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아름다움의 존재 근거
드물게 찾는 콘서트홀에서 연주곡보다는 지휘자에게 더 관심이 쏠렸었다. 지휘하는 사람의 몸놀림에 의지하여 음악 이해에 도움을받고 싶어서였지만, 안타깝게도 청중이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지휘자의 뒷모습뿐이었다. 지휘자는 청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주자들을위해서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늘 아쉬웠다.
언제부터인가 지휘자는 무대의 연주자들에게보다 오히려 청중에게 더 가까이 서 있다고 느껴질 만큼 콘서트 문화가 달라졌다. 영상매체 덕분이다. ‘오르페오’라는 고전음악 전문 채널을 우연히 발견한 이후부터 음악은 나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예술 장르가 되었다. 듣는 음악의 청중이 아니라 보는 음악의 관객이 된 것이다. 눈은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채워 준다. 지휘자의 뒷모습뿐만 아니라, 시시각각 변모하는 지휘자의 표정은 물론, 격정적 심장의 박동까지 느낄 수 있으니 귀보다 눈이 더 바쁘다. 지휘자는 작곡가를 해석하고, 나는 지휘자의 내면을 본다.
본시 피아노 연주자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카라얀은 얼마 안 가 “나의 두 손만으로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다.”며 지휘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지휘봉을 잡는 첫 순간 자신의 전 생애를 이 일에 바칠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마치 고향을 찾아온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타고난 천재 예술가의 출발은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자신 안에 잠재된 재능 중 최고의 것을 직업으로 갖게 되는 행운은 인간이라는 피조물로 태어난 우연성을 뛰어넘는 은총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에서 ‘정확한 해석’이란 없다. 지휘자는 작곡가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휘자의 정신 안에 있는 예술 세계를 작곡가가 튕겨준 것뿐이라는 누군가의 말은 맞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무릎을 치는 것은 그들에게 무릎을 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들을 발견한 기쁨인 것이다. 표현하기 어려우면서도 음악가 카라얀의 지휘 모습에서 예술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철학적 분위기는 매양 느껴왔었다.
“4음계 안에 생명을 담아라.”
지휘자 카라얀이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던진 예술혼이었다. 얼핏 ‘연주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려니 생각했다. 카라얀의 지휘봉 밑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차피 자신들이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몰입했다고 입을 모았다. ‘생명을 담는’ 연주란 그런 것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카라얀 자신의 예술혼을 직접 육성으로 듣는 순간 ‘생명’의 의미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심오하게 다가왔다.
“수백 마리의 새떼가 공중에서 무리 지어 군무를 펼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주라는 무서운 독재자가 두려울 지경이다.”
그들의 집단에 지휘자가 있던가. 그들은 대기의 공간 사이사이에서 직관으로 빈자리를 감지한다. 생명과 생명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적 자연 질서다. 오케스트라의 화음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카라얀은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공간에서 공중의 새들이 펼치는 직관의 질서로 날개를 펼치는 그런 연주를 그는 원했을 것이다. 지휘자의 입에서 ‘옴네스’란 말이 나왔다.
‘모두 함께’라는 의미의 라틴어 옴네스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질서이며 아름다움이지만, 그것은 훈련에 의한 통합의 질서가 아니다. 에너지 넘치는 열정도 아니다. 공중을 나는 새들의 군무처럼 모두 함께 살아가는 우주적 신비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카라얀은 ‘옴네스,옴네스’를 주문(呪文)처럼 단원들에게 반복한다. 선지식의 선정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지휘 모습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상상해본다.
카라얀은 동양의 영적 세계와 일상 세계에서도 매우 친근했었다. 평소 요가로 심신을 수행하던 카라얀은 특히 눈을 감고 지휘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오케스트라에서 누가 탐욕스러운 소리를 내는지는 보통의 지휘자도 알아차릴 수 있다지만, 카라얀은 누가 심리적 열등감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지 감지할 수 있는 지휘자였다. ‘열등감은 생명의 적’이라며 연습 때 단원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충고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단지 단원 한 사람의 ‘생명에 반反하는’ 연주에 몹시 괴로워하는 지휘자의 표정이 보기에 민망스러울 만큼 진지했다. 연주자의 열등감과 탐욕이 오케스트라 전체의 생명을 그토록 훼손한다는 사실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옴네스는 그냥 함께가 아니라 다치지 않은 생명과 생명이 제 모습 그대로 구현하는 자연의 세계인 것이다.
육체와 정신이 서로 침해하지 않고 함께 생명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야말로 옴네스의 시작이자 축복일 터다. 하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의 유한성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다. 카라얀 또한 나이 들면서 육체의 건강이 “더 이상 내가 생각하던 내가 아니다.”라며 사그라드는 육체 속에서 정신의 생명을 지키느라 처연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이어갔다. 지휘대에 홀로 설 수 없어 안전 의자에 기대어 지휘할 때였다. 열아홉 살짜리 러시아 청년 피아니스트 키신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는 무대였다. 어린 키신이 터질 듯한 생명력으로 연주를 마치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지휘자 앞으로 달려가듯 팔에 안긴다. 기쁨의 미소와 뒤범벅이 된 카라얀의 고통스러운 얼굴에서 눈물이 보였다. 차이콥스키가 생전에 작곡으로 쏟아낸 생명의 위대함, 한창 피어오르는 키신의 ‘생명을 담은’ 연주에 카라얀은 눈물로 함께했다. 그 눈물의 의미를 필설로 옮기기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내가 본 카라얀의 지휘 중에서 가장 강한 생명을 느낀 무대는 그 후에 이어졌다. 세상을 뜨기 얼마 전 그는 비엔나 필하모닉에서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척추 통증 때문에 허리에 두른 두툼한 복대(腹帶)가 연미복 안에서 병색 짙은 그의 육체를 지탱하고 있었다. 고통과 겨루는 손놀림과 동작이 건강할 때와 같을 수 없었다. 그의 지휘봉은 그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동작의 범위를 넓히는 데에 사력을 다했다. 숙연한 슬픔이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다. 예술적 성공을 위한 공연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에 대한 성실한 빚 갚음의 투혼이었다. 육체를 정신에 헌신하는 한 예술가의 ‘숭고한’ 삶을 보았다.
숭고미는 ‘존재에 대한 인간의 경외감’을 의미한다.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잡고 있던 지휘봉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까지 생명에 헌신했던 카라얀의 마지막 지휘 모습이 내가 본 아름다움이었다. 인생의 유한함은 섭리가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예술을, 무한한 탐구를, 무한한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 시원적 부조리다. 카라얀이 고백한 노후의 사생관이다. 괴테가 옳았다며 “내가 다시 올는지 자연만이 알겠지만, 인생은 한 번이 아니다. 나는 분명히 다시 온다.” 자신의 환생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소망했다. 80년 넘는 생애를 창조적 삶에 온전하게 바친 괴테가 말년에 “자연이 내 생명을 지상에 더 이상 붙들어 줄 수 없다면 신은 나에게 또 다른 존재 양식을 마련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 것에 카라얀이 진심으로 동의해 준 것이다.
영생에 대한 믿음, 부활의 믿음이 왜 인간에게 구원이며 생명인지 스스로 터득할 시간이 누구에게나 오긴 오는가 보다. ‘오르페오’ 채널에 묻혀 살다시피 하는 요즘 나는 카라얀을 그리고 카라얀을 나보다 훨씬 더 좋아하던 사람을 그 속에서 함께 만나며 살고 있다. 그들이 서로 다른 삶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차원으로 표현한 존재에의 경외감은 인생의 유한성이 선사한 아름다움이었음을 알게 된다.
- 홍혜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