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공자의 집/박순철

작성자박순철|작성시간26.06.09|조회수32 목록 댓글 0

 

보릿고개 넘기가 산중의 호랑이 마주치기보다 더 무서웠던 시절이 있었다. 내 기억 속의 초등학교 시절은 늘 그 아득한 허기에서 시작된다.

 

어린 마음에 차마 밥상머리에서 수저를 놓지 못하고 뭉그적거릴 때면, 어머니는 당신의 몫을 슬그머니 내 밥그릇에 덜어주시기 일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형님은 못마땅한 듯 "다 먹었으면 어서 일어나 나가지 못하느냐"며 서슬 퍼렇게 소리를 질렀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등 떠밀리듯 밥상을 물러나면, 정작 형님은 당신의 밥그릇을 내 앞으로 툭 밀어 던져놓고는 휭하니 밖으로 나가버리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철이 없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던 집안에서 형님은 어린 동생들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이자, 거역할 수 없는 법과 같은 존재였다. 특히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형님의 날 선 눈매와 절도 있는 언행은 우리 삼 형제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매서운 눈빛 속에 전쟁의 포화가 일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린 나는 알 턱이 없었다.

 

형님은 육이오 전쟁의 참화 속을 온몸으로 관통한 용사였다. 전쟁이 터지던 해 입대하여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었던 그는, 가장 치열했다는 백마고지 전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등 중사(현 하사) 계급장을 달고 열한 명 전우의 생사를 어깨에 짊어진 분대장. 총알이 빗발치고 보급품마저 끊겨 비상식량조차 바닥난 고지에서 북괴군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형님은 손에 쥔 실탄 없는 M1 소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코앞까지 기어 올라오는 적군을 마주하고도 고지를 사수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맨주먹을 휘둘러야 했던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의 머리카락을 더듬는 것이었다. 손바닥에 까칠하게 박박 깎은 머리가 잡히면 적군으로 간주해 대검을 내질렀고, 머리카락이 손등을 덮을 만큼 길면 아군이라 믿고 놓아주었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이 어찌 우리에게만 관대했겠는가.

 

찰나의 순간이었다. 엉덩이 끝으로 섬뜩한 기운이 스친다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적의 대검은 넓적다리를 깊숙이 관통한 뒤였다. 이어지는 차가운 개머리판의 충격. 형님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아비규환의 고지가 아닌 육군 병원이었다. 하지만 그 참혹했던 부상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군이 끝내 백마고지를 사수하여 조국의 품에 안겨주었으니, 형님의 몸에 새겨진 흉터는 곧 승리의 훈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훈장 없는 영광의 대가는 가혹했다. 제대 후에도 형님은 평생 전쟁의 후유증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요즈음 같으면 국가유공자 신청이라도 해보았겠지만, 당시는 제도도 미비했을뿐더러 시골 산골에서 그런 정보를 접하기란 가물에 콩 나듯 어려운 일이었다. 고된 농사일 끝에 비라도 내릴라치면, 형님은 다친 다리를 움켜쥐며 밤새 쑤시고 결리는 통증을 견뎌내야 했다.

 

결국 그 지독한 고통 때문이었을까. 형님은 마흔아홉이라는 못다 핀 나이에 서둘러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홀로 남겨질 형수와 어린 조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였다. 어느덧 형님이 떠나신 지도 마흔 해가 흘렀다. 품 안의 자식 같던 조카들은 장성하여 어엿한 일가를 이루었고, 홀로 집을 지키던 형수님마저 이제는 형님 곁으로 돌아가셨다.

 

세월이 흘러 6·25와 월남전 참전 용사들에게 국가유공자의 문호가 넓게 열렸지만, 이미 고인이 된 형님에게는 닿을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다행히 월남전에 참전했던 동생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슴 한구석이 못내 저릿해 온다.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신체검사에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었음에도 담당관은 나에게 2급 보충역 판정을 내렸다. 남들은 다행이라 했을지 모르나, 나는 지금도 그 판정을 온전히 수긍하기 어렵다. 군문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는 부채감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해묵은 아픔으로 남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가보훈처에서 미발굴 국가유공자를 찾아주고 있다는 뉴스가 귓가를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형님의 숭고한 참전 정신을 조카들에게, 아니 그 뒤를 이을 후손들에게 반드시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길처럼 일었다. 직장 일로 바쁜 조카를 대신해, 내가 직접 형님의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병무청에서 병적확인서를 발급받는 일이었다. 가족임을 증명하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담당 직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으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혹시 군번을 아느냐는 물음이 비수처럼 꽂혔다. 돌아가신 지 마흔 해, 형님의 생애 그 어디에도 군번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형수님이라도 살아계셨다면 유품이라도 뒤져보련만, 두 분 모두 고인이 되셨으니 이제 어디서 형님의 자취를 찾는단 말인가. 절망의 끝에서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주민등록원부였다. 나는 곧장 형님이 생전에 살았던 동사무소로 달려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원부 확인을 부탁하자, 창고 깊숙이 박혀 있던 먼지 쌓인 기록 더미를 들춰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낡고 케케묵은 종이 더미를 뒤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으나 동사무소 직원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성심껏 도와주어 무척이나 고마웠다.

 

마침내, 형님의 빛바랜 사진이 붙은 원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반가움보다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형님, 어찌 그리 고생만 하다가 이 좋은 세상을 못 보고 떠나셨습니까.' 사진 속 젊은 날의 형님을 바라보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오열을 억지로 삼키고 또 삼켰다.

 

그 어렵게 찾은 군번을 토대로 조회하자, 마침내 형님의 군 복무 기록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기록은 선명했으나, 안타깝게도 부상을 입고 육군 병원에 입원했던 세세한 행적까지는 찾을 수 없었다. 제적등본상의 생년월일과 입대 당시 기록된 날짜가 서로 달랐던 탓에 그토록 오랜 시간 조회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확인하고 바로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손에 넣은 병적확인서를 보훈지청에 제출했다. 며칠 후, 마침내 형님의 이름이 새겨진 국가유공자 증서 한 장을 받아 들었다. 누군가는 실질적인 혜택도 없는 종이 한 장이 무엇이 그리 중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이 증서는 형님이 흘린 피와 눈물에 대한 국가의 뒤늦은 응답이자, 먼 훗날 우리 자손들이 할아버지의 생애를 기억할 명예로운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전장을 누빈 형님과 동생을 자랑스럽게 여기듯, 그들 역시 조국을 위해 총칼을 들었던 용사의 후손임을 당당히 여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유공자 증서를 품에 안고 형님의 유택(幽宅)으로 달려갔다. 묘비 앞에 증서를 조심스레 세워두고, 참아왔던 목소리를 낮게 깔아 고했다.

 

“형님, 보십시오! 비록 형님은 떠나셨지만,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름도 없이 스러져갈 뻔 했던 그 날의 용기를 이 나라가 기억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기릴 것입니다. 이제는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소서.”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형님의 대답일까. 묘역을 감싼 공기가 오늘따라 유난히 따스하고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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