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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안 묘와 어 머 니 이 야 기.

작성자장태순|작성시간24.12.06|조회수76 목록 댓글 3

                                                봉  안  묘         
                                                                   장          태           순  
 
    1년에 한 번 가을 시제에 별다른 사고가 없으면 어려서부터 출석해 왔다.
    옛날에는 제절에 두 줄로 서도 복잡했는데 이제는 겨우 10여 명 넘고 젊은이들이 적어 걱정이다.
    조상 숭모 사상이 퇴색해 가는 시대상황은 피해 갈 수 없으나 명맥 유지라도 바랄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몇 해전 일이다. 봉안묘를 추진한다는 종친회 통지문을 받고 의아했었다.
 납골당도 아니고 봉안묘라? 조상님들을 모두 화장해서 둘레 석안에  유골함을 모시고, 봉분을 만든다는 설명이었다.
 조상 산소가 세 곳으로 떨어져 있어 삼 일간이나 시제를 지냈다. 자손 중에 고향에는 네 집만 남아 있고, 모두 타지에서 생활하니
가을 시제가 번거로웠다. 개혁 성향의 종손은 하루로 단축해 지냈지만, 서울보다 먼 곳에서 세종시까지 찾아오는 후손들의
고충은 여전했다. 결국 한 곳으로 모시는 봉안묘를 추진했단다. 훗날 우리 세대가 간 다음에나 있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만 해도 조부와 백부가 평생 상투를 고집한 대단한 보수 집안이다. 
 선친은 둘째이면서 집안일 제쳐두고, 종친회 일을 도맡아 하시고, 중시조 종친회 일까지 관여하셨다. 
 유교사상이 철두철미한 선친 생전시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90세에 종손에게 종사일을 넘기고, 94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생각지도 않은 소식은 내 마음에 회오리바람으로 요동쳤다. 난감했다.
 어머니는 조상 산소 옆으로 절대 안 가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마음에 새겨 있기 때문이다. 오죽 시집살이가 심했으면
그럴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
 외조부께서 백마 타고 다니셨다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어머니는 고명딸이라 얼마나 귀여움을
받고 호사했을까! 열다섯 나이에 둘째인 아버지한테 시집왔다. 큰집과 이웃해서 살았기 때문에 층층시하, 고초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였을 것이다. 저승에까지 시집살이가 연장될까 봐 염려했나 보다.
 
  6,25 이듬해, 전쟁 후유증으로, 장티푸스가 전국 방방곡곡에 태풍처럼 몰아쳐서, 수십만 명이 죽었다고 했다.
 동네에서는 아침에 상여가 나가고, 오후에도 나가니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 집에도 방 두 칸에 식구가 모두 나란히 눕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제일 강하셨는지, 마지막에 누우셨다.
 어머니는 옆구리의 심한 통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형이나 누나들이 주물러 주려 해도 강하게 거부했다.
어린 내 몸무게가 적당했는지 한동안 밟아 주면 진정되었다. 밥 먹을 때나 잠잘 때, 시도 때도 없이 고통을 호소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졸음을 참아가며 밟고, 밟으며 어머니가 빨리 회복되기만을 고대했었다.
 전기가 없던 그때, 등잔불도 켜지 못한 칠흑 같이 어두운 밤, 어머니의 통증을 진정시키기 위해 잠을 못 잤다.
급하게 물을 찾을 때, 종지 물을 들고 얼굴을 더듬어 입에 넣는다는 것이 잘못해서 코로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리다.
 
 그해 봄, 마당 가 높이 솟은 살구나무에 꽃이 유난히 많이 피었었다. 봄바람에 살구꽃이 함박눈처럼 날리던 봄날, 나의
간절한 간호 보람도 없이, 어머니는 내 나이 여덟 살 때, 마흔 세 해의 고통스러운 짐을 내려놓았으나, 눈을 감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린 동생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주는 물론 호상꾼도 없이 꽃가마는 동구 밖을 빠져나갔다. 파랑, 빨강 구름 차일
너풀거리며 멀리 짙푸른 보리밭 언덕 경계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살구나무에 올라가 한없이 울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헌신적이고 고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
 어머니, 가만히 부르기만 해도 가슴에 피 울음이 맺히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후 아래 동생 둘은 며칠 간격으로 당숙이 하얀 보자기에 감싸 안고 밤에 사라졌다.
전염병이 전국적으로 수십만 영혼을 데려갔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이장해서 합장했다. 조상 산소와는 거리가 있어 마음 편히 쉬시라고 고했다. 
 산소는 옆에까지 도로가 포장되어 교통이 편리했다. 뒤로는 풍수지리상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헤아리지 못하지만,
울창한 소나무가 둘러 있어 우선 경치가 좋았다.
 나는 아내와 동행하며 산소 관리에 열심이었다. 이른 봄에는 잔디가 죽을까 봐, 솔잎, 가랑잎을 갈퀴로 긁어 주고, 잡초와 망초대
도 뽑아 줬다. 잘 번식하는 쑥과 산딸기도 제거해 주고 벌초도 제 때에 했다. 그 보람으로 활개와 봉분, 제단에 잔디가 아름답다.
 길 쪽에는 회양목을 심어 울타리로 삼고, 제단 양쪽에 측백나무를 심었다, 앞쪽에는 꽃잔디, 영산홍, 국화도 심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도 있으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고향을 잃었다. 부모님 산소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명절 때 성묘할
때 말고도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내 생전에 비단결 같은 잔디로 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해서,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려고 했다.
 생전에 고생만 하신 어머니, 또 이장할 생각을 하니 불효 막심이고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그렇게도 싫어한 조상님들과 같이
가시게 되었으니 이일을 어쩌란 말인가! 종친회 모두의 뜻인 것을 거역할 수도 없다.
 
 며칠 밤을 고뇌했다. 내게는 단순한 이장이 아니었다. 어머니를 두 번 여의는 심정이고 불효한다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웠다.
 내 마음의 고향, 아름다운 정원도 없어진다.
 갑론을박, 여러 분파별 다른 의견을 통일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절실하게 느꼈다.
 격론으로 작업이 연장되어 가까스로 윤달 마지막 날 천장제를 지낼 수 있었다.
 상위 13대조 봉분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산천을 뒤흔드는 굴삭기 소리에 나뭇잎들이 부르르 떤다.
 종사자들이 어느 정도 파고 삽과 호미로 위치를 찾았다.
돌 하나 섞이지 않은 포실한 황토 속에 시신은커녕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위치를 잘못 찾았나 싶어, 앞뒤 좌우로 넓게
확인했으나 허사였다. 경험 많은 종사자들 말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지점 흙을 추정해서 불로 소독한 다음 유골함에 넣는단다.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라는 사실을 보았다.
 내 절절한 사연으로 가슴 아파 하지만, 저 흙밖에 없는 수많은 산소를 정리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합리적인 묘안이다.
 국가적인 정책에 동참하고, 자손들은 한 곳에서 하루에 시제를 지낼 수 있어 좋다.
 훗날 사후에 봉안될 장소가 마련되어 있으니 신경 쓸 일도 없어졌다.
 모든 종친회에서도 심사숙고해서 적극적 추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ㅡ    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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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박경석 | 작성시간 24.12.06 환영합니다.
    좋은 글
  • 작성자장태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2.06 고맙습니다.
  • 작성자지나가던 나그네 | 작성시간 24.12.08 어릴 때 어머니를 여의신 마음이 담백하게 그려져 있어 더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졌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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