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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ANZAC DAY행사에 참가한 채명신 장군 일행이 KOKODA TRACK기념비에 헌화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2007년 4월 23일. 중앙 채명신 장군(일반 예복 차림) 좌측이 나 박경석(일반 예복 차림) 우측 박희모 장군(군 예복 차림) 뒤따르는 한광덕 장군과 신원배 장군 (군 예복 차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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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oda Track 기념비와 호주군 병사.모든 의식 진행이 특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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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ks town Sports Club 한.호 참전용사 우호 증진의밤 행사장에서 기념 촬영.우로부터 이윤화 호주 월남전참전 전우회장.박희모 장군.호주 참전자 대표.채명신 장군(흑색나비타이 예장). 호주 참전자 대표. 나 (빨간나비타이 예장).김동석 (예)대령.신원배 장군(해병).한광덕 장군.2007년 4월 23일.저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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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oda Track 행사장에서의 한국군 월남전 참전자 대표 일행, 좌로부터 신원배 (예)소장 (해병대 당시 청룡 제1진 소총소대장), 한광덕 (예)소장 (당시 맹호 제1진 중대 관측장교), 박경석 (예)준장 (당시 맹호 제1진 재구대대장) , 박희모 (예)중장 (당시 백마 보병대대장). 2007년 4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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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참전용사 우호증진의 밤,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기 직전의 귀빈석 전경.앞줄 좌로부터 신원배 장군, 한광덕 장군, 채명신 장군 내외분, 이윤화 주 호주 월남전참전전우회 회장, 재 시드니 총영사, 나 , 박희모 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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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에 입장 하기 전 대기실에서의 나. 오른쪽 자주빛 제복의 이윤화 재 호주 월남전참전전우회 회장 그리고 사복정장의 재 호주 6.25참전전우회 강영식 회장. 2007년 4월 23일. 저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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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ZAC DAY 마지막날 행사장인 시드니 도심 기념비 앞에서.좌로부터 채명신 장군(일반 예복 차림)과 나(일반 예복 차림). 뒤는 박희모 장군(군 예복 차림). 2007년 4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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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도심 시가행진 출발 전 기념촬영.우측에서부터 신원배 장군.나. 이윤화 재 호주 월남전참전전우회 회장.채명신 장군.한광덕 장군.전우 기수단.2007년 4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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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드니 도심 가도를 행진하는 한국군 참전자 대표.우로부터 강영식 6.25참전전우 회장. 나 .신원배 장군.박희모 장군. 한광덕 장군. 이윤화 월남전참전전우 회장. 2007년 4월 2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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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행사 마지막 날 두번째 행사시
폭우로 실내로 옮겨 행사를 치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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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4월25일.ANZAC DAY 새벽 4시 행사장에서 ANZAC 기념비에 헌화하는 나(일반 예복 차림) 우측 신원배 장군(군 예복 차림).좌측 한광덕 장군(군 예복 차림).이 새벽 행사에는 세 한국군 참전자 대표만 참가했다.사실상 이 행사가 ANZAC DAY 모태로서의 의미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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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한인 교회에서 채명신 장군( 장로 ) 의 신앙간증을 듣는 내빈.좌로부터 한광덕 장군.신원배 장군. 박희모 장군. 나 .김경훈 목사.김동석(예)대령.2007년 4월 22일. | |
ANZAC DAY에 대한 해설 호주의 ANZAC DAY는 엄격히 말해서 4월25일 하루지만 그 전 1주일간을 ANZA C DAY주간이라고 하여 전국민이 그 행사에 관심을 쏟고 기념한다. 우리나라 국군의 날과 현충일을 한데 묶은 성격이라면 비슷한 표현이 되겠다. ANZAC은 곧 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의 약자이다. 100년전인 1915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4월25일 새벽 4시에 호주군과 뉴질렌드군이 연합하여 터키의 갈리폴리(Gallipoli)반도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여 ANZAC DAY를 설정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호주는 영 연방가입 15년밖에 안되는 신생 국가였다. 호주군은 연합군의 흑해 진입을 돕기 위해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오또만 제국(현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하는 임무를 띠고 Gallipoli 반도에 상륙했다. 그러나 터키군의 완강한 저항과 일부 작전의 실패로 호주군은 이 작전에서 8천여명의 희생을 내며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Gallipoli 작전은 오또만 제국군의 격파와 콘스탄티노플의 장악이라는 군사목적 달성이 실패한 것이었기에 종전 후 과거사 규명의 논란이 있을 법했다. 그러나 호주의 지도자와 국민들은 그 8천여 장병의 죽음이 호주와 뉴질랜드 두 나라가 운명적 동반자 관계를 공고히 했고 호주의 국가 위상을 높여 오늘의 선진 호주국을 있게 만든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여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회상하는 전통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