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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석 영상 자료.

[스크랩] 영상회고록 * 미국 Fort Benning 보병학교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4.05.24|조회수35 목록 댓글 1

 미 Fort Benning 보병학교

장교기본과정

Officers Basic Course

 


육군 중위시절 1952년. 격심한 경쟁을 뚫고 도미유학 시험에 합격 후 기념 촬영. 이 사진이 6.25전쟁과 그 이전의 유일한 내 모습이다. 전쟁의 격랑 속에서 당시의 사진들은 모두 불탔다.

1952년, 1953년이라면 6.25전쟁이 남과 북을 오르내리는 공방전 끝에 38선 언저리에 교착되어 상호 밀고 당기는 진지전이 한창일 때이다. 미국이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전쟁중인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 군사학교에 유학시키고자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놀라운일이다. 미국은 도미유학 장교들 일체의 경비를 전액 부담했다.

한편 미국에 도착한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 장교와 똑같이 대우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은 일본식 군제(軍制- Millitary System)에서 벗어나 미군 군제로 바뀌면서 한국군 독자적 군사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Fort Benning 미국 육군보병학교 본관 건물 앞에서의 나. 미국 육군보병학교에는 세개의 과정이 있다.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생도 과정이 있고 둘째, 위관장교 과정의 Basic Course,  셋째로 고급과정인 Advance Course가 그것이다.

보병학교의 교육시설과 훈련장이 얼마나 넓었던지 그곳 사정을 잘아는 장교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 충청북도 넓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보병학교의 교훈은 그 유명한 'Follow Me' 즉 '나를 따르라' 이다.원래 성경에 있는 말이지만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솔선수범을 의미한다. 전장에서 소대장이 소대원을 이끌고 '나를 따르라' 며 앞장서 돌격하는 모습은 젊은 장교에게는 하나의 영웅상이다.

우리나라 보병학교의 교훈도 '나를 따르라' 이다. 이 정신이 바로 조국을 지켰다.

나는 육군중위 시절 미국 육군보병학교 'Basic Course'를 졸업, 미국 육군의 초급장교와 동등한 자격을 얻었다.

 


미국 육군보병학교는 Georgia주 Fort Benning에 있다.나는 장교기본과정인 Officers Basic Course에서 미국 초급장교로서 갖추어야 할 군사교리를 배웠다. 미국 독립기념일 휴가를 맞아 미군 육군소령 Heins와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Georgia 주 수도인 Atlanta시의 YMCA의 초대로 방문, 그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Heins소령은 매우 친절했고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었다. 그리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지금 만나면 그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를 만날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Fort Benning 보병학교 교내에 있는 여러개의 극장 가운데 주극장인 Main Theatre 앞에서의 나.

지금은 흑백 차별이 없어졌지만 이때만 해도 흑백 차별이 극심했다. 가령 백화점도 백인용 흑인용 따로 있고 버스나 극장도 맨 뒤 좌석에 흑인석이 따로 있었다. 설혹 앞 좌석이 비어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한다. 그러나 황색인종인 우리는 백인과 같은 대접을 받아 어린 나이에 우쭐했다. 우리 주제에 흑인을 멸시하며, 나도 이때는 철없는 시절이었다. 보병학교는 남부인 Georgia주에 위치했기 때문에 흑인 차별이 유난스러웠다.

2009년 미국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취임을 맞아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도미유학 당시에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천지개벽과 같은 미국의 흑인 대통령의 출현에 미국의 위대한 민주 자유 평등의 이념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런 위대한 인류의 역사 현장에 살고 있음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육군중위 시절인 1953년, 극심한 경쟁을 뚫고 도미유학길에 올랐다. 지금은 미국 어느 곳이건 여객기로 하루만에 도착 할 수 있지만 당시는 대형 수송선 General Hersey호를 타고 14일간에 걸쳐 태평양을 횡단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14일간의 선상생활이 매우 로맨틱한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태평양의 파도를 바라보며 가끔 고래떼와 마주칠 때 그 웅대한 장관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특히 장교에 대한 선내 대우는 최상급이었다. 매 끼 식사는 생전 처음 맛보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때 선내 식사메뉴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특급 호텔 수준이었다. 임관 후 처음 장교 대우를 받아보는 기분이었다.

긴 항해 끝에 센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내 눈에 펼쳐진 고층건물군의 장관은 경이적인 충격 그대로였다. 여기서 다시 대륙횡단 길에 들어섰다. 4박 5일간 1등 침대 객차 Pullman을 타고 도시와 럭키산맥, 대평원을 거쳐 도착한 곳은 Georgia주 Fort Benning. 어린 나이에 경이와 감동 그리고 희망의 파노라마 속에서 Officers Basic Course는 시작되었다.

이 사진은 학교 풀장에서의 나. 지금은 우리나라에 풀장이 지천에 깔려 있지만 그때만 해도 매우 희귀한 풀장에서의 사진이었다. 현재의 눈으로 보면 별로 좋은 시설 같지 않으나 당시는 놀랄만한 훌륭한 시설로 보였다. 내 뒤쪽 판자집 같은 것이 눈에 거슬린다. 당시는 눈에 거슬리지 않았는데....,

함께 유학한 장교 중 대한체육회 회장과 국제올림픽 부위원장을 역임한 김운용 중위도 있었다.



                   임무, 명예, 용기, 희생

                                                    

                                                 미국 보병장교의 자격


나는 졸업 시험 전 과정에 합격하여 미국 보병장교와 동등한 자격을 취득 함으로써 비로소 6.25한국전쟁으로 정규 육사 코스를 중도에서 버려야 했던 한을 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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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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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관장 | 작성시간 24.05.24 중위시절에도
    철저하신 사명감아 대단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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