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70주년특집 9부작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 한국본부 고문
제7부. 고지 쟁탈전과 정전협정
한국전쟁이 발발 이후 피아 공히 남북을 오르내리며 많은 인적 물적 손실을 입고 격동의 1년을 지나 다시 쌍방은 새로이 형성된 38선 부근 전선에서 상호 대치상태로 들어갔다.
전투는 쌍방 고지 쟁탈전을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유엔과 미국은 수차에 걸쳐 휴전 제의를 하였으나 이를 묵살하고 있던 공산측이 6월23일 소련의 유엔 대표를 통하여 휴전협상을 제기하게 되었다. 이라하여 1951년 7월10일부터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휴전회담 기간 중의 군사작전은 휴전회담의 추이와 밀접한 관계하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즉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상태를 유지하다가도 회담이 결렬되거나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 또한 치열했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전투는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휴전이 성립될 경우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상대측의 취약점을 찾아 공격을 감행하는 등 고지 쟁탈전이 이어졌다.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된 고지 쟁탈전은 주로 고지 정상의 진지 공격에 치중되었다.
휴전 회담을 통한 양측 요구사항은 언제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즉 유엔군 측은 당시 쌍방의 현 접촉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공산측은 전쟁 발발전의 원상복귀를 주장하며 38선을 휴전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쌍방이 이해가 엇갈린 것이다. 그리하여 휴전회담은 결렬되었다.
유엔군은 휴전 당시의 접촉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안을 관철시키기로 결정하고 휴전회담 개시 당시의 방어선을 확장할 목적으로 제한된 범위의 공격작전을 단행하였다. 1951년 10월 말까지 계속된 이 공세에서 국군 및 유엔군은 당시의 상호 대치선에서 평균 10km를 전진하여 서부전선에서는 임진강 넘어 역곡천까지, 중부전선에서는 금성 남방까지, 동부전선에서는 고성 남방까지 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렸다.
이 전투는 좁은 공간에서 치열한 진지전이 전개됨으로써 쌍방간에 많은 사상자를 냈다. 특히 미군의 무한정한 항공기에 의한 폭탄 투하 및 포병화력의 집중사격은 공산군측에 많은 희생을 강요했고 공포심을 유발케 함으로써 염전(厭戰)사상의 확산에 크게 기여한 결과로 작용했다.
이로 말미암아 공산군측은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하여 10월25일 휴전회담 재개를 제의해 왔고, 회담에서는 유엔군측 안을 수락하고 군사분계선 설정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 1951년7월10일 개성에서 정전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유엔군측 대표. |
임시 휴전선의 설정으로 다시 작전은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곧 전쟁이 끝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그 후 30일 이내에 합의하기로 한 기타 의제의 합의에 실패함으로써 그동안 쌍방간에 합의하였던 임시 휴전선은 백지화되었다.
1952년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전선은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한치의 땅, 하나의 고지를 더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불꽃을 튀겼다.
고지 쟁탈전은 주로 산악지대인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에서 이루어졌다.
고지확보는 곧 관측이 용이하고 평지 통재를 가능케 하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보다 높은 고지의 확보는 보다 넓은 지역의 통제를 가능케 함으로써 휴전을 대비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국군과는 달리 미군에 있어서 고지 쟁탈전은 매우 불리하였다. 충격행동과 기동성 그리고 압도적 화력으로 전장을 장악하는 미군의 관용전술(慣用戰術)에 상반되는데다 기동력에 의존하던 체력으로는 고지 오르내리기에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차츰 미군은 고지 쟁탈전에서 손을 떼고 서부전선을 전담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한국전쟁 전반을 통해 미군은 기동성을 위주로 한 부대구조상 주로 서부전선을 담당하였지만, 전선 교착 이후 일부 미군이 중동부 전선에 투입되었었다.
고지쟁탈전에 있어서 중공군 및 북한 인민군과 우리 국군은 각각 특징이 있었다. 중공군 및 인민군은 야간에 침투하여 측방 또는 후방에서 기습공격하는 그들의 관용전술을 사용했고,국군은 여명 또는 주간을 이용, 목표지역에 막대한 포병화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초토화한 다음 일제히 공격을 감행, 고지 정상을 탈취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따라서 적은 야간에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가도 주간에는 우리에게 다시 빼앗기는 핑퐁식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고지 쟁탈전이 이어지는 동안 시일이 지날수록 불리한 쪽은 적측이었다. 미국의 무제한 전비지원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적측은 그 많은 전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인원손실이 늘어나자 중공군 쪽에서 먼저 휴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우리 쪽에서는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하면서 고지 쟁탈전으로 적측의 목을 죄어갔다.
그러는 가운데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공산군측의 제의로 다시 휴전회담이 열렸다. 6월28일에 이르러서는 그 동안 18개월이나 끌어오던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휴전협상의 모든 의제가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1953년 7월27일 22시를 기하여 쌍방 모든 적대행위에 종지부를 찍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와같이 미국의 휴전을 전제로한 협상을 계속하는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반대를 선언하고 이를 따르는 국민과 함께 맹렬하게 휴전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미국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등 통일에의 염원을 불태웠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과 자유 세계의 여론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휴전회담이 마무리 되어가자 이에 대한 항거로 당시 유엔군이 관리하고 있던 공산군 포로들 가운데 북으로 송환 되기를 거부하고 있던 반공포로 34,900여 명 중 27,000여 명을 이승만 대통령 독단으로 6월 18일 자정을 기해 일제히 석방하였다.
이와같은 반공포로의 석방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력히 항의 했고 공산군측은 맹렬히 비난하며 타개되어 가던 휴전회담을 연기시켰다.
그러한 압력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으로부터 '휴전 후의 긴밀한 협조관계의 확대 및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등을 받아내는 큰 성과를 얻어냈다.이때 얻어낸 성과가 오늘까지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탱케한 모태 역할이 되었다.
6.25한국전쟁 발발과 휴전성립시까지의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눈부셨다.당시 이승만은 미국의 조야(朝野)가 무시할수 없는 유일한 한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투르먼 미국 대통령은 사석에서 후일담으로 "만일 한국 대통령이 이승만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한국전쟁에의 개입을 꺼렸을 것이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이 점에 대해 당시 미국의 정치평론가나 군사평론가의 견해도 크게 차이가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1953년 7월 27일. 쌍방 대표가 정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