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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강연

2. 국군 수뇌부 의문의 실책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0.08.09|조회수70 목록 댓글 0

2. 국군 수뇌부 의문의 실책
  1950년 초부터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여러 요로에서 포착되었다. 북한 당국이 남파한 무장간첩들이 체포되고 인민군 귀순병에 의해 북한군의 남침 징후는 더 확실해졌지만, 미국 정부나 극동 미군사령부조차도 그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측의 엄살이거나 북침 준비를 위한 음모쯤으로 평가절하하였다.
  
전쟁 발발 보름 전에 현장 확인차 특사 자격으로 미 국무부 고문 덜레스가 방한하였다. 그는 국방장관 신성모의 안내로 건성건성 전선을 돌아보고 한국군 수뇌와의 회담을 마친 다음, 한반도에서의 "전쟁의 징후는 없다" 고 결론을 내린 뒤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물론 덜레스 특사는 본국에 돌아가 "전쟁의 징후는 없다" 고 보고하는 한편, 한술 더 떠 "한국군의 방어태세는 완벽하다" 고 덧붙였다.
 5월 10일,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신기자와의 회견 석상에서 "지금 항간에는 5, 6월 위기설이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유언비어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국군은 실지회복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명령만 내리면 즉각 북진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해프닝 외에도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얼마든지 있었다. 남북 교역 명태사건으로 파면되었던 육군총참모장 채병덕이 1950년 4월10일에 다시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부임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군의 동태에 대한 정보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북한에서 남침준비를 완료하고 마지막 작전회의를 개최하는 6월 10일에 전방부대 주요 지휘관과 육군본부 참모진의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전방에 배치한 제1사단, 제7사단, 제6사단, 제8사단 가운데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을 제외한 3개 사단장이 경질되었다. 또한 육군본부의 작전 책임자인 강문봉 작전국장을 대기 발령하고 장창국 대령을 그 자리에 앉혔다. 이 일련의 인사이동은 실로 큰 실책이 아닐 수 없었다. 
 6월 13일부터 20일 사이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전방 사단의 2개 연대를 예속 변경했다. 이런 실책 외에도 부대 이동에 앞선 3월에는 노후화된 차량을 정비한다는 구실로 총 보유 차량의 35%에 해당하는 526대를 회수하여 사용할 수 없게 한강 이북에 묶어두었다. 이어서 M1소총을 제외하고 공용화기 일체를 정비한다는 구실로 각 전투부대 보유 공용화기의 약 30%를 부평 병기창에 입고시켰다. 6월18일에는 전쟁 발발시 소총중대와 보병대대에 지급하도록 되어 있는 5만분지 1 축척의 전술지도 전량이 무조건 회수되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이런 조치는 이적행위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이적 행위가 우연한 사무착오에 따른 것이었을까. 더욱 의구심은 증폭된다. 6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4월 중순부터 계속된 경계 및 비상사태를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은 북한군 공격개시 불과 28시간전인 6월 23일 24시부로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농번기 휴가로 부대가 병력이 부족하여 썰렁한 마당에 육군본부는 다시 6월24일 토요일을 기하여 외출 외박 실시를 지시했다.
 이날밤, 육군본부에서는 장교구락부 개설 축하 파티를 열어 군 수뇌와 미 고문관이 자정이 넘도록 댄스파티를 열어 주연에 빠져 있었다. 불과 몇시간 후면 들이닥칠 사상 미증유의 국난에 직면할 이 위급한 시간에 군 수뇌와 이들을 지원할 미 고문관이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이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을 시작했는데도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오전까지 연락도 되지 않았다. 더구나 개성 북방의 제1사단은 불과 5시간 만에 개성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고 후퇴중이었지만 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행방이 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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