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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공유방

몇 편의 시

작성자가인 송세헌|작성시간13.02.18|조회수14 목록 댓글 0

멸치의 표정 -길상호(1973~ )

냉동실을 여는 순간
봉인된 채 몸이 굳은 한 무리의 시체들,

내가 보아온 사람들의 어떤 죽음보다
더 아픈 얼굴로 무장한 멸치들,

염이라도 해줘야 풀릴 것 같은
표정을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눈두덩보다 튀어나온 눈들이 모두 하얗다
시력을 잃고서야 비로소 어둠이 걷힌 눈,

저 눈이 바라보는 건
과거일까 미래일까

펄펄 끓는 가마솥을 마지막으로
저승으로 헤엄쳐 도망갔으니 너의 생은

뜨거웠을까 차가웠을까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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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멸치의 눈을 들여다보았는지? 그 눈이 들여다보는 것을 함께 들여다보았는지?

당신의 생을 거기 대입시킬 수 있었는지? 그것의 답은 무엇이었는지?

한 마리의 멸치가 안고 있는 시의 언어 속에 당신을 잠시 대입해 보자.

거기 답안지엔 정답이 쓰여 있을지 모른다. 삶은 ‘펄펄 끓는 가마솥’처럼 뜨거웠으나,

항상 뜨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삶은 ‘저승’처럼 차가울 것이나 항상 차갑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은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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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노래 - 나기철 (1953 ~ )


그래,
너 좋을 대로

좋은 사람
잘난 사람
다 만나고

나 같은 놈일랑
한 삼사십 년쯤 후
내가 푹, 쭈그러지면

그때라도
만나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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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서양 시인 예이츠가 그랬었지.

한 여자를 깊이 사랑했었는데,

그 여자 떠나가자, 다시 그 딸에게 결혼 신청을 했었지.

어찌 그랬을까.

하긴 이 시의 만남의 주인공이 꼭 인간의 사랑이어야 할 리는 없으리라.

다른 그 무엇, 인생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그 무엇,

그러나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잠 못 들게 하는 것,

그런 어떤 것이어도 좋으리라…. 이것이 시를 읽게 하는 은유의 힘이다.

희망의 힘, 기다림의 힘. <강은교·시인>

 

 

달 - 박목월(1916 ~ 78)

배꽃가지
반 쯤 가리고
달이 가네.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불국사(佛國寺) 터를 잡은
그 언저리로

배꽃가지
반 쯤 가리고
달이 가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아름다운 시다. 아주 예쁜 언어의 스케치이면서도 여기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배꽃 가지 사이로 얼굴을 가리고 지나간다. 그것은 ‘경주군 내동면 불국사 근처’라는 ‘장소’가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단단히 자리함으로써 자칫 음풍농월이기 쉬운 이 언어의 스케치를 아주 현실감 있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었다.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죽은 시인이다”라고. 이 빛나는 시적 표현을 박목월에게 적용시키면 어떨까. 오늘 아침 그의 수묵화 같은 시는 현실감을 준다. 아름다운 스케치의 소품 속에서도 불국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출렁출렁거리는 것 같다. 그러면 네루다의 어법을 빌려 다시 한번 말하자. ‘그는 결코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리얼리스트이다’라고. <강은교·시인>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 이승희 (1965 ~ )

얼마나 배고픈지,

볼이 움푹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밤새 달그락 달그락대는 달

밥 먹듯이 이력서를 쓰는

시절에

+++++++++++++++++++++++++++++++++++++++++++++++++++++++++++++
밤새워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쓰는,

고단한 이 땅의 젊은이들의 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지난밤, 늦은 귀갓길에 그 젊은이는

아마 달을 쳐다보며 걸었을 것이다.

그때 달은 ‘볼이 움푹 파여 있는,

심연을 알 수 없는 밥그릇 같은 모습’으로 ‘달그락 달그락대고’

있었을 것이다.

사물을 또는 상황을 그 어떤 시각에서든지 바라봄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라는 언어예술. 그러기에 시는 어디에나 있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강은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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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꽃 / 정호승(1950∼ )

강물 위에 퍼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 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강물의 물결이

물의 장미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

+++++++++++++++++++++++++++++++++++++++++++++++++++++++++++++++++++

 

이 시인의 상상력은 무정형의 물에 형태를 부여해 온갖 꽃으로 피어나게 한다.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피워내는 꽃들일 것이다.

물은 계곡과 들판, 도시에서 바다로 흘러가면서 무수한 형상의 꽃들로 태어난다.

 

물꽃을 피우는 시인은 무에서 유를 불러오는 마술사가 아니라,

천성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이리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던

물은 마침내 안타까운 사람의 눈물로 낙화한다.

영롱하게 맺혔다 떨어지는 물꽃이라면 낙화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김명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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