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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열정(冽井) / 박순철

작성자박종희|작성시간26.06.05|조회수26 목록 댓글 0

지난봄 문학기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다시 안동 도산서원으로 향했다. 일행의 걸음에 맞추느라 차마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우물, '열정(冽井)'의 물 한 모금이 내내 마음 한구석에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 다녀간 길이라 익숙할 법도 한데,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문구가 차창을 스치자, 마음은 이내 깃을 여미듯 숙연해졌다.

 

매표소 앞에서 요금을 치르려 카드를 꺼냈을 때였다. 직원은 내 얼굴을 슬쩍 살피더니 무심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표 안 사셔도 되니 그냥 들어가세요." 혜택이 반갑기보다, 공짜 표 한 장으로 증명된 덧없는 세월이 야속해 가슴 한편으로 서글픈 바람이 휑하니 지나갔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햇볕을 피해 나이 지긋한 소나무 그늘 밑으로 몸을 숨겼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긋한 솔향을 이정표 삼아 서원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우측에 자리한 네모난 석조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기다림 끝에 다시 마주한 우물, ‘열정(冽井)’이었다.

 

열정(冽井)이라니. 내가 아는 열정(熱情)은 무언가에 온 마음을 쏟아붓는 뜨거운 정성이 아니던가. 차가운 물을 품은 우물에 어찌 이토록 뜨거운 이름이 붙었을까 의아해하던 찰나, 곁에 놓인 설명문이 내 무지를 일깨웠다.

 

“열정이란, 마을이 떠나도 우물은 옮기지 못하며, 아무리 퍼내어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마음의 잔잔한 수면 위로 깊은 파문이 일었다. 사람이 떠나가도 제자리를 지키는 변치 않는 신의, 목마른 이라면 누구든 와서 축이고 가라는 넉넉한 품. 그 이름은 차가운 우물물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뜨거운 위로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길은 됨직한 깊은 곳에서 맑은 물방울이 보글보글 솟구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었지만, 물을 길어 올릴 두레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비록 마른 목을 적시지는 못했으나 마음은 이미 그 청량한 물을 들이켠 듯 서늘해졌다. 그 우물을 응시하는 찰나, 내 유년의 우물 하나가 기억의 심연에서 함께 솟아올랐다.

 

어린 시절, 마당에 우물을 품은 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그 집 여인네들의 고단한 일손도 우물 깊이만큼이나 수월했을 것이다. 초가삼간 우리 집엔 그런 호사가 있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새벽이슬이 가시기도 전에 마을 어귀 공동 우물로 향하셨다.

 

사립문을 나서면 낮은 돌담을 끼고 굽이진 고샅길이 이어졌고, 새벽바람은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감아쥐며 가벼운 춤을 추었다. 물동이를 이고 돌아오는 종종걸음 끝에 찰랑이는 물줄기가 어머니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물길을 막으려 연신 물동이를 훔쳐내던 그 손짓은 멀리서 보면 허공에 휘두르는 헛손질 같았으나, 사실 그것은 홀로 육 남매를 일궈낸 가장 단단한 생의 몸짓이었다.

 

여름 뙤약볕 아래 놀다 지쳐 돌아오면, 나는 부엌으로 달려가 엎드린 채 물동이에 얼굴을 묻었다. 대나무 바구니로 덮여 있던 그 서늘한 물은 단순한 갈증을 넘어, 유년의 허기와 서러움까지 말끔히 씻어주곤 했다. 밤이 깊으면 어머니는 부엌에 물이 넉넉히 남아있어도 기어이 새 물을 길어와 장독대에 정화수를 올리셨다. 어린 나는 그 정성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것이 군에 간 큰형님의 무사 귀환을 비는 지극한 모성(母性)이었음을 깨달았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장독대의 정화수 그릇이 얼어 터지는 불길한 일이 생겼다. 어머니는 그날 아침 내내 밥 대신 깊은 한숨만을 삼키셨다. 며칠 후, 훈련 중 큰 부상을 입어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는 형님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형님은 끝내 무사히 돌아왔으나, 그날의 상흔은 평생 형님의 삶을 조용히 잠식해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 아픈 아들을 끝까지 품으셨다.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깊은 한(恨)과 정성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사셨다.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곳이 아니었다. 마을의 온갖 사연과 정을 품어 안은 소통의 광장이었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하며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는 우물가를 타고 마을 구석구석으로 번져나갔다. 슬픔과 기쁨, 수치와 자랑이 모두 그 물줄기를 타고 흘렀다. 어쩌면 마을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사람보다 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도산서원의 열정(冽井) 앞에 서니, 이 우물 또한 같은 자리에 놓여 있음을 느낀다. 퇴계 선생 또한 번민이 깊은 날이면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맑은 물 한 바가지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흐려진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고, 세상의 부조리 앞에서도 선비의 도리를 지키고자 스스로를 경계했을 터다.

 

내가 가닿지 못한 시대를 살다 간 분이지만, 그 마음만은 우물물처럼 지금도 전해져 온다. 열정(冽井)은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결코 마르지 않는 마음이다. 뜨거운 정열은 한때 타오르다 재를 남기고 사라지지만, 맑고 차가운 정신은 고요히 스며들어 영원히 남는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정이 식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식지 않는 '뜨거움'이 아니라 마르지 않는 '깊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고요히 솟구치는 우물 앞에서 나직이 다짐해 본다. 언젠가 내가 떠나야 할 자리일지라도, 이 우물처럼 끝까지 머물러야 할 마음이 있다고. 훗날 누군가 목마른 영혼으로 내 삶의 곁을 지나갈 때, 주저 없이 내 마음 한 모금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열정(冽井)’. 그 이름을 입안에서 가만히 되뇌며 서원을 나선다. 오늘 내가 마신 것은 한 사발의 물이 아니라, 수백 년의 세월을 이겨낸 맑은 정신 한 모금이었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도 묵묵히 남아 목을 축여주는 저 우물처럼, 내 마음 한쪽에도 결코 마르지 않는 샘 하나 깊이 묻어두고 싶다.

 

만약 내 생의 끝자락에 남을 그 우물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나 역시 주저하지 않고 그 곁에 푯말을 세울 것이다. 맑고 차가운 위로가 쉼 없이 솟아나는 이름, ‘열정(冽井)’이라고.

(《좋은수필》 2026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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