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컨트리 보이의 자존심
고만고만한 꼬마 네 명이 망까기나 함직한 크기의 마당에 모여 있다. 허기진 배를 두드리며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갈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이르다. 여름 태양이 한참을 달궈 놓은 탓에 마당의 지열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꼬마들의 호기심과 승부욕 가득한 눈망울은 더위를 잊은 채 굴러가고 있었다.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잘 구르던 눈망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멈춰 섰다. 한 꼬마가 하늘을 잠시 우러러보더니 갸우뚱거리며 결국 고개를 숙인다. 그의 실망 어린 얼굴을 마주한 곳에서 찰나의 순간 엷은 미소가 입가에 머물다간 꼬마 녀석이 묵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다.
“다음!”
짧지만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마당 한쪽 벽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른 꼬마가 개구진 표정으로 패잔병이 머물다간 자리를 호기롭게 꿰찬다.
꼬마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공을 쥐락펴락하며 축적해온 저마다의 자존심이 서투르게 버무려진 전투가 이어지고 역사는 반복된다.
“다음!”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 개울가에서 놀고 있으면 영락없이 토박이 소리를 들음직한 꼬마의 승전보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뚝섬의 후텁지근한 여름날 공기에 섞여 마음 한 구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 근본 없는 고삐리
딱 봐도 모범생이다. 그다지 말도 없다.
컨트리 보이는 그 모범생이 꽤 어려운 친구로 보였다. 게다가 모범생은 반장이다. 컨트리 보이는 감투에 ‘부’자가 하나 더 붙어있다. 학급 일에 관해선 공유할 이야기들이 있으나 사적으로는 서로의 거리가 서울과 부산이다.
학기 초 어느 날. 서울과 부산 사이에 KTX가 놓일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반장과 컨트리 보이는 탁구 이야기로 서로의 심리적 거리를 줄여 놓았다. 확인만이 남은 게다. 확인!
확인하기 전까지 서로에 대한 기대감은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가 줄 선물을 기다리던 기대감에 견줄 만하다.
조율이 끝나고 패를 까야 하는 날이 왔다. 반장과 컨트리 보이 외에는 모두가 관심 없는 단 둘만의 거사였다.
“탁! 또르르... 탁탁! 통통통통... 타악~ 탁! 탁!”
둘은 몰입하여 계속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탁! 탁! 틱. 또르르르. 부웅~ 빡! 타악.”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는지 컨트리 보이는 마음속으론 경청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아, 저런 안정된 자세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닐 텐데....'
근본 없는 컨트리 보이는 반장의 정석과도 같은 간결하고 선이 굵은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상당 기간은 승패를 뒤집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불길하고도 확실한 예감은 한 두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2년 넘게 줄곧 들어맞았다. 근본 없는 고삐리에게 꽤 오랜 기간 시련은 지속 되었으나 컨트리 보이의 두근거림을 멈출 만큼 잔인하고 어두운 역사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한 추운 겨울의 끝에 봄은 올 테니까.
# 아미가 되어 날개를 달다
어느 해 덥디덥던 여름날. 근본 없던 고삐리는 고삐리 딱지를 뗀 몇 년 뒤 논산을 거쳐 경산시까지 가서 주특기 교육을 받았다. 운이 좋았는지 자대배치를 받고 나선 과천까지 한숨에 올라왔다.
각 잡고 지내야 했던 로봇 이등병 시절 계절상으로는 늦가을쯤인데 때아닌 봄기운이 찾아 왔다.
“너... 너, 이 쉐끼. 너, 탁구 좀 치나? 응? 좀 쳐 봤다고? 너... 너, 이 쒜끼. 거짓말이면 너..이 쒜끼.. 군장 싼다.”
행정반에서 항상 얼굴 마주하고 지내야 했던 직속 상관이 늘 그렇듯 주의 깊게 들어도 알 듯 말 듯 더듬거리는 어투로 순식간에 로봇에게 쏟아 붇는다. 그의 말에 대한 해독률이 90%에 다다르던 로봇 이등병은 일단은 덥석 물고 본다.
“네, 제가 사회에서 라켓은 몇 번 잡아봤지 말입니다.”
“너... 너, 그럼 이따.. 이 쉐끼... 이따 탁구장으로 와. 너, 아주 이 쉐끼 죽어... 죽었어. 아주 오늘. 이 쒜끼. 죽어... 죽었어. 거짓말 하면 아주... 너 유격 간다. 이 쒜끼...”
이등병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없다. 못 먹어도 고다.
“네, 알겠습니다. 이따 탁구장으로 가겠습니다.”
말이 탁구장이지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허름한 휴게소에 탁구대 하나 덜렁 놓고 맨 땅에서 군화 신고 쳐야 하는 전투 탁구장이다.
그날 일과를 마친 이후 청소 시간.
직속 상관은 로봇 이등병의 후임병으로 강등되었다. 적어도 탁구에 있어서는 말이다. 로봇 이등병은 매일 일과 끝나고 남들 청소할 시간에 직속 상관에게 불려가서 탁구를 쳐야만 했다. 치고 싶지 않아도 쳐야만 했다. 하지만 한참 부려먹을 수 있는 이등병 인력 손실분에 대해 선임들은 어느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성질이 고약하기도 하고 화나서 쏘아 대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단숨에 늘어놓는 그 무시무시한 직속 상관을 로봇 이등병이 적어도 20분 동안은 붙들어 두니 말이다. 근본 없는 고삐리는 그렇게 아미(army)가 되어 날개를 달았다.
# 신앙심에서 시기심으로
군 생활에 전념하던 로봇 이등병도 어느덧 완벽한 인간계에 진입하여 상병의 계급장을 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잡았다. 적어도 과천의 그 부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란 것은 원하는 때에 외박 카드를 쓸 수 있는 힘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출석하던 교회의 탁구대회 소식을 접한 상병은 토요일에 열리는 대회에 맞춰 외박을 나갔다. 과천에서 잠실까지 한걸음에 다다른다.
상병은 복식에서 목회자 팀을 이기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군대에서 직속 상관과 보낸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러나 단식 결승에서 통통한 체구의 젊은 목사님께 지고 말았다. 이 무슨 변고인가. 갑자기 근본 없는 고삐리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었다. 소위 구력 대 구력의 싸움에서 좀 더 노련한 구력의 승리였다.
목회자는 대부분 탁구에 은사가 있다. 신학대 학생으로 다양한 운동을 접하기 쉽지 않은 시기에 딱히 탁구만큼 접근이 쉬운 운동이 없다는 이유가 아마도 목회자들의 탁구 실력을 설명하는 데 한몫할 게다. 예비 목회자가 당구장에서 맛세이(찍어치기, 참고로 다마수 300부터 가능한 고급 기술) 찍고 있는 모습보다 푸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근사한 서브에 멋진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모습이 좀 더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탁구에 있어서는 신앙심보다 목회자에 대한 시기심이 더 크다 해도 이단은 아니지 않겠는가?
고만고만한 꼬마 네 명이 망까기나 함직한 크기의 마당에 모여 있다. 허기진 배를 두드리며 어슬렁어슬렁 집으로 돌아갈 저녁 시간까지는 아직 이르다. 여름 태양이 한참을 달궈 놓은 탓에 마당의 지열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꼬마들의 호기심과 승부욕 가득한 눈망울은 더위를 잊은 채 굴러가고 있었다.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까? 잘 구르던 눈망울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시에 멈춰 섰다. 한 꼬마가 하늘을 잠시 우러러보더니 갸우뚱거리며 결국 고개를 숙인다. 그의 실망 어린 얼굴을 마주한 곳에서 찰나의 순간 엷은 미소가 입가에 머물다간 꼬마 녀석이 묵직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다.
“다음!”
짧지만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마당 한쪽 벽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른 꼬마가 개구진 표정으로 패잔병이 머물다간 자리를 호기롭게 꿰찬다.
꼬마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공을 쥐락펴락하며 축적해온 저마다의 자존심이 서투르게 버무려진 전투가 이어지고 역사는 반복된다.
“다음!”
한적하고 고요한 시골 개울가에서 놀고 있으면 영락없이 토박이 소리를 들음직한 꼬마의 승전보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뚝섬의 후텁지근한 여름날 공기에 섞여 마음 한 구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 근본 없는 고삐리
딱 봐도 모범생이다. 그다지 말도 없다.
컨트리 보이는 그 모범생이 꽤 어려운 친구로 보였다. 게다가 모범생은 반장이다. 컨트리 보이는 감투에 ‘부’자가 하나 더 붙어있다. 학급 일에 관해선 공유할 이야기들이 있으나 사적으로는 서로의 거리가 서울과 부산이다.
학기 초 어느 날. 서울과 부산 사이에 KTX가 놓일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반장과 컨트리 보이는 탁구 이야기로 서로의 심리적 거리를 줄여 놓았다. 확인만이 남은 게다. 확인!
확인하기 전까지 서로에 대한 기대감은 어린 시절 산타할아버지가 줄 선물을 기다리던 기대감에 견줄 만하다.
조율이 끝나고 패를 까야 하는 날이 왔다. 반장과 컨트리 보이 외에는 모두가 관심 없는 단 둘만의 거사였다.
“탁! 또르르... 탁탁! 통통통통... 타악~ 탁! 탁!”
둘은 몰입하여 계속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탁! 탁! 틱. 또르르르. 부웅~ 빡! 타악.”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는지 컨트리 보이는 마음속으론 경청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아, 저런 안정된 자세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닐 텐데....'
근본 없는 컨트리 보이는 반장의 정석과도 같은 간결하고 선이 굵은 움직임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상당 기간은 승패를 뒤집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 불길하고도 확실한 예감은 한 두 번의 예외를 제외하곤 2년 넘게 줄곧 들어맞았다. 근본 없는 고삐리에게 꽤 오랜 기간 시련은 지속 되었으나 컨트리 보이의 두근거림을 멈출 만큼 잔인하고 어두운 역사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한 추운 겨울의 끝에 봄은 올 테니까.
# 아미가 되어 날개를 달다
어느 해 덥디덥던 여름날. 근본 없던 고삐리는 고삐리 딱지를 뗀 몇 년 뒤 논산을 거쳐 경산시까지 가서 주특기 교육을 받았다. 운이 좋았는지 자대배치를 받고 나선 과천까지 한숨에 올라왔다.
각 잡고 지내야 했던 로봇 이등병 시절 계절상으로는 늦가을쯤인데 때아닌 봄기운이 찾아 왔다.
“너... 너, 이 쉐끼. 너, 탁구 좀 치나? 응? 좀 쳐 봤다고? 너... 너, 이 쒜끼. 거짓말이면 너..이 쒜끼.. 군장 싼다.”
행정반에서 항상 얼굴 마주하고 지내야 했던 직속 상관이 늘 그렇듯 주의 깊게 들어도 알 듯 말 듯 더듬거리는 어투로 순식간에 로봇에게 쏟아 붇는다. 그의 말에 대한 해독률이 90%에 다다르던 로봇 이등병은 일단은 덥석 물고 본다.
“네, 제가 사회에서 라켓은 몇 번 잡아봤지 말입니다.”
“너... 너, 그럼 이따.. 이 쉐끼... 이따 탁구장으로 와. 너, 아주 이 쉐끼 죽어... 죽었어. 아주 오늘. 이 쒜끼. 죽어... 죽었어. 거짓말 하면 아주... 너 유격 간다. 이 쒜끼...”
이등병에게 더 이상의 시련은 없다. 못 먹어도 고다.
“네, 알겠습니다. 이따 탁구장으로 가겠습니다.”
말이 탁구장이지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허름한 휴게소에 탁구대 하나 덜렁 놓고 맨 땅에서 군화 신고 쳐야 하는 전투 탁구장이다.
그날 일과를 마친 이후 청소 시간.
직속 상관은 로봇 이등병의 후임병으로 강등되었다. 적어도 탁구에 있어서는 말이다. 로봇 이등병은 매일 일과 끝나고 남들 청소할 시간에 직속 상관에게 불려가서 탁구를 쳐야만 했다. 치고 싶지 않아도 쳐야만 했다. 하지만 한참 부려먹을 수 있는 이등병 인력 손실분에 대해 선임들은 어느 하나 토를 달지 못했다. 성질이 고약하기도 하고 화나서 쏘아 대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단숨에 늘어놓는 그 무시무시한 직속 상관을 로봇 이등병이 적어도 20분 동안은 붙들어 두니 말이다. 근본 없는 고삐리는 그렇게 아미(army)가 되어 날개를 달았다.
# 신앙심에서 시기심으로
군 생활에 전념하던 로봇 이등병도 어느덧 완벽한 인간계에 진입하여 상병의 계급장을 달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잡았다. 적어도 과천의 그 부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이란 것은 원하는 때에 외박 카드를 쓸 수 있는 힘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회에서 출석하던 교회의 탁구대회 소식을 접한 상병은 토요일에 열리는 대회에 맞춰 외박을 나갔다. 과천에서 잠실까지 한걸음에 다다른다.
상병은 복식에서 목회자 팀을 이기고 승리의 개가를 불렀다. 군대에서 직속 상관과 보낸 시간이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그러나 단식 결승에서 통통한 체구의 젊은 목사님께 지고 말았다. 이 무슨 변고인가. 갑자기 근본 없는 고삐리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었다. 소위 구력 대 구력의 싸움에서 좀 더 노련한 구력의 승리였다.
목회자는 대부분 탁구에 은사가 있다. 신학대 학생으로 다양한 운동을 접하기 쉽지 않은 시기에 딱히 탁구만큼 접근이 쉬운 운동이 없다는 이유가 아마도 목회자들의 탁구 실력을 설명하는 데 한몫할 게다. 예비 목회자가 당구장에서 맛세이(찍어치기, 참고로 다마수 300부터 가능한 고급 기술) 찍고 있는 모습보다 푸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근사한 서브에 멋진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모습이 좀 더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탁구에 있어서는 신앙심보다 목회자에 대한 시기심이 더 크다 해도 이단은 아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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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열공 작성시간 17.12.15 도리곰 대작이구만
소설같은 아이템과 전개의
묘사도좋구 이거실화냐?ㅎㅇㅎ
탁구치는 곰의 구력도
28년과 맞먹어도될듯~~^^
하편기대해 보게쓰요
마감이얼마남지 않아세리~~ -
답댓글 작성자도리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12.15 제 기억에 의존했다는 것이 큰 결점입니다만 ㅎㅎ
실화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열공 작성시간 17.12.16 도리곰 실화인정ㅎㅇㅎ
-
작성자은하수 작성시간 17.12.16 드뎌 기대하고 고대하던 역작이네요
한편의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이에요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같아요
반듯하고 재치있고 깔끔하고... -
작성자도리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12.15 그냥 도리곰에게 이런 한 때가 있었구나 하고 봐주시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