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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영상 자료.

[스크랩] 영상회고록 * 미 제2사단의 DMZ-GOP 인수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5.24|조회수22 목록 댓글 1

미 제2사단의  DMZ-GOP 인수

1971년 3월 3일~1972년 2월 6일-GOP. DMZ 전담

1970년 8월 8일~1972년 2월 6일-연대장 재직

                                1사단 12연대장


나는 1970년 8월 8일, 제1사단 12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첫 부임 당시 제1사단은 군단 예비로 후방(경기도 현리) 에 있었다. 나는 야전지휘관 답게 늘 접적지역을 좋아했으므로 스릴과 보람이 없는 후방 근무가 싫었다.

내 성향을 하늘이 알았던지 부임 7개월 만에 제1사단이 서울 북방 방위를 맡고있던 미 제2보병사단과 임무교대 명령을 받았다.

사단장 문홍구 장군이 DMZ작전과 GOP지역 담당에 어떻게 해야 할 지 크게 걱정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사단장에게 최전방지역인 DMZ를 비롯하여 GOP 담당 연대장 근무를 자청하였다. "1사단의 DMZ와 GOP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1사단 15연대 2대대장시 철원지역 GOP담당 대대장 근무 경험이 있습니다. 염려하지미십시요" 나의 자신에 넘치는 말에 사단장은  고마워하면서 나에게 GOP연대장 임무를 맡겼다. 나는 뜻을 이루어 영광스럽게 조국의 심장부를 지키는 첫 파수꾼이 되었다.

1971년 3월 3일부터 1972년 2월 6일까지 12연대가 담당한 DMZ 및 GOP는 단 한 건의 사고 없이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였다.

나는 이때의 근무를 월남전 맹호사단 제1진 在求大隊長에 이어 매우 명예롭게 생각 한다.



위 3급비밀(CONFIDENTIAL) 미군측 문서는 서울 북단 최전선 GOP지역 방어 책임을 미 제2보병사단 제4보병여단장 Bill Harry 대령이 한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장 박경석 대령에게 1971년 3월 3일 18시에 인계한다는 각서이다. 글씨가 선명하지 못해 아쉽다. 그러나 나의 녹색 글씨 서명 '박경석'은 선명하다. 나는 군 재직시에는 늘 녹색 잉크로 글을 썼다. 야전을 사랑했기에 초록색을 좋아했다.



한국일보 일면에 국군이 미군과 교대를 완료하여 서부전선 경계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왼쪽 상단의 사진은 수도 서울 최북단 DMZ내 GP 경계 초병으로부터 경계 상황을 보고 받고 있는 제1사단 GOP연대장 박경석 대령인 나.




우리나라 일간신문은 한국군 제1보병사단이 서울 북방 최전선을 미군으로부터 인수 담당하자 크게 보도하기 시작했다. 위 사진(좌측)은 제1사단 GOP연대장인 박경석 대령인 내가 서울 최북단 GOP연대 DMZ내 GP 경계진지에서 초병으로부터 경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는 장면이다.


 


도라산 연대 작전지휘소에서 미국 국방장관 일행에게 브리핑하는 연대장 박경석 대령인 나(뒷모습). 이날 브리핑을 위해 며칠 전부터 영문 시나리오를 작성 연습을 거듭한 끝에 내가 직접 영어로 브리핑 했다.

통상 외국인 VIP브리핑시에는 통역장교를 활용한다. 그러나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유창하지는 않아도 내가 직접 하는 편이 좋을 것으로 판단했다. 미군 장성들은 미국 Fort Benning 보병학교 동문관계이기에 더 설득력이 있었다.

브리핑 서두에 "본인 박경석 대령은 한국전쟁시 정규 육사생도 및 소총소대장으로 전투했고 미국 Fort Benning 보병학교 출신이라고 말하며 베트남전에는 맹호사단 제1진 보병대대장으로 참전 했다"고 하자 레어드 미 국방장관을 비롯해 미군 장성들이 일제히 탄성을 지르며 박수로 응답했다.


오른쪽부터 서종철 육군참모총장, 정래혁 국방장관, 레어드 미 국방장관, 태평양지구 미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뒷줄에는 미 1군단장을 비롯한 미군 장성 등 VIP 일행.




국회 의장단 일행에게 적정을 설명하고 있는 나 박경석 대령. 내 오른편 전투복 차림의 장군이 제1보병사단장 문홍구 소장이다. 훗날 이 분이 내 장군진급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휴전 이후 계속해서 미군 사단에 의해 서울 북방지역이 방어되었었다. 미군 사단과 한국군 사단이 이 주요지역에서 첫 교대를 한 다음, 국내외 공히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군을 못믿어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 사진은 내가 VIP들에게 부리핑을 마치고 철책선으로 안내(좌측 두번째)하자 유엔군사령관이 레어드 미 국방장관(중앙)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우측은 정래혁 국방장관이다.

나는 부리핑을 통하여 이들에게 자신만만한 의지를 피력했다. 한국군을 얕잡아보는듯한 이들에게 나의 독특한 화법으로 쐐기를 박아주었다. 


 


이 건물은 미 2사단 제4여단 본부였다. 방어지역과 함께 이 본부 건물도 인수 받았다. 왼쪽은 군인교회이고 이층 건물은 본부건물이다. 따라서 1971년 3월 3일 18.00시를 기해 보병제1사단 보병제12연대 본부가 되었다. 오른쪽 국기게양대에는 성조기 대신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이 사진은 인수 다음날인 3월 4일 08시에 촬영했다. 내가 군 복무하는 동안 이 건물이 가장 풍요로웠다.  




미군이 방어하던 지역을 인수한 나는 먼저 착수한 일이 DMZ 및 GOP 전 지역의 새로운 방어편성이었다.

나 육군대령 박경석은 1971년 3월 3일, 미 제2보병사단 제4보병여단 여단장 미 육군대령 Ball, Harry P 로부터 그날 18시를 기해 서울 북방 주요 방어지역을 인수했다. 월남전 맹호 제1진 재구대대장에 이어 나의 생애 두번째 중책을 맡은 것이다. 인수 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은 솔직히 엉성하게 방어편성을 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3년 전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 허점을 보였던 당시의 상황이 상기되었다. 내가 인수한 작전지역에서 김신조 일당 31명이 침투했었는데 미군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사진은 도라산 동북방 고랑포지역 DMZ내에 위치한 연대 수색중대 GP에서 수색중대장 박정상 대위(좌측), GP장(우측)과 진지편성 완료 보고를 받고 기념촬영.

우리가 인수한 이후 단 한 차례도 적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 공로로 보국훈장 3.1장을 받았다. 




당시 나의 직속상관인 제1사단장 문홍구 소장은 그후 정치군인들의 끈질긴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나의 장군진급을 적극 도와 성취시켰다.세차례 방해를 받고 네번째 장군이 되었다.

나는 대령시절 하나회 정치군인의 월권과 전횡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 그들 부당행위를 지적해 미움을 샀다. 그래서 철저히 보복을 당했다. 그러나 끝까지 나는 굴하지 않고 군인의 정도(正道)를 지켰다. 

내가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서울북방 방어지역을 새로 철통 같이 구축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나의 하급자였던 하나회 핵심 정치군인들이 속속 나의 상급자로 둔갑, 나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나의 분노는 이때부터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우리 육군은 이무렵부터 야전군인이 뒤쳐지기 시작하면서 정치군인이 득세. 마침내 하나회 수괴 전두환에 의한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지는 비극적 역사의 길에 들어섰다. 

한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서울북방 중요지역을 인수하자 국내외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미국 국무성, 국방성은 한국군의 서울북방 방어를 믿지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사진은 미국 레어드 국방장관 일행이 도라산 작전지휘소에서 연대장인 나로부터 부리핑을 받는 장면이다. 원래 지휘소(CP) 관측소(OP) 운영이 정상적이지만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지역이 넓고 DMZ 및 GOP지역의 재편성과 새 진지 구축 등 연대장의 밀접지휘를 위해 지휘소를 GOP지역으로 추진하여 연대장이 상주토록 특별히 작전지휘소(OCP-Operational Command Post)를 개설하였다. OCP개념은 당시 어느 나라에도 없는 것이기에 미국 국방장관 일행이 그 점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나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제1진 맹호 보병대대장으로 전투경험을 쌓았다고 밝히면서 작전지휘소 운영 내역을 설명하고 자신에 찬 나의 작전개념과 당당한 나의 소회를 피력하자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작전상황 부리핑에서의 박수 갈채는 이례적인 경우이다. 이날 미 국방장관은 태평양지구미군사령관과 주한 UN군사령관을 대동하였다.




한국군이 매우 안정적으로 서울 북방 방어 임무를 수행하자 각계 각층에서 도라산 작전지휘소를 방문했다.

이 사진은 주한 미국대사 부인을 비롯한 외교관 부인 일행에게 대대장의 부리핑 전 내가 인사의 말을 하는 장면이다.




바로 이곳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 공비 31명이 집단으로 침투한 지점이다. 미 제2사단이 배치되었던 시기에는 공비들이 안방 드나들듯 하였다. 심지어 침투훈련 북한공작조가 문산읍내 대포집까지 드나들었다는 간첩 진술까지 있을 정도였다. 제6011부대는 제12연대의 통상 명칭이다. 나는 GOP지역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곳으로 안내하여 나의 결의를 보여주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연대장인 나다.


 


육군대령 시절의 나.성균관대학교 ROTC단장(103학군단)근무를 마치고 전통과 명예에 빛나는 제1사단 12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특히 제1사단과 나는 인연이 깊다.이미 중령시절 작전참모.인사참모 그리고 보병대대장(파월 재구대대장 이전)을 역임했기 때문이다.나는 현혁 군인 시절 거의 야전지휘관으로 젊음을 보냈다.이 사진은 1사단 12연대장 보직 명령을 받은 후 연대장 근무지로 출발하기 직전인 성균관대학교 ROTC단장 시절의 나. 

ROTC단장은 2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임명한다. 채명신 장군이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자 제일 먼저 손댄 것이 ROTC단장 교체였다. 당시 전역을 앞둔 고참 대령을 새바람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월남전에서 공훈이 뛰어난 대령급으로 바꾼 것이다. 그게 화근이되어 채명신 장군을 제거한 세력들이 채명신의 직계세력이라며 그 후 인사 또는 진급에 불이익을 주게 되었다. 

당시 불이익을 당한 장군들은 양창식 준장, 한민석 준장, 백행걸 준장, 나 박경석 준장이었다. 그들은 경력과 무공 등에서 동기생 가운데 뛰어난 업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네 준장은 소장 진급에서 제외됨으로써 채명신 장군과 함께 불행의 길로 내몰려야 했다. 불행했던 육군의 이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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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박경석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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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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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5.24 영상회고록
    참으로 귀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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