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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영상 자료.

[스크랩] 영상회고록 * 국군의 날 전투시범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5.24|조회수20 목록 댓글 1

국군의 날 전투시범

 1사단 15연대 2대대장

    1962년 4월 6일~1963년 7월 14일

                                     1962년 10월 1일.경기도 성남시



육군소령시절. 중령 직위인 1야전군 보병대대장에 29세의 내가 발탁됐다. 1야전군사령부 작전처 작전기획계장 직에서 '소양강댐 건설과 야전군 전략에 미치는 영향' 을 입안해 발표, 소양강댐 건설이 확정되자 유공자로 추천돼 보국훈장 3.1장을 수훈하면서 영예를 입었다. 이어서 발탁의 기회는 다시 이어져 1962년 10월 1일 극군의 날, 1사단 15연대 2대대장으로서 국군 최초의 대대단위 보.전.포.공 시범 대대장으로 임명되어 경기도 성남시 야산에 전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대성공을 거두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 시범은 10월 1일 국군의 날을 기념하는 국군 사상 최대 전투 시범이였다.

나를 발탁해준 직속상관은 이병형 준장이었다. 1야전군 작전처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그의 명성이 전군에 떨칠 정도였다. 나는 천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기에 영관 시절을 빛낼 수 있었다. 1군 작전처장에서 1사단장으로 영전하면서 나만을 대동해 사단장으로 부임한 것만 보아도 그가 나를 얼마나 신임했는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맹호사단 제1진 재구대대장 이전에 이미 1사단에서 대대장근무를 마쳤다. 1962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건군사상 최대규모의 보전포공 전투 시범이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개최되었는데 나는 시범대대장으로 이 전투시범을 지휘하는 영광을 입었다. 이 현판은 시범부대로 향하는 길목에 설치되었다.

보.전.포.공 시범이란 보병의 공격을 전차 포병 공군 전폭기의 지원하에 실시되는 입체작전의 시범을 말한다. 이 시범에서는 내가 지휘하는 보병대대의 공격에 1개 전차중대. 1개 포병대대, 1개 공군 전폭기 편대가 지원 참가했다. 물론 이 시범에서는 실탄 및 포탄, 폭탄이 사용되어 실전을 방불케했다. 



국군의 날 기념 보전포공 전투시범 준비를 위해 예하 중대장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1사단 15연대 2대대장 박경석 소령(왼쪽). 나는 소령 계급으로 대대장 근무를 했다. 사단장 이병형 장군이 나를 무척 사랑해주며 신뢰했다. 다음해인 1963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는 서울시내 시가행진 대대장으로 대대를 지휘, 1사단을 대표했다. 



국군의 날 기념 보전포공 시범 참관을 위한 귀빈석. 중앙에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삼부 요인 및 각국 대사를 비롯한 VIP로 꽉 찼다. 일반 시민은 양쪽 구릉지대에서 10여 만명이 참관 하였다. 이 시범은 5.16쿠데타 직후 군의 위용을 국민에게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아무튼 건군사상 최대규모의 전투시범의 성공으로 나는 순탄하게 영관시절을 빛냈다. 이 시범의 성공으로 내가 훗날 맹호 제1진 보병대대장으로 선발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투시범 시작 전에 제1보병사단장 이병형 준장이 내빈에게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 보도진 뒤 구릉지대 점점이 보이는 것은 시범 참관을 위해 모여든 서울시민과 경기도 도민들이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일부 일간신문은 15만여 명으로 보도했지만 나는 10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소령시절 국가가 주관하는 큰 행사에 등장했으니 얼마나 멋진 군대생활인가. 나는 늘 축복받은 군인이었다. 대령 초엽까지는. 그후 정치군인들의 철저한 견제탓으로 목숨과도 같았던 육군을 떠나야 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맞는다.

나의 비극은 대령 4년차 첫 장군 진급 심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이 하나회 정치군인의 모사에 의해 장군진급심사 마지막 날에 그들의 추종세력인 김성배 대령과 바꿔치기되면서 첫 진급에 빠졌다. 그후 계속 전두환의 하나회의 견제가 이어져 2차, 3차, 4차까지 누락되는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만년 대령. 만년 준장 소리를 들으며 장장 16년간을 고통 속에서 헤쳐나가야 했다. 그 인고의 세월에서 무려 천 권 가까운 독서를 통해 차후에 대비하는데 정력을 쏟았다.

나의 31년 간 군 복무를 통해 전성기 즉 하이라이트를 지적하라면 바로 소령 중령 시절이라고 대답한다. 그 이후 만년 대령, 만년 준장 시절은 눈물, 분노, 인내, 탐구, 복수 등 절치부심(切齒腐心)의 연속극이었다.


아래 사진 -  전역 후 자료 사진 

전역 후.박경석 시비 '횃불이어라' 제막식 행사에서.

오른쪽 나 박경석 다음, 전역 후에도 나를 끝까지 사랑해 주신 이병형 장군. 다음이 풍운의 별 박정인 장군. 좌측이 육사동기생 박보희를 대신해 참석한 동생 박노희.

나는 국군 장성 가운데 채명신 장군과 함께 이병형 잔군을 가장 존경한다. 두 분은 일선이 아닌 2군사령관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다.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긴장케 했던 명성으로 4성 진급이 배제됐다. 이병형 장군의 현역 시절 독사진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매우 아쉽다.


통일공원 박경석 시비 횃불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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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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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5.24 귀한 자료
    무척 공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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