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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영상 자료.

영상회고록 * 장군시절 - 제1군단 참모장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15.12.17|조회수5,780 목록 댓글 1

제1군단 참모장

  1975년 7월 24일~1976년2월 24일


6개월 간의 DMZ근무를 마감하고 서울 북방 방어를 책임 맡은 제1군단 참모장의 새 보직을 맡았다. 비교적 내 적성에 맞는 보직이었지만 이곳에서 일어난 천인공노 할 진종채, 이희성 두 영남패권의 8기생 장군과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단초가 되어 그후 하나회 정치군인의  견제와 횡포로 내 장군시절은 별 하나로 7년 반만에 끝난다.

사건의 전말은 한국디지털도서관 박경석의 서재 '박정희와 군부' 콘텐츠 가운데 [제1군단장 축출사건]에 기술했다.[박정희와 군부]는 대학교 교재 [박정희시대와 한국현대사-선인출판사] 170p~180p에 수록 되어 있다.(하단의 첨부 1. 참조)

이 글을 타자하는 동안 내 옷 둘째 버튼에 갑자기 혈흔이 생겼다. 아마 하늘도 이때 분노한 내 마음을 읽은 탓인지 모른다.

대장에까지 승진한 진종채(사망)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고 역시 대장에까지 영예를 누린 이희성은 음모끝에 1군단장으로 부임한 당사자이다. 그러나 하나회 정치군인에 영합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 영화를 누린 이희성도 전두환의 12.12 군사반란과 광주사태에 연관되어 재판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아 장군의 명예가 박탈되었다.역사의 준엄한 정의의 심판을 보는 경우라 하겠다.

 


나는 어떤 운명을 타고났는지 장군이 되어서도 야전에만 배치되었다. 땅굴개척특수임무부대장에다 보병제6사단 작전 부사단장.그리고 DMZ근무, 그러나 어떤 경우도 명령에 따라 불평없이 주어진 직책을 천직으로 알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된데에는 내가 영남출신 하나회원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배경도 없는 충청도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내 성격 탓도 있었다. 나는 부당한 권력에 영합할 수 없어 순탄한 불의의 길보다 험준한 정의의 길을 선택했다.

나의 불멸의 신조(信條)는 조국(祖國). 정의(正義). 진리(眞理)이다. 여하한 명분도 이 신조를 침범할 수 없다.

 


제1군단 참모장 시절, 진종채 이희성 두 8기생 장군에 의한 군단장 양봉직 장군축출 사건으로 내 의지에 따라 정의의 편을 들다 나의 군대생활은 비극으로 끝나지만 영광 스러운 한 때도 있었다.

이 사진은 건군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단급 기동훈련 통제관으로 박정희 대통령, 행정부 각료, 국회의장, 대법원장, 육해공군 수뇌들에게 기동훈련 전개과정을 부리핑 하며 유도하는 장면이다.기동훈련 부대 전개 직전 기동훈련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이 사진이 내 장군시절의 하이라이트인 것 같다.

북한군의 전면 남침을 가정하고 개성-문산-서울 축선에서 국군 5개 사단으로 방어후 공세이전으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기본 작전계획에 따라 현전선까지 북한군을 격멸, 회복하는 개념으로 군단 기동부대를 전개 시켰다.

 

 


대령에서 준장은 한 계급 차이다. 그러나 영관급 장교와 장군급 장교로 구분된다. 따라서 예우상 달라지는 것이 28가지나 된다.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합산하면 해답이 나온다.

현역을 마치고 군복을 벗은 뒤 죽을 때까지 그 차별은 지속된다. 가령 예비역 대령은 국립묘지에 화장되어 1평 짜리 묘지에 묻히지만 예비역 장군은 화장하지 않고 8평 짜리 묘지에 묻힌다. 나는 죽으면 8평 짜리 국립묘지에 묻히는 혜택을 입지만 그 제도의 부당함을 늘 주장한다.

장군이 구분되는 것 까지는 세계 각국 공통이지만 8배씩이나 되는 차이를 두는 국가는 없다. 따라서 나는 선진국 예를 좇아 묘지 차별을 극소화 할 것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장군도 화장해야 하고 약 2평 정도면 족하다. 물론 대통령의 묘지 규격도 선진국처럼 개선되어야 한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너무 크다.

당시 장군이 되면 제일 먼저 골프를 배우고 골프장 출입이 시작된다. 물론 지금은 위관장교도 골프장 출입을 하지만 그때는 귀족 스포츠였다. 장군들은 주말이면 일제히 골프장으로 향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골프 배우는 것조차 거부했다. 왜냐하면 시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였다. 나는 근무시간 외 나만의 학문에 정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직속 상관은 물론 많은 장군들로부터 눈총을 받았다. 그러나 그당시 다진 내 학문이 오늘의 문학과 군사학문의 골간이 되었음을 밝힌다.  

 

                      

           


이때만해도 자가용 승용차는 일반 시민들이 엄두도 못낼 때였다.장군 진급과 동시 면세 승용차를 구입하며 사복 현역 운전병이 배정된다. 또한 일일 20리터의 휘발유가 배급된다. 이 승용차는 공용이 아니고 가정에서 사용된다. 결국 장군 부인들이 사복 운전병을 거느리는 꼴이니 지금 생각하면 이만저만한 부조리가 아니다. 이 파격적 제도는 김영삼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폐지되었다.

위 승용차의 차종은 대우자동차의 1900cc 레코드 로얄. 1975년 당시는 최고급 국산(독일 오펠사 조립 생산) 승용차였다.

이 사진은 장군시절 마지막 사진이다. 나는 1981년 7월 31일 예편과 함께 승용차를 폐차시키고  2010년 현재, 전철과 도보로 생활화 하고 있다.

 


이 사진은 내 거실 벽에 붙여 놓은 31년 군대 생활에서 얻은 각급 훈장, 포장, 기장들이다. 나는 원로 장군들(주로 창군 멤버) 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훈장을 수훈한 장군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육사 동기생 330명은 물론 내 또래 모든 장교 가운데 내 수훈을 추월할 장교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훈장으로 말미암아 나는 늘 진급에 불이익을 당했다. 내 훈장이 정치군인들로부터 시기의 표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현역 장성시절: 이 사진에서의 표정에서 우수를 찾아 볼수 없다. 그러나 12.12 정치군인들의 노선을 거부하고 스스로 군복을 벗는 중대 결심을 해야 했던 비장한 시기의 사진이다.이후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전역 후의 삶


육군사관학교 동기생 330명 가운데 우리 둘은 '알파요 오메가'로 알려져 있다.왼쪽 정우봉 장군은 동기생 가운데 가장 연장자이고 나 박경석은 가장 연하자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다섯살 위의 정 장군은 동기생이지만 나로부터 형 대접을 받았다.

이사진은 안산 상록수 우성아파트 시절 내 아파트 거실에서 촬영한 것이다. 정 장군은 2015년 세상을 떠났다.

뒤의 족자는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친필 '大道無門' 휘호이다.나는 그로부터 정계 입문을 권유 받았지만 나는 작가의 길을 고수하기 위해 사양했다.우리 가문은 '정치 불개입'이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다.

나는 오랜 세월 독신생활을 해왔다, 이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현재도 변함이 없지만 이때도 나의 창작활동의 전성기였다.

특히 1959년 육군소령 시절 필명 韓史郞으로 정식 등단한바 있었으므로 모든 장르의 문단에서 환영해주었다.

나는 독신으로 살면서 새 아파트로만 다섯번을 옮겨 살았다.창작 환경의 변화가 내 창작 의욕을 복돋았음은 말할 나위 없다. 2009년 현재의 내 집필실은 서울 사대문 안 복판이다. 사직단, 경희궁, 경복궁, 광화문과 함께 호흡하면서 이어온 겨레의 얼과 조국의 빛나는 발전상을 문학으로 남기고 싶었다. 아마 내 마지막 집필실은 내 고향 세종시 또는 대전광역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 록:  대전광역시로 귀향, 새 시대를 열다.

                      2012년 6월 1일. 이후 대전에서 출간한 작품.

 

 


 


구국의 별 5성장군 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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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계룡대 지상군스티벌 전쟁문학 특강

2014년 10월 3일 오전

      전역 후 첫 모군 방문 - 후배 장군들이 환영차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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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경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7.04 2012년 6월 1일, 마침내 대전광역시 유성온천으로 귀향했다.
    나는 조치원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조상의 터전이 대전 대덕구이다. 선산도 회덕에 있다.
    유성자이아파트에서 10분 거리에 국립공원 계룡산 수통골이 있어 자주 건강관리를 위해 그곳을 찾는다.
    귀향 후 4년이 흐른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서 귀향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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