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스텔라를 보면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며칠 전, 딸이 제과점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엄마를 생각하는 딸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빵 봉투를 김치냉장고 위에 올려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흘쯤 지나 문득 생각나 열어보니 빵 윗부분에 거뭇한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혹시 딸이 볼까 봐 몰래 쓰레기통에 넣으면서 손끝이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떨렸다. 딸애가 카스텔라 냄새를 기억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딸애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이사를 했는데 남편은 집들이를 한다며 직원들을 집에 데려와 고스톱판을 벌였다. 그날 이후 남편은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어김없이 직원들을 데리고 밤새 화투를 쳤다. ‘탁, 탁’ 한밤중에 화투짝이 부딪히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깰 때면 나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길모퉁이에 박힌 돌멩이처럼 어디엔가 콕 박혀 숨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집은 조용했다. 남편은 출근 시간에 맞춰 목욕탕에 간 건지, 방엔 아무도 없었다. 방문을 열자 지난 밤의 흔적을 말하듯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장자리가 삐쩍 마른 자장면 그릇 위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먹다 남은 소주병과 방바닥에는 맥주 얼룩이 번져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쓰레기를 치우다가 방 한쪽에 주저앉으니 눈물이 났다. 언제 왔는지 딸아이가 조용히 다가와 내 등을 토닥였다. 무슨 낌새를 챘는지 딸애는 등교할 때마다 “엄마, 오늘도 집에 있을 거지?”하고 물었다. 그 말엔 단순한 확인이 아니라 지친 엄마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불안정하고 지쳐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 작은 아이는 무얼 감지하고 있었던 걸까.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서는 부족했다. 내 입에서 ‘응’하는 대답이 나와야 그제야 안도한 듯 딸은 웃으며 학교로 향했다. 남편이 돈을 땄는지 탁자 위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돈을 땄으니 남편 기분이 좋아 아이들이나 나에게 언짢은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사흘이 멀다하고 고스톱친구들을 데려오는 바람에 이사 올 때 새로 바른 벽지는 몇 달도 안 되어 담배 연기에 쩔어 누렇게 변했다. 한번 베인 냄새는 창문을 열어도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나는 서점에 들러 여성잡지를 한 권 샀다. 부록으로 제빵 레시피가 함께 딸려있었다. 대부분 오븐이 있어야 가능한 조리법이었지만, 그중 오븐 없이도 만들 수 있는 카스텔라 레시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주방으로 가서 책에 적힌 대로 달걀 여섯 개를 흰자와 노른자로 나눠 거품을 내기 시작했다. 책에는 ‘팔이 아프다.’고 쓰여 있었다. ‘그릇을 거꾸로 들어도 거품이 흐르지 않을 때까지 저으세요.’ 라는 문구에 나는 팔이 후들거릴 때까지 저었다. 마침내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힘들게 만든 반죽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유리 뚜껑 안으로 아기 배처럼 동그랗고 빵빵한 반죽이 가득 부풀어 올랐다. 아이들은 진작부터 앞 접시를 들고 빵이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한껏 부풀었던 내 꿈같았던 빵이 ‘푸욱’하고 꺼져버렸다. 꼭 납작한 개떡같았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 결혼 생활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렇게 꺼져버린 건 아닐까. 그 무렵 나는 사흘이 멀다고 카스텔라를 만들었다. 슬픔이 감당되지 않을 때마다 나는 그렇게 팔이 아프도록 거품을 내고 마음의 빵을 구웠다. 남편이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간 다음 날이면 집안 가득 밴 냄새와 흔적을 지우듯 나는 묵묵히 거품을 내고 반죽을 구웠다. 처음에는 개떡처럼 애를 먹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제과점에서 파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카스텔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 친구가 놀러 왔을 때, 시댁이나 친정에 갈 때도 나는 카스텔라를 구워 가지고 갔다. 카스텔라를 구운날은 노란 오렌지빛 등불을 켜 놓았을 때처럼, 신기하게도 담배 연기에 찌들었던 집안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졌다. 내가 그려왔던 결혼 생활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아마도 카스텔라 냄새처럼 고소하고 달콤한 아주 소박한 꿈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남편 때문이었는지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 버린 화초를 볼 때면 꼭 내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 카스텔라를 구웠을 때 초등학생이던 딸이 마흔 중반이 되었고 서른 살이던 나는 어느새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카스텔라가 제 모습을 갖추듯 그 시절은 유독 어둡고 아프게 지나갔다. 괴산에서 청주로 이사를 온 뒤,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화투에서 손을 뗐고 나도 빵 만들기를 멈추었다. 이제 마흔네 살이 된 딸은 ‘엄마 하면 떠오르는 게 카스텔라’라며 가끔 만들어달라고 했지만 괴산을 떠나온 후 나는 한 번도 빵을 구운 적이 없다. “음식은 기억이다.”라는 말처럼 카스텔라를 떠올리면 고단하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떠나지 않으려고,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쓰던 그때의 내 모습이 되살아나며 마음이 아려온다. 하지만, 딸에게 카스텔라는 ‘엄마’였다는 것. 달콤하고 따뜻했던 유년의 한 페이지로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고 기쁘다. 어찌 보면 내게 음식은 곧 추억이고, 버티는 방식이었으며 내가 가족에게 주는 사랑이자 결혼 생활을 지탱해준 한 방법이었다. 재료를 썰고, 볶고, 끓이면서 내 안에 가득 쌓여 있던 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사그라지곤 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그 시절의 카스텔라는 내게 그런 음식이다. 쓸쓸하다고, 우울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던 내 젊은 서른의 카스텔라. 하지만 이제는 카스텔라를 만들지 않아도 적당히 행복하고 스스로 웃는 날이 많은 나이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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