러나 한 당()에 모여 음복하면서 함께 일처리 하고자 할 때 넉넉한 땅이 있게 되었다다락의 이름을 칠성(七星)’이라 편액을 걸었다내가 생각해 보니여러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뜻이 돈독하다고 이를 만하다오직 그런 뜻을 뒤따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일삼는다면 그 조상의 지조와 사업을 추모하여 아득한 세월이 흐른 뒤에까지 섬기어 그것으로 이름을 걸고 항상 바라보는 자는 그 뜻이 무거워 감동할 수 있으리라.

공이 있던 당시에 별자리가 차서(次序)를 바꾸어 황폐한 백월(百越)의 산하(山河)는 임금님이 거처하는 장소가 되었다공은 매일 밤 의관(衣冠)을 갖추고 북쪽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린 것은 곧 그 북극성을 향해 읍()12) 뜻이었다해가 자주 바뀌어 천도(天道)가 여러 차례 변하여 장원(莊園)의 선침(仙寢)13)에 존호가 더하여지고여러 신하들의 단()에도 신령스런 영혼에게 제향하게 되었다공이 묻힌 곳은 멀리 남쪽 고을 궁벽한 산속에 있지만 그 정령(精靈)이 어찌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을 타고14) 구름과 무지개를 따라 태백산(太白山)의 날아오르는 돌층계 밖에 왕래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살아서는 칠성에 읍하고 죽어서는 칠성산에 장사지냈으니 남은 자손들이 능히 조상의 숨겨진 덕을 밝히고 깊은 빛을 드러낼 수 있어서 공의 숨은 절조(節操)와 깊은 충심으로 하여금 북두성이 빛나는 것처럼 환희 밝히고자 하는 자는 어찌 이 칠성루를 보지 않겠는가?


주상(고종) 27년 경인년(1890) 유하절(維夏節 : 4)에 영가(永嘉 안동권연하(權璉夏)가 삼가 짓다.





1)권연하(權璉夏 1813-189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가기(可器), 호는 이재()용양위호군(衛護軍)을 지냈다저서로 이재집이 있다.

2)경태(景泰()나라 제7대 황제 대종(代宗연호로 1450-1457의 8년간 사용되었다.

3)전희철(全希哲) 전희철(1425-1521).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원명(原明), 호는 휴계(休溪).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낙향하여 절개를 지켰다.

4)장수 전희철이 어모사직상장군(禦侮司直上將軍)을 지낸 것을 말한다.

5)김시습(金時習) 김시습(1435-1493).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설잠(雪岑). 생육신의 한 사람시호는 청간(淸簡). 저서로 매월당집이 있다.

6)남효온(南孝溫) 남효온(1454-1492).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생육신의 한사람육신전을 지었으며저서로추강집이 있다시호는 문정(文貞)이다.

7)이맹전(李孟專) 이맹전(1392-1480).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승문원정자를 지냈다생육신의 한 사람고향 선산으로 돌아가서 귀머거리·소경이라 핑계하고는 은둔하였다시호는 문간(文簡).

8)자정(自靖서경(書經)』 『미자(微子)의 채전(蔡傳)에는 사람마다 각자 극진히 해야 할 바의 의리를 편안히 여겨 자신의 뜻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9)최흥원(崔興源) 최흥원(1529-1603).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다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0)정지년(鄭知年) 정지년(1395-1462).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영(有永), 호는 노송정(老松亭). 자호(自號망칠(望七). 중훈대부 성균관사예 등을 역임하였으나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향리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11)철폐 :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방산사가 철폐된 일을 말한다.

걸었다. : 전희철(全希哲)이 살아서는 단종(端宗)이 유배된 영월(寧越)을 생각하며 북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을 받들고죽어서는 칠성산에 묻힌 그의 사적에서 5대손 전익희(全益禧)가 칠성루라 하였다.

백월(百越) : 옛날 교지(交趾)에서 회계(會稽)까지 칠팔천 리 주위에 군소 월족(越族)들이 모여 각기 작은 나라들을 매우 많이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기서는 단종이 유폐당한 영월(寧越)을 가리킨다.

12)() 공극(拱極)은 뭇 별들이 북극성(北極星)을 향하는 것이니신하가 임금을 향한다는 뜻이다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으로 정치하면 비유컨대 북극성이 제 위치에 있자 뭇별들이 거기로 향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13)선침(仙寢) 강원도 영월군 영월면 영흥4리 에 있는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으로 노산군으로 있다 죽었기에 장원이라 한 것이다숙종 때 단종으로 추복되고 능호도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14)타고 기미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사이로부열(傅說)의 별자리가 있는 곳이다.()나라 재상 부열(傅說)이 죽은 뒤에 기성(箕星)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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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전씨(全氏)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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