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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상처 입은 예술가, 위로받는 독자

작성자한강의 언덕|작성시간26.06.09|조회수27 목록 댓글 0


상처 입은 예술가, 위로받는 독자
  /안병용

 



 

 

아이들 시집-장가보내기까지 적당한(?) 세월을 살다 보니 한 생을 흠 없이 살기가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일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 우리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명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각종 뉴스를 보며 깨달을 때가 있다. 특히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볼 때, 그 불완전함은 유독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클래식 음악을 즐기게 되면서 유명한 음악가들의 물고 물리는 막장(?) 사생활에 놀란 적이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제자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 코지마와 불륜에 빠진 일화는 유명하다. 하긴 리스트는 남편과 아이가 있는 백작 부인인 마리 다구와 사랑에 빠져 스위스로 야반도주했었다. 그 리스트가 바그너와 불륜을 저지른 코지마의 아버지다. 화려한 장인과 사위다.


드뷔시 역시 유부남 신분으로 제자의 어머니와 도피한 일로 논란을 남겼다. 작품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천재 음악가들의 삶이다. 지금같이 SNS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시대라면 사회적으로 매장이 돼도 백 번은 되었을 일들이 19세기 유럽에선 흔했나 보다. 어디 음악가뿐이랴. 임헌영 국립한국문학관 관장은 <상처와 화살>(보리 2026)에서 "당대 프랑스 최고의 시인이었던 프랑스와 비용은 신부 실해범에 절도까지 저지른 파렴치범이 었고, 보들레르나 오스카 와일드 는 패륜아 였으며, 이백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바이런은 도덕 불감증이었으며. 에드거 앨런 포 역시 알코올 중독에 현실 부적응자였다."라고 서술하며 문학가들의 가지가지 추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상처가 화살로 변화하여 독자들의 마음에 박혀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하여 세계 정신사의 스승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도 했다.

 

위에 인용한 책에서 미국의 저명한 평론가 에드먼드 윌슨의 평론집 <필록 테데스: 상처와 화살> 을 소개하며 "문학인이란 악취가 풍기는 상처와, 세상사의 아픔이나 난제를 해결할 비법(활)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는 윌슨의 말을 전해준다. 뒤이어 문학인들은 뭔가 결필된 존재이며 그 상처로 표현된 '현실적인 삶의 부조화'와 더불어 그들이 지닌 '이상주의적 작품세계'가 인류에게 유익하다고 설파하는 임헌영 교수의 선언에 눈이 번쩍 떠졌다. 결핍이 오히려 창작의 원천이 되고, 그것이 독자에게 구원이 되는 역설을 말함이리라.

상처에서 잉태된 위안이라는 말에 잠시 안심이 된다. 그러나 행동거지로 보면 존경할 위인은 아니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들에서 감동과 위로를 받으며 좋아하게 되는 그 미묘한 지점에서 주춤거린 적이 많았다. 그러는 와중에 스캔들에 휩싸인 작가들의 다양한 사례와 법적인 분쟁까지 치밀하게 분석하여 도덕성과 작품의 관계를 둘러싼 유럽 문학계의 논쟁을 소개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저, 원은영 역, 이음, 2025)도 읽게 되었다.

 

그 책에선 미성년자 성범죄를 저지른, 영화 <피아니스트>의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하나의 사례로 나온다. 범죄 수준의 도덕적 파탄에도 위의 논리가 적용될 수 있을까? 또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한, 보스니아 전쟁 중 세르비아 측이 자행한 '스레브레니차 집단학살 (1995)'에 대해 부정.축소하여 발언한 페터 한트케(오스트리아 2019년 노벨문학상 수상)도 주요 논쟁 중 하나로 소개한다. 작품을 피해자와 분리할 수 있냐는 질문을 비롯해, 대립하는 여러 의견 속에서 예술가의 윤리 문제를 치열하게 다양한 각도에 서 분석한다 도덕은 상대적이며 예술의 자유까지 거론하면서 당당히 자신을 변호하는 당사자들에게 동조는 못 하지만 다 꺼내놓고 사회적 토론을 활발하게 벌이는 '그들이 사는 세계'는 (언급을 되도록 꺼리는) 우리완 뭔가 다르게 보이긴 했다. 진지하게 나아가 본다. 이런 부류의 이야기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들이 나중에 확인되는 불미스러운 일로 그 작가와 작품을 다 매장하는 일들이 많았다. 이런 문제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만 남지 않는다. 친일이나 독재 찬양으로 상처 난 소설가 김동인, 음악가 홍난파 시인 서정주. 그리고 성추행으로 무너진 시인 고은 등 시대의 예술적 거장들의 부침을 보는 마음이 씁쓸했다.

그런데 상처가 위로의 화살로 돌아올 수 있단다! 그들에게 상처는 운명 같은 것인가? 너절해 보이지만 그 진흙 속에서 연꽂이 피어 아름다운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까지를 상처라 부르고, 어디서부터는 단죄해야 할 죄라 부를 것인가? 고인故人이 된 인물들은 그래도 논쟁을 통해 얼추 정리가 되는데, 살아 있는 자들은 거론 자체를 꺼리며 각자 마음속에서 나름대로 정리하곤 잊고 또 버린다. 개인적으로 고은 시인에 대한 애증이 많았다. .그의 폭포같이 쏟아내는 시들을 보며 누구는 배설한다고까지 비아냥대지만. 난 그의 홍수 같은 말, 단어. 문장의 탁류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맘껏 즐겼다. 7권 서사시 <백두산>30권 4001편의 연작 시집 <만인보>그리고 수십 권의 시집들.. 신문과 시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되묻기도 하며 보낸 젊은 시절이 있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어느 어간에 그를 잃어버렸다.

세간의 시끄런 소리에 귀를 닫고 지내다 <상처와 화살>이 맘 깊숙이 가라 앉아 있던 그 소란의 기포를 다시 부글거리게 했다. 받은 예술적 은총에 감사하며 다 잊을까? 여러 문인들이 작가와 작품의 분리를 슬쩍 내밀다가 여론의 지탄에 급히 뒤로 물러서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니는 어떻노? 문학 친구가 묻는다. 글쎄, 공개적인 반성과 용서를 구하면 나는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아...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돌이키는 전인적 변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 (Repentance)에 이르는 반성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럴 용기와 참회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 주길 희망한다.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라 묻어두었는데 상처를 지닌 화살에 관한 이야기에 용기를 얻어 글을 쓰게 되었다. 나의 이런 이해가 수준이 낮은 일차원적 일 수 있겠다.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조심스레 남기는 생각일 뿐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는가?



안병용 peterahn17@naver.com 수수밭길 동인지 7호 8호, 9호, 10호 참여 _어지러운 세상사 가운데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갖고 잘 살아갈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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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전씨 중앙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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