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무게.
장 태 순.
가정이란 가족 구성원들이 원만해야 행복하다.
아래 소개되는 가정은 보현보살이 인도환생했을지 모를 보은댁의 희생으로 유지되었다.
9월이 다 가는데도 날씨는 계절을 잊었는지 뜨거웠다.
2층의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데 막내가 이틀이나 보이지 않아, 큰형이 걱정이 되어, 2층으로 올라가 보일러 먼저 끄고, 문을 두들이며 이름을 한 동안 불러도 반응이 없자, 비상 열쇠로 문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확 풍겨 나왔다.
방안을 쳐다본 형이 기겁을 하고 뒤로 주저앉았다. 남편을 따라 마당에 나와 있던 보은댁 깜짝 놀라
"왜 그래요?"
소리 지르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가 방안을 쳐다보고는 기겁을 하고 남편의 손을 잡으며
"정신 차려요! 빨리 구급차 부릅시다!"
말하고 일으켜 세웠다. 반듯하게 누워 있는데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배가 너무 부풀어 올라 청바지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잠시 후, 구급차 소리가 나더니 건장한 대원 두 명이 올라오더니 방안을 보고는 이내 외면했다.
뒤 이어 경찰 두 명이 올라오고, 또 두 명의 사복형사가 따라 올라오면서
"모두 뒤로 물러가요! 감식반이 오기 전에 아무도 방에 들어가면 안 됩니다!" 통제했다.
"아니 방이 왜 이렇게 뜨겁습니까? 몸이 왜 이렇게 부풀어 올랐나요?"
남편은 아직도 떨며 대답이 없자 보은댁이 대답했다.
"여름에도 계속 보일러를 켜고 살았어요. 몸은 왜 그런지 모르고요."
잘못이 없는데도 말이 떨려 나왔다. 오는 사람마다 마스크를 해서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심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하얀 복장에 흰 장갑을 낀 세 명의 감식반원들은 방으로 들어가 세밀하게 조사를 했다.
"방이 너무 뜨거워 시신이 빨리 상한 것 같습니다."
조사가 끝날 무렵 가까운 병원 의사가 올라오면서 아는 체를 했다.
"사장님네 집이세요. 사망 진단서를 끊어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말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나와 곧바로 내려갔다.
연락을 받은 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 뛰어 올라오면서
"엄마! 어떻게 된 거야?" 하며 보은댁을 끌어안았다.
시신은 요동 없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조사가 끝났는지, 감식반원들이 시신을 흰 천으로 싸고, 비닐로 감은 다음 들것에 싣고, 내려가 골목을 빠져나가더니 '과학 수사반'이라고 쓰인 차 뒤에 들것을 밀어 넣었다. 자동차 여러 대가 고목길을 막고 있었다.
뒤에 따라간 식구들 앞에 형사 한 명이 오더니
"놀라셨겠지만 긴장 푸세요. 망자는 감식반에서 경찰서 가까운 00 장례식장으로 갈 것입니다. 가까운 친척이나 빨리 알리시고, 세 식구 병원에서 사망진단서 받아 가지고, 경찰서 수사과에 와서 간단한 조사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요!" 딸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절차니까, 불편하셔도 꼭 조사를 받고, 확인서가 나와야 장례 치를 수 있습니다."
차량이 모두 골목길을 빠져나가자 고요 속에 뜨거운 열기로 채워졌다.
평생 경찰서라고는 한 번도 안 가본 세 식구는 아무 잘못도 없이 떨렸다. 딸 차를 타고 병원에 들러 사망 진단서를 가지고 경찰서수사과에 출두했다. 형사 앞에 셋이 나란히 앉으니 죄인 같은 그림이 마냥 불편했다.
"해부를 원하십니까?" 형사의 말에
"왜 해부를 합니까? 안 합니다!"
남편이 깜짝 놀라 대답하자,
"그러면 해부는 안 하는 거로 하고, 혹시 동생이 생명 보험 같은 거 들은 일 있습니까?"
"평생 실업자가 무슨 보험을 듭니까?"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생명 보험에 들어 있다면 아주 세밀한 조사를 해야겠지만, 감식반에서 별다른 의문점이 없다고 하니,
자연사로 종결하겠습니다."
말하고는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요즘 세상에는 볼 수 없는, 나이 많은 시동생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면서, 갖은 수모
겪었던 일을 형사들에게 고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망나니한테 알려야겠지!"
남편이 말하더니 동생한테 전화를 했다.
"용천아, 용팔이가 죽었다."
"그 얘 죽었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하고는 뚝 끊어 버렸다.
세 시누들 한테도 금산댁이 알렸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는 것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거나 애통해한다.
안 그런 경우가 있다.
지금은 60대라면 한참이라고 하는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하면서 상대방 반응들이
"잘 죽었어!"였다. 사람의 가치가 죽음 앞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영안실은 조용했다. 6남매의 막내인 망자의 죽음을 애석해하지 않았으며, 아내도 없고, 소생도 없어, 눈물 흘려 울
사람도 없었다. 맏형만 까만 정장 입고 이따금 오는 손님의 조문을 받았다.
둘째네는 부부와 두 아들 내외, 단 한 사람도 장례 참석은커녕 조문도 안 왔다.
첫째 시누 내외, 홀로 된 아래 두 시누와 생질 사위 셋이서 열심히 도왔다.
보은댁은 네 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두 살 아래 남동생과 같이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 말할 수없이 고생을 했다.
부잣집으로 시집가면 고생 안 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중매쟁이 말을 철석 같이 믿고, 13살이나 많은 남편을 만났다.
시집은 인상이 험상궂고, 무뚝뚝 해 보이는 시부모와, 남편은 맏아들이었고, 출가한 손아래 시누이가 셋, 먼저 결혼한 아래 시동생과 막내가 있었는데, 막내도 두 살 위고 동서도 한 살 위다 보니 나이가 제일 어렸다.
맏며느리인데도 나이가 제일 어리다 보니, 명절이나 큰 일 있을 때,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시댁은 청과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크게 했다. 도시가 확장될 때라 장사가 잘되었다. 첫째와 둘째는 서울로 큰 트럭을 몰고 가 물건 조달을 하고, 시부모와 두 며느리도 손이 모자라 종업원까지 고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가정의 법도나 형제간에 우애가 전혀 없었다. 누구한테도 안 지려는 둘째와, 막내 역시 버릇없이 자라, 다툼이 잦았는데, 심할 때는 칼부림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겁에 질린 보은댁이 앞 가게 집에 숨는 일도 있었다.
남편도 서울로 물건 하러 트럭을 몰고 가, 트럭에 물건만 보내고, 이틀이나 귀가하지 않아, 둘째 시누 남편의 도움으로, 가락시장 근처 술집에서 찾아왔는데 집에 와서 소리도 못 내고 맞았다.
막내는 식구 아무도 없을 때, 트집을 잡고 빰을 때려 분을 못 참고, 가출해서 하루 지나 귀가했지만, 시어머니한테 차마 말 못 했다. 막내의 도를 넘는 생활은 끝내 시어머니의 결단으로,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 시켰으나, 죽는다고 협박해서 두 달 만에 귀가시켰다.
친정에 부모도 없고 남동생 밖에 없다고, 시댁 식구 모두 얕잡아 보고 마구 대한 것 같다.
남편이라도 살갑게 대해주면 좋으련만, 냉정하고 무뚝뚝해서 부부의 정이 없었다.
둘째네도 성품이 사나운 데다 바람까지 피워, 동서 역시 마음 고통이 끊일 날이 없었다.
오후 한가한 시간이면 시어머니는 절을 찾아가고 점집 왕래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며느리들을 동행해서 여자들끼리 우애가 좋았다. 보은댁은 동병상련의 정으로 동서를 살피고, 어디를 가든 동행해서 주위에서 자매로 착각하는 때도 있었다.
시어머니의 배려로 절을 자주 가던 보은댁은 조용한 분위기에 차츰 외로움을 달래는 피신처로 생각하게 되었다.
시아버지 사망 후 3년이 지날 때, 시어머니가 죽음을 예감했는지 망나니 막내가 걱정되어, 보은댁한테 비자금을 마련해 줬다.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둘째가 어떻게 알았는지, 형한테서 돈을 뺐으려고 행패를 부렸다. 술 먹고 밤에 대문을 두드려 열어 주면 멋대로 들어와 형을 겁박하기도 하고, 불러내어 외진 데로 가서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시어머니 생전 동서를 끔찍이 보살펴 줬을 뿐 아니라, 큰 조카한테 상회를 인계해 주고, 작은 조카도 많이 신경 썼지만, 둘째의 행패로 인연을 끊는 지경에 이르렀다. '갈수록 태산이라' 더니 보은댁은 둘째가 무서워 시장 갈 때 주위를 살피는 버릇까지 생겼다.
막내는 더 가관이었다. 부모님 생전이야 멋대로 살았어도, 혼자몸, 정신 차릴 만도 한데 안하무인이었다. 언제 들어오고 나갔는지도 모르고, 아무 때나 들어와 딤채와 냉장고 식품을 말 한디 없이, 내키는 대로 다 뒤져가고, 금요일이면 꼭 용돈을 챙겨갔다.
옛날 주먹으로 얼굴 맞은 생각 하면, 찬물 한 모금 주기도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이 2층에 상전으로 모시고, 갖은 고생을 했다. 바람피우고도 마구 때리고, 다정한 말 한마디 안 하던 남편 생각 하면, 도망가고 싶었던 일이 몇 번인지 모른다.
그래도 남편은 막내라고 챙겨줘야 좋아하고, 흉이라도 보면 싫어했다.
형이 무슨 말이라도 하면 험상궂은 표정을 해서 참고, 보은댁은 그냥 방관해 버렸다.
기댈 곳 없는 보은댁은 절을 자주 갔다. 스님의 설파에도 귀 기울였고, 찾는 절마다 대웅전 부처님 앞 공양함에도 개근을 했다. 전생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지고 태어나서 고생하며, 시집와서도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 하나 싶어 주위 사람들에게 열심히 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장 모서리에 한 두 가지 채소를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 물건 먼저 팔아주고, 대중탕에서 힘없는
할머니들 때 미리 봉사부터 열심히 무주상 보시 했다.
인적 자원이 없는 보은댁은 마음을 열고 평생을 기댈 수 있는 세 사람을 목표로, 공덕을 쌓자고 마음먹었다.
열심히 베풀다 보니 어떤 사람은 보현보살이 환생했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면 전생에 너무 죄를 많이 지어
인과응보로 고생하는 것 같아 업을 쌓아 환생하면 잘살지 않을까 싶어 노력한다고 대답했다.
다행인 것은, 시부모님 사망 후 남편이 완전히 변해, 보은댁 말을 한마디 반대 없이 수긍하는 일이다.
남편은 상회를 그만 두자 몸 여러 곳에서 고장 나, 무릎수술, 허리수술, 심장수술, 등 병원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은 아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전국 재래시장 탐방도 열심히 따라다니고, 깊은 산 사찰도 기꺼이 따라가,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합장했다.
외동딸은 조부모 사랑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와, 제 앞가림을 하면서, 부모를 미국 여행과 유럽 여행까지 다녀오게 했으니 다행이었다.
남편이 자주 아파 11살이나 아래인 막내보다 먼저 죽으면 어쩌나! 늘 염려했는데 걱정 한 가지는 없어졌다.
장례는 보은댁이 참석자는 후덕하게 대접해 주고, 마지막 가는 길 남편 마음에 불만 없이 진행했다.
삼우제, 49제는 물론, 위패도 큰 절, 큰 스님한테 부탁하기로 했다. 입이 천만 근인 남편이
"우리 집은 당신 아니었으면 옛날에 박살 났을 거야 정말 고마워!"
시집와서 처음 들어 보는 소리다.
ㅡ 끝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