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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강연

월간 순수문학 6월호 권두칼럼 - 6.25남침 70주년을 맞는 감회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0.05.01|조회수91 목록 댓글 0

 월간 순수문학

6웛호 권두칼럼

 

                              6.25남침 70주년을 맞는 감회

                                           내가 선진 조국에 얹힌 벽돌 한 장                                                            

                                                                                  박경석

                                                                            한국전쟁문학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고문

                                                                                                

 오는 6월 25일은 6.25남침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이다. 특히 나에게 있어서 그날은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너무 많아 어떻게 그 감회를 여기에  올려야 될지 마음이 무겁다.

 1950년 구 6년제 대전중학교 5학년 재학중인 나는 어느날 아버지가 보는 일간 신문 1면 광고란에 실린 우리나라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 모집 광고를 보는 순간 눈이 빛났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무관 집안이었고 내 성격 또한 군인 성향이라 늘 목표를 정규 육군사관학교 진학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육사에는 정규과정이 아닌 단기 후보생 과정만 있었기에 내 희망은 무산되었다. 그런데 첫 육사  정규 생도 모집이라니 가슴이 뛰었다. 흥분을 가라 앉히고 아버지 한테 육사에 응시하겠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웃으며 "중학교 6학년 졸업이라야 된다  너는 자격이 없다고" 했다.

 다음날 그 신문 광고를 자세히 살피니 뜻밖에 맨 하단 구석에 재학중인 학생은 예비시험에 합격하면 본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고 인쇄되 있었다.

 나는 긴장했다. 나는 날자를 기다려 그날 가출하여 용산 수도여중 예비시험장을 찾아 응시했다. 며칠 후 합격 통보를 받고 본 시험장인 용산중학교에 가서 응시 합격, 다시 3차 시험인 신체검사와 구두시험에 합격, 대전중학교에서는 2년 월반 합격이라며 축하의 물결 속에서 흥분하고 있을 때 합격 취소 전보를 받았다. 만 19세가 안돼 연령 미달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흘 후, 담임 선생님이 육사에서 합격 통보가 왔다며 빨리 태릉 육사에 가라고 했다. 내용인즉 당시 이승만 정부의 최고 실세인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장군 아들이 나와 동갑인데 학점 미달인데도 합격권에 넣자 교수들이 모든 시험에 합격한 박경석이 연령 미달이라 불합격 했는데 박경석을 추가해야 한다고 항의하자 결국 나를 덤으로 합격시켰다는 내막이었다. 17세에 정규 육사 생도가 되었다. 그날이 1950년 6월 1일. 이렇게 영광을 향한 길에 들어섰지만 25일 후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육사 생도들은 포천 전투에 투입돼 330명 가운데 86명이 전사하는 참변을 맞았다. 각개훈련은 커녕 소총 사격도 제대로 못하는 맹물 청소년이 희생된 것이다.

 부산으로 후퇴한 생도들은 4개월 단기 교육을 받고 그해 10월 23일, 육군 소위로 임관, 당시 소모품이라고 빗대던 소총 소대장이 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소대원 40명, 17세의 소대장 박경석. 소대에서 최연소자였다. 그러니 정상적인 리더십이 설 수 있겠는가, 무능한 소대장이었다. 실제 소대장 역할은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선임하사관이 했다.

 6.25전쟁 초전에 소대장인 나는 맨 앞장서다가 적의 수류탄 공격으로 중상을 당했다. 그러나 천행으로 나이가 어려 인민군이 죽이지 않고 인민군 야전치료소에서 치료해 주었다. 특히 나이가 어리다고 인민군 사단장이 자유를 주어 남쪽을 향해 조국에 귀환, 다시 군 전투 지휘관의 경력이 이어졌다. 나를 살려준 당사자는 인민군 10사단장 전문섭 소장이었다. 적장이 나를 살리다니 기구한 운명이 아닌가.

 귀환해서 확인하니 그동안 내 장례식이 치루어졌고 서울현충원에는 내 묘지가 설치돼 있었다. 국립서울현충원 15-2묘역 730호 묘지가 '고 육군소위 박경석의 묘'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수 없다. 지금도 내 묘지는 그대로 있다. 우울할 때면 가끔 찾아가 내 상한 마음을 달랜다.

 많은 실패가 교훈이되어 중견 장교시절에는 휴전선 DMZ작전에서 공훈을 세우는가 하면, 배트남전 최고 무공 수훈을 기록하는 영광의 날도 있었다. 

 내가 노병이 되어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많은 무공훈장보다 조국을 위해 싸워 조국 보위 한켠에서  조그마한 공헌을 했다는 자긍심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이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거기에 내 벽돌 한 장이 얹혀있다고 생각하니 흐믓하다.

 6.25 당시의 그 고행길, 치욕의 포로 경험에서 보고 듣고 겪은 내용들을 6.25전쟁 특집 9부작으로 완성했다. 어디에 보낼까 망서리던 중 월간 순수문학에 게재해주겠다는 발행인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 문단의 최고 여걸 박영하 발행인에 감사한다.

 

 

6.25 당시의 박경석 중위

 

국립서울현충원 내 묘에서의 나 박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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