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람아
첩첩이 쌓였던 지난날의 애증
서럽게 잊어버리자
슬픈 추억
이별의 아픔
배신의 분노
크고작은 잘못과 부끄러움
모두 바람에 날려 버리자
잔잔한 수면에
바람무늬 넘실대듯
고뇌로 흔들렸던 시절
가슴속 파랑을 훨훨 털어
새로운 지향을 위하여
마음을 열자
앙금일랑
모두 바람에 실어 보내어
상큼한 추억만 가슴에 남기자
바람아
| 2 봄 초록빛은 꿈에서나 얼핏 본 나이팅게일의 웃음 빛은 아닐까 월드컵 광장을 메우던 붉은 악마의 힘찬 기상은 아닐까 매스게임 숨 막히게 묶여 있던 음악의 시그널 그 감동은 아닐까 첫사랑의 예쁜 소녀가 새끼손가락에 끼워주던 풀꽃반지 소롯이 빛나던 약속은 아닐까 숱한 나날 살아온 시간의 갈피를 하나하나 조용히 펼치고 보면 용케 살아 팔딱거리는 희망인지도 몰라 |
3 설악의 여명
부서져 내리는 별떨기처럼
나무잎 풀잎 끝에
찬 이슬 맺히고
깁 같이 여물며
그 옥색 주렴에
아스라이 투영된
산 그림자
산새들 날개쳐
하늘 땅 두루 섞어
선경(仙境)인데
흰 구름
우뚝 솟은 바위 휘어감아
산자락 돌아오니
아
찬란한 태양이 솟아
| 4 노고단 해돋이 감출수록 드러나는 보석임을 어쩌리 그 찬연한 빛 어찌 숨기리 차라리 얼굴 내밀고 나처럼 홀린 사람들 모두 눈멀게 하렴 억겁 살아온 나침반 다 제멋대로 방향 감각 잃고 마침내 나따라 재만 남게 하렴 5 불국사 천 년 신라의 정기 풍기는 울창한 솔밭 지나고서야 이끼 낀 돌층계 청운교 백운교 차곡차곡 쌓아 올린 아름 넘는 돌 장엄하여라 천오백 년 유유히 내려오며 갖은 풍상 겪을 때마다 의연하게 버티어 자리 지켰기에 오늘 더 돋보여 빛나네 예나 다름없는 바람 소리 새 소리 아우르며 지새는 신비 속 대웅전 기둥 하나 기와 하나에 조상의 숨결 서리고 긴 회랑 지난날의 영화 눈에 보일 듯 선명한데 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석가탑 다보탑 차라리 외롭게 보여 예술의 극치 뽐내며 남북으로 마주 보고 있지만 갈라진 조국의 슬픔인 양 탑과 탑 사이 왜 이다지도 멀리 보이는가 6 낙엽 지는 계절이 오면 나는 홀연히 떠나리라 차가운 이슬 입고 더 슬픈 찬연함으로 꽃피는 낙엽처럼 새싹 소롯이 유순한 그리움 자라 무성한 여름 만들며 꽃동산 꿈꾸던 추억 묻고 가지 끝에 남아 고즈너기 아픔 씹는 나의 마지막 잎이여 바람도 모르게 조용히 가야 하지 않는가 7 나목의 숨결 속에도 철 따라 나무마다 꽃과 열매 조금씩 다르듯 해마다 가슴에 돋는 생각도 달라 연둣빛 숨결도 달라 갈망으로 끓는 피 다 타버린 사랑의 부신 상처를 은혜롭게 치유하듯 소망 하나 잉태했거늘 이해에도 다시 찾아온 겨울날 가진 것 다 내어주고 서 있는 나목의 숨결 속에도 새봄 열매의 꿈 살아 있듯이 뜻밖의 은총 입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