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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섬/ 박주희

작성자박종희|작성시간26.06.22|조회수21 목록 댓글 0
밤하늘의 별이다. 사람들의 오고 감이 뜸한 바다 가운데 홀로 떠 있다. 한 걸음도 쉬이 움직일 수 없는 처지다. 제자리를 지키며 그저 묵묵히 파도를 받아들일 뿐이다. 바위섬은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밀려오던 파도가 하얀 포말을 만들며 끝없이 멈춰선다.

솟아오른다. 밀물이 썰물로 돌아서고 바다 깊이 숨어있던 얼굴을 내민다. 깎일 듯이 가파른 절벽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면 위로 나타난 낭떠러지는 짙게 물들어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완전히 안온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듯. 바위섬은 파도가 머무는 바다에서 또 다른 시작을 알린다.

태생적으로 바다와 함께였던 바위섬. 이곳에 살지만, 속내를 다 알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잔잔함과 포근함이 전부는 아니다. 물결 위에 반짝이는 은빛의 물비늘도 일부일 뿐이다. 빛이 닿지 않는 밑바닥에는 또 어떤 바다가 숨죽이고 있을까. 한없이 넓고 깊은 이곳에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을까.

파도가 밀려온다. 맹수처럼 포효하며 아스라한 수평선 너머에서 줄기차게 달려온다. 바다 가운데 우뚝 선 바위섬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밀어붙인다. 정해진 방향도 없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커먼 속내를 드러낸다. 바위섬은 날 선 파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다. 아니 피하지 않는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람이 잦아들면 파도가 이내 사라진다는 것을. 또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다가선다는 것을. 멈출 줄 모르던 파도가 가라앉는다. 숨죽인 채 일렁이다 자취를 감춘다. 바다가 된다. 먹구름 아래 억센 비가 쏟아지듯 바다에서 파도는 마주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대학을 마치고 첫발을 디딘 세상. 그야말로 망망대해였다. 맨몸뚱이의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걸치지 않았다. 어깨를 기댈 수 있는 그 누군가도 없었다. 그때 눈앞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하나의 길이 있었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바위섬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 보였다. 멈춰서는 순간, 사나운 파도가 나를 갉아먹을 것 같은 불안감만 일었다. 무작정 발걸음을 내디뎠다.

불투명한 앞날에 빠듯한 형편. 교사임용시험을 준비하며 직장생활도 해야 했다. 고된 하루였다. 오는 잠을 줄여가며, 부족한 시간을 쪼개가며 많은 걸음을 채워갔다. 퇴근 후 도서관의 딱딱한 의자를 마다하지 않았고, 오롯이 공부에만 마음 쏟을 수 있는 주말은 가뭄 속 단비처럼 기꺼웠다. 하지만 내디딘 걸음만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돌아서면 제자리에 있는 듯한 모습을 지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난 매일같이 계속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지막한 파도에도 쉽게 허물어져 버리는 모래더미 말이다. 그저 모래성을 쌓다 보면 다행스럽게도 파도를 맞닥뜨리지 않는 해가 있으리라. 막연한 기대에 취해있었다. 왜 많은 시간 동안 내가 애써 쌓은 것은 고작 모래성이었을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그때 나에게 누군가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다면, 개의치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면. ‘만약’이라는 가정처럼 넉넉한 여건이 허락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파도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그 길의 끝에 당당히 설 수 있었을까.

헛된 셈이다. 그때 난 용기가 없었다. 그 길의 끝에 다다를 수 있을 거라는 올찬 기운 따위를 품고 있지 않았다. 교단에 선 나의 모습을 흐릿하게나마 그려보긴 했지만, 교사임용시험에 낙방하는 순간의 모진 파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끝내 직장생활의 끈을 놓지 못하고 스물이라는 숫자가 닳아 없어지는 동안 바다 한 귀퉁이에 움츠러들어 있었다.

바위섬은 파도를 긍정했다. 이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한없이 마주해야 하는 벗으로 여겼다. 오랜 시간 동안 파도에 당당히 맞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깎아내고 다듬어갔다. 굳세고 기운찬 사자바위, 지고지순한 처녀바위, 어둠을 밝히는 촛대바위 등. 수없이 많은 모습을 그렸다. 아무리 모자라고 내키지 않는 모습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 바다에 있는 그 어떤 바위섬인들 파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있을까.

바위섬은 자신이 존재하는 하루를 기쁨으로 여겼다. 젖은 몸은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과 가볍게 부는 바람이면 충분했다. 원래의 모습을 찾아간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물기는 사라지고 다시금 애초의 모습으로 살아난다.

나는 진정 무엇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바다의 빛이라도 되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삶의 목적지를 무던히도 그리며 애썼다. 결과에 치우쳐 생각해보면 내가 걸어온 시간은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보잘것없고 변변찮게 여겨진다.

파도가 밀려온다.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모래알이 하나씩 떠오른다. 인내, 끈기, 열정, 책임감…. 온 힘을 다하여 부단히 모래성을 쌓아갔던 그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낸다. 이십 대의 나의 꿈은 다가서는 파도에 쉬 주저앉았지만, 내면에 깊이 파고든 그때의 감각은 깨단해낼 수 있다.

이제 불혹을 넘어섰다. 거친 파도가 두렵더라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은 나의 몫이다. 바위섬처럼 넉넉한 품으로 힘찬 걸음을 내디뎌 본다. 용기를 끄집어낸다. ‘이것이 삶이라면, 그렇다면 다시 한번.’ 어스름한 길에 한 가닥이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위섬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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