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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강연

월간순수문학 특집 6.25한국전쟁70주년특집 9부작 - 재1부 김일성의 음모와 그 배후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0.04.17|조회수139 목록 댓글 0

월간 순수문학 6월호 특집 전쟁 에세이

       

        6.25한국전쟁70주년특집 9부작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제1부. 김일성의 음모와 그 배후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연관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학설과 출판물의 범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소련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중국의 개방정책에 의하여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 실상이 밝혀짐에 따라 상당부분이 쓸모없는 휴지 조각으로 변했음을 우리는 당대에서 보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여 발발원인 및 전쟁 책임론에 이르기까지 기상천외(奇想天外)의 학설로 대한민국은 때때로 곤혹스러운 국제적 입지에 처해진 일이 있었고 일부 운동권 세력에 의해 왜곡되거나 불확실한 내용이 악용되어 사회 혼란까지 부추기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때 북한의 의도대로 '미국의 사주에 의한 국군의 북침설'이 일부 학계의 정설인양 보편화되어 있었던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여하튼 당시의 한국전쟁에 대한 왜곡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그 책임의 일단이 북한당국뿐만 아니라 남한 자체에도 있었다는 데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의 국방당국자,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면 당시의 국방장관 신성모와 육군 총참모장(당시의 호칭) 채병덕 소장의 허장성세(虛張聲勢)에 연원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그들은 자주 '북진통일' '북진준비 완료'등을 공식 비공식 석상에서 발설했다. 이 경우 곧 자충수(自充手)를 둔 꼴이었다. 이는 큰 국가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정치성 발언들이 앞으로의 집권층에 의해 되풀이될 수 있는 개연성이 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 두 사람은 늘 '국군이 북진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떠벌렸다. 그때문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부 외신들은 '국군의 북진중'임을 보도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러시아의 퇴역 장성이자 사학자였던 볼코고노프가 쓴「일곱 지도자」,「소련 지도자의 회랑」두 권의 저서 속에서 왜곡되었던 일부 문제들이 명쾌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는 1995년 12월, 67세로 사망했지만, 살아 있을 때 소련 문서보관소 등의 극비 문서들을 찾아내어 김일성과 스탈린의 음모와 함께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의문을 속 시원하게 풀어 주었다.
 볼코고노프는 저서 출간 이전, 즉 그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 의해 도발되었다"는 사실을 문서 고증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볼코고노프(Dmitriy Volkogonov)의 저서를 통해 새로 밝혀진 한국전쟁 관련부분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은 전쟁을 확대하여 중국(당시의 중공)까지 끌어 넣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중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소련도 개입할 것이다. 이런 사태를 두려워 할 것인가. 내 견해로는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두 나라가 합치면 미국과 영국을 합친 것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유럽에는 독일을 제외하고 미국을 도와줄 자본주의 국가가 없으며 독일은 현재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도움을 줄 수 없다. 만약 3차 대전이 불가피하다면 현재가 좋을 것이다. 몇 년이 더 지나면 일본 군국주의가 미국의 동맹세력으로 부활할 것이다."
 위 내용의 글은 1950년 10월 초,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이 참담하게 패주하자 중공군을 한국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속셈으로 스탈린이 중공의 모택동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이다.
 위 서신 내용에서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첫째,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한 장본인이 소련의 스탈린이란 사실이다. 이때까지 중공은 한국전쟁에 관하여 방관자적 입장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중공의 모택동은 스탈린의 확실한 지원과 보장을 받음으로써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출병했다.
 셋째, 중공군의 개입으로 소련은 한발 빠져 공중지원과 기술지원 그리고 군수지원 등으로 직접 개입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북한의 국력과 군사력으로 미루어 볼 때, 스탈린의 적극적인 지원없이 북한 단독으로의 남침은 상상할 수 없었다. 설혹 중공의 지원이 가능했다 해도 남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왜 북한의 김일성의 지원요청을 흔쾌히 수락했을까, 그 의문 역시 소련의 붕괴로 풀렸다.
 첫째,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의 창설로 유럽에서 가중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을 극동쪽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한국전쟁 발발을 결심했다.
 이 전제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미 지상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점과 전략적 부담을 미국에 안길 수 있다는 스탈린의 책략이다. 미국은 이미 1949년 여름 주한 미군을 철수시켰고 다음 해인 1950년 1월 12일, 미 국방장관 애체슨이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대로 '남한을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일련에 정세변화'가 스탈린을 고무시켰다.
 둘째, 1949년 10월1일 중국의 국민당 장개석 정부의 몰락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는 정황에서 보였듯이 중국 공산당의 대륙제패를 미국이 방관한 사실은 북한군이 남한을 공격한다 하여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렇다면 이기회에 공산주의를 확장하여 남한을 일본 견제의 기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소련의 대 극동전략의 발전적 포석이 완성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셋째, 소련의 지원을 크게 받지 않고서도 중국 대륙을 제패한 중국 공산당에 대해 스탈린은 내심 불안하게 생각했다. 만약 중공이 독자 노선을 추구해 나갈 경우,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와 함께 중공의 세력과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게 확장될 것으로 우려했다.
 넷째, 소련의 극동전략상 꼭 필요한 해군기지의 확보가 어렵게 되어 있던 차에 북한을 지원, 적화통일을 성취하면 한반도의 항구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50년 1월~2월 모스코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모택동의 회담에서 '황해의 연한 항구들을  더 이상 소련에게 빌려줄 수 없다'는 모택동의 주장에 스탈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따라서 스탈린은 중공을 소련의 공산주의 패권 야망의 걸림돌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공산주의 종주권이 소련에서 중공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이리하여 소련은 김일성을 도와 한국전쟁 발발에 한발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으로부터 적극 지원을 확약받은 김일성은 지체없이 군비확장과 전투사단 증설 그리고 남침준비에 들어갔다.
 그 첫 조치로 1948년 초 항공기, 전차, 통신 등 기술요원 양성 목적으로 북한 청년 1만여 명을 선발하여 소련내 극동군사학교에 파견시켜 1년간에 걸친 교육훈련을 받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중순, 소련은 모스코바에서 비밀군사회의를 소집하였다. 소련을 비롯하여 중공 및 북한의 군 수뇌가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향후 18개월 이내에 남침에 충분하도록 북한 인민군을 증강키 위하여 소련의 특별 군사사절단을 북한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북한 인민군은 급격히 증강되었다. 항공기는 물론 전차와 야포 등 중무장을 서둘렀고 보병사단 또한 증설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1949년 9월부터 야외기동훈련에 돌입하였으며, 그해 12월에는 최종적인 전술 평가까지 마쳤다.
 1950년에 들어서자, 북한 당국은 실질적인 준비, 즉 부대이동, 부대 재배치, 공격 계획의 수립 등 직접 남침준비를 갖추었다. 이렇게 하여 5월에는 명령만 내리면 즉시 공격할 수 있는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그렇게 전쟁준비를 끝내 놓고서도 김일성은 남한에 대하여 줄곧 평화와 화해를 주조로 한 추파를 던짐으로써 남한당국의 상황판단에 혼란을 빚게 했다.
 특히 1950년 5월17일, 김일성은 '조국의 평화통일 달성을 위한회의'를 소집하여 사단장급 이상 전 지휘관을 모란봉 극장에 몰아놓고 적화통일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이회의에서도 결코 무력에 의한 통일은 김일성이 바라지 않음을 선언하여 내외에 전쟁 발발 기도를 은닉하는데 철저를 기했다.
 6월8일에는 대남 방송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제의를 해 왔다.
 첫째, 1950년 8월 5일에서 8일까지 통일 입법기관을 설치하기 위한 총선거를 적극적으로 실시하자.
 둘째, 동년 8월15일 서울에서 신설 입법기관을 개회토록 하자.
 셋째, 6월15일에서 17일 사이에 해주 또는 개성에서 남북 조선대표가 모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여러 선거를 관리하는 중앙위원회 설치 등을 토의하자.
 넷째, 조국통일을 방해한 분자들은 민족 반역자로 제외되어야 하며 유엔 한국위원회의 개입과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상 네가지 발표문은 남한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임을 북한 당국자 자신이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국제 여론의 환기, 그리고 전쟁 기도의 은폐를 위하여 남한에 제의하였던 것이다.
 이를 방송으로 발표한 다음날인 6월9일, 소련 외상과 중공정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하여 "이번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발표한 결의문은 조선 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가장 합리적인 내용"이라고 북한 당국을 두둔하고 나섰다. 이러한 일련의 전개과정을 미루어 볼 때, 김일성의 남침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사에 각인한 결과가 되었다.
 이렇듯 김일성은 스탈린을 등에 업고 모택동의 동의하에 남침을 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이 '미국의 사주하에 국군의 북침'을 주장하는 몰상식이 있는 한심한 작태가 있는 것도 우리의 딱한 현실이지만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광언기어(狂言奇語)임을 분명히 밝힌다.

 

 

 최고인민회의 제 2차 회의에서 연설하는 김일성 당시 수상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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