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70주년특집 9부작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제5부. 낙동강 방어선 불퇴전의 결의
북한 인민군은 1950년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도 7월3일에야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북한군 자체의 오판에 의한 지연 원인도 있었지만 국군 붕괴 후 새로 임명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소장에 의한 한강 방어선에서의 저지 작전으로 40시간 이상을 더 허비해야 했다.
한강을 도하한 북한 인민군은 주공을 경부 축선으로 지향하여 7월6일에는 평택-충주-울진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다. 이 선에서부터 북한군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우리 육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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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이 결정됨으로써 국군의 사기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미 지상군이 전선에 투입되자 미국의 워싱턴 당국이나 도쿄의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북한군 진격을 간단히 저지, 38선 이북으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초 투입된 미 제24사단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참패를 당한 후부터 미국의 한국전 시각이 달라졌으며, 북한 인민군을 민병대 정도로 얕잡아 보아 미군만 보면 도망 갈 줄 알았던 것은 착각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미군 당국의 한국전에 대한 전면 대응책이 다시 강구되기 시작하면서 전쟁의 규모는 점차 확대되어 갔다.
또한 대전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의 붕괴와 사단장 딘 소장의 실종은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으며, 한국 전쟁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애당초 개전 50여 일후인 8월15일이 조국 광복 5주년이 되는 기념일이므로 이날을 기하여 남한을 완전히 적화하여 통일을 성취한다는 야심으로 모든 계획을 수립했었다.한편 8월 15일을 '조국통일기념일'로 정하여 대대적인 기념행사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남한을 공격하여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각지의 남로당원들의 봉기는 물론 농민을 비롯한 무산계층이 일제히 호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 모든 희망사항이 차질을 빚고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참전이 확대되자 김일성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의 진출이 유엔군의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게 된 무렵에는 그동안의 작전에서 입은 피해가 누적되고 병참선이 신장되어 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게 되자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위에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 공군기에 의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심한 제한을 받는 등 전투력의 저하 요인이 가중되어 갔다.
인민군의 결정적인 사기 저하 요인은 최종목표인 부산을 점령하려고 낙동강 전선에서 무리한 총 공세를 감행함으로써 피해가 누적된데다가 전략폭격기의 융단폭격과 전술 항공기의 근접공격으로부터의 공포심 등을 들 수 있다.
낙동강까지 진출한 북한 인민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8월 5일부터 낙동강을 도하 공격을 개시 하였다.20일까지 계속되는 총공격에서 막대한 피해만 내고 공격에 실패하자 다시 정비 8월 31일부터 9월 14일까지 이른바 9월공세를 감행하였으나 함안-창녕-왜관-영천-포항 선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 공세는 한반도의 최남단에서 포위망을 압축하여 일격에 부산까지 점령하기 위한 북한 인민군의 마지막 공세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리한 작전으로 말미암아 북한 인민군은 많은 손실을 입었을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후속 군수지원이 뒤따르지 못함으로써 9월 중순부터 북한 인민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할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되는 전력의 보충과 증원부대의 도착으로 상대적 전투력의 우세를 확보하게 되었다.이때부터 비로소 작전의 주도권을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국군과 유엔군은 꾸준한 전력 증강과 함께 조직적인 지연 작전의 달성, 효과적인 파쇄공격(波碎攻擊:spoiling attack)의 감행, 천연 장애물인 낙동강을 이용한 성공적인 방어작전의 전개 등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이윽고 9월16일에는 인천 상륙작전의 시발로 지상군의 총반격작전을 단행하게 되었다. 수세의 국군과 유엔군이 새로운 공세이전(攻勢移轉)의 호기를 포착한 것이다.
북한 인민군은 그동안 일일 평균 10 Km의 속도로 낙동강 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낙동강 선에서부터는 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부산은 커녕 대구마저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공세가 꺾이고 말았으며 공격개시 82일 만인 9월 15일 이후에는 국군 및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북한 김일성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낙동강 전선에 임하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는 확고하였다. 근래 낙동강 전선 국군 제1사단의 다부동전투가 백선엽 장군에 의해 과장 조작되어 마치 다부동전투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이전의 국면을 전환한 것처럼 곡해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부동전투는 다른 국군 사단의 역활 범위 안에서의 활약이었음을 분명히 밝혀 둔다.모든 국군 사단과 미군 사단이 필사적으로 싸웠다.
낙동강전선의 한국군은 왜관 북쪽으로부터 영덕까지 128 Km에 이르는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미군은 왜관으로부터 마산까지에 이르는 112 Km를 담당하고 있었다. 즉 이 전선은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마산-남지-왜관-낙정리-영덕에 이르는 240 Km에서 결사 항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만일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지도상에서 말소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운명의 작전을 지휘한 최고사령관은 워커 장군으이었다. 이 전선에서 워커 장군의 불퇴전의 결의는 훗날 세계 전사에 각인될 정도로 유명하다. 그가 승리를 쟁취한 후 교통사고로 불행히 순직했지만 우리 정부는 그의 영웅적 리더십을 기리기 위해 서울 광진구 아차산 서남부 일대를 '워커힐'로 명명하였다.
워커 장군에 의한 공세이전의 성공은 곧 국군과 유엔군의 승승장구의 기세로 이어져 북진에 돌입했다. 그로 인해 남북통일이라는 꿈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안겨주고 있었다.이때의 우리 국민의 환희를 무엇에 비기랴. 국민 모두가 통일 이후의 그림을 머리 속으로 그려가며 행복에 들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 공세이전의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워커 장군의 절체절명 불퇴전의 리더십
2.멕아더 장군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
3.미 공군 B-29 폭격기의 인민군 진지에 대한 융단 폭격
4.국군 사단과 미군 사단의 결사 항전
5.인민군 전투력의 한계 및 병참선(兵站線)의 신장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도 결정적 승리를 안겨주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공군은 우리에게 영원이 잊혀질 수 없는 한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