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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보니까/장영희

작성자박종희|작성시간26.06.19|조회수38 목록 댓글 0

내가 살아보니까

 

장 영 희

 

오늘 아침 무심히 차에서 내리다가 문득 가을을 만났다언제 어디서 떨어졌는지 퇴색한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동그마니 내 차 지붕 위에 얹혀 있었다어느새 비껴 내리는 햇살은 한껏 부드러워졌고스치듯 지나가는 바람 냄새는 풋풋했으며흰 구름 몽실몽실 피어있는 하늘은 예사롭지 않게 푸르렀다새삼 정신을 차리고 유심히 둘러보니 이제는 나무 한 그루풀 한 포기마다 조금씩 소멸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아무런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마음이 이제는 차돌같이 굳어 아무런 틈새가 없는 줄 알았는데 웬걸문득 휑한 바람 한 줄기가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가을이구나.

나무와 풀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사랑이 치열했던 만큼 미련도 남고 아쉬움도 많으련만 이제 생명과의 이별을 저마다 다소곳하게 순명順命으로 준비하고 있었다온갖 시련에도 다시 추스르고 일어나 열매를 맺고마침내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준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면 나도 내 인생의 가을 문턱에 서 있다삶에 대한 애착이야 남겠지만 그래도 있는 날까지 있다가 내 시간이 오면 나무처럼 풀처럼 미련 을 버리고 아름답게 떠나고 싶은 마음은 있다.

어제 TV에서는 우리나라의 빈부 차이를 보여주는 특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병이 들어 직업도 못 얻고 혼자 속절없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단돈 100만원이 없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하는 빈민촌 사람그런가 하면 골프 연습장까지 갖추고 있다는 강남의 어느 주상복합 아파트는 한 채에 20억을 호가해도 매물이 없어서 못 판다고 했다.

명품 핸드백에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는 어느 젊은 여자와의 인터뷰도 있었다방에는 온갖 명품 핸드백이 색깔별모양별로 가득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에서 발행하는 명품에 관한 잡지를 구독해 가면서 새로 나온 디자인을 구입한다고 했다최하 50만 원짜리부터 500만원까지 하는 핸드백도 있었다왜 굳이 명품을 들고 다니느냐는 질문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걸 들고 다니면 사람들의 눈길이 느껴져요저를 쳐다보는.”

그 여자의 말에 나는 적이 놀랬다단지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느끼기 위해서 그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다니나는 목발을 짚고 다니는 덕에 누구나 다 쳐다보는지라 남의 시선이 별로 달갑지 않은데그 여자는 그 시선 때문에 불사한다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이 그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부러워서이고 나를 쳐다보는 것은 불쌍해서라고 하겠지만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우리 집 우산 하나가 살이 빠져 너덜거렸는데 그 우산이 다른 우산에 비해 컸기 때문에 어머니가 나를 업고 학교에 갈 때는 꼭 그걸 쓰셨다업혀 다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게다가 너덜거리는 우산까지그래서 비 오는 날은 학교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다온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그때 내가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녔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는 아마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찢어진 우산이든 멀쩡한 우산이든 비 오는 날에도 빼먹지 않고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 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내가 살아 보니까 정말이지 명품백을 들고 다니든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라는 것이다명품 핸드백에도 시시한 잡동사니가 가득 들었을 수 있고 비닐봉지에도 금덩어리가 담겨 있을 수 있다물론 이런 말을 해 봤자 사람들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궤변 말라고 욕이나 먹겠지만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살아보니 남들의 가치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다는 것이다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중요하지 않은 것을 위해 진짜 중요한 것을 희생하고내 인생을 잘게 조각내어 조금씩 도랑에 집어넣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겉모습즉 어떻게 생기고 어떤 옷을 입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고 할 때 코웃음을 쳤다자기들이 돈 없고 못생기고 능력이 없으니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만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 그렇다결국 중요한 것은 껍데기가 아니고 알맹이다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이다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TV에서 보거나 거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내 실속 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재미있게 공부해서 실력 쌓고진지하게 놀아서 경험 쌓고진정으로 남을 대해 덕을 쌓는 것이 결국 내 실속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주는 친절과 사랑은 밑지는 적이 없다내가 남의 말 듣고 월급 모아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한 것은 몽땅 다 망했지만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한 작은 선행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1분이 걸리고 그와 사귀는 것은 한 시간이 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하루가 걸리지만그를 잊어버리는 것은 일생이 걸린다는 말이 있다그러니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만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어차피 세월은 흐르고 지구에 중력이 존재하는 한 몸은 쭈글쭈글 늙어가고 살은 늘어지게 마련이다내가 죽고 난 후 장영희가 지상에 왔다 간 흔적은 별로 없을 것이다어차피 지구상의 65억 인구 중에 내가 태어났다 가는 것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덤일 뿐이다그러나 이왕 덤인 김에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덤이 아니라없어도 좋으나 있으니 더 좋은 덤이 되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입 아프게 말해도 이 모든 것은 절대로 말이나 글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진짜 몸으로 살아 내야 깨달을 수 있다그래서 먼 훗날내가 이 땅에서 사라진 어느 가을 날내 제자나 이 책의 독자 중 한 명이 나보다 조금 빨리 가슴에 휑한 바람 한 줄기를 느끼면서 내가 살아보니까 그때 장영희 말이 맞더라.”라고 말하면그거야말로 내가 덤으로 이 땅에 다녀간 작은 보람이 아닐까.

 

장영희(張英姬, 1952~2009)

영문학자수필가번역가소아마비 장애와 세 차례의 암 투병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따뜻한 글로 희망을 전하였다주요 작품으로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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