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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강연

4. 인민군 지휘부의 패착과 그 영향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0.08.09|조회수64 목록 댓글 0

4. 인민군 지휘부의 패착과 그 영향

                                                                              


주공집단인 인민군 제1군단은 38선 방어부대인 육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을 격파하고 후방에서 투입된 2사단, 3사단, 5사단 그리고 수도사단의 전신인 수도경비사령부 부대를 완전히 와해시키고 6월 28일 오전 11시30분 수도 서울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국군의 전쟁지도기능은 모두 한강 이남으로 옮겨갔지만, 사실상 이 시점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은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도 서울 점령의 여세를 몰아 인민군 제1군단이 즉각 한강을 도하 남진하는 한편, 중부전선의 인민군 제2군단 또한 수도 서울의 포위망 형성이라는 우회기동 전략에 구애받지 않고 신속히 직진했더라면 국군의 재편성과 한강 방어선의 구축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미국의 한반도 군사개입 가능성도 봉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서의 가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교훈 정립을 위해서는 적의 실책도 알아야 한다.
 북한 인민군의 최초 남침과정에서의 실책과 수뇌부의 오판은 바로 대한민국을 붕괴 직전에 구출해준 원인이었기에 우리에게는 중요한 교훈이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적의 오판과 실책의 내막을 살펴본다. 이는 인민군 지휘부의 결정적 패착이었다.


 <실책1>

 북한 인민군의 남침전략의 기본은 주공 제1군단으로 하여금 수도 서울을 양면 공격하고 조공 제2군단으로 동해안의 공략과 함께 춘천을 점령한 즉시 고도의 기동력으로 우회전, 이천을 경유 수원을 차단하여 수도 서울을 공략한 주공 제1군단과 포위망을 형성하여 그 포위망 속에서 국군을 섬멸, 그 후 남진을 계속 적화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공집단인 인민군 제1군단의 수도권 공략은 육군 제1사단과 제7사단의 졸전으로 조기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조공 집단인 인민군 제2군단은 김종오 대령이 지휘하는 제6사단의 조직적인 방어작전으로 춘천공략이 계획보다  늦어지자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민군 제1군단은 공격속도를 늦추었다.

이것은 인민군에 있어서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인민군 제1군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과 기동력으로 제2군단의 공격 추이와 관계없이 한국 육군의 제1사단과 제7사단을 계속 강타했더라면 후방 3개 사단의 전선 투입 전인 24시간~48시간을 단축, 한강 이남 지역의 조기 장악이 가능했을 것이다.

 <실책2>

 북한 인민군이 28일 서울을 함락시키고도 즉시 한강을 도하하지 않고 공격을 일단 멈추었다. 서울 점령이 곧 대한민국의 붕괴요, 그것은 곧 적화통일의 달성이라는 등식으로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와해된 국군을 즉각 추격하지 않더라도 춘천공략의 제2군단이 이천을 경유하여 수원을 공격할 무렵, 한강을 도하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결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물론 소련의 스탈린까지도 미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북한 인민군 제1군단은 제2군단이 이천을 거쳐 수원을 지향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한강도하의 무리수를 쓰지 않았다.
 
 춘천 공략의 인민군 제2군단이 한국 육군 제6사단의 선방(善防)으로 공격이 지연되자, 서울 점령의 인민군 제1군단은 여력이 있었음에도 48시간 이상을 허송하면서 축제 분위기 속에서 들떠 있었다. 이 48시간은 국군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케 하였고 미국의 군사개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 경우 한국전쟁 제1의 영웅 김홍일 장군이 한국군의 퇴로를 막고 재편성하며 한강선 방어에 착수, 인민군이 버린 2일간에다 4일간의 결사 방어에 성공, 마침내 미국의 한국전 투입을 이끌어 낸다.

 

<실책3>

 

남한에서 남로당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타도를 위해 갖은 책략을 꾸몄던 박헌영이 월북하여 김일성에게 남로당의 조직을 과장 보고하였다. 만약 전쟁이 발발, 남침을 시작하면 전국에 조직된 남로당원 20~30여 만명이 봉기하여 후방지역을 교란, 제2전선을 형성할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장담하였다. 따라서 김일성은 남한 후방 각 지역에서의 제2전선 형성을 남로당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박헌영의 장담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남한 정복이 차질을 빚었다.

<실책4>

 

소련의 스탈린이나 김일성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적화통일 예를 보거나 1950년 1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의 한반도 포기선언으로 미루어 미국의 한반도 군사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따라서 미국 또는 유엔의 군사개입 가능성에 따른 어떤 대안도 수립하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소련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불참하는 실책을 범함으로써 소련이 거부권을 포기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 영향 

 

한강방어의 영웅 김홍일 장군

 

이상과 같이 인민군 수뇌부의 오판에 따른 결정적인 패착에 의해 한국 육군은 하늘이 내린 귀한 시간을 얻게 됨으로써 재기의 방편으로 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추대하여 한강방어선 구축에 나섰다.
 육군의 춘천 전선의 6사단과 동부 전선의 8사단을 제외한 6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어 제각기 패주하여 무작정 썰물처럼 1번국도와 야산을 타고 남하하고 있던 패잔병들을 시흥-수원 일대에서 저지케 하여 다시 육군의 사단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6개 사단이 3개 사단으로 축소 편성 됐다.
   편성이 되어가는 순서에 따라 김홍일 장군은 한강선에 급편 방어 진지를 구축케 했다. 그 후 이 방어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은 만 4일간이란 결정적인 시간을 날려버렸다. 이 방어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의 붕괴를 막았을 뿐 아니라 미국 대통령 트루먼의 한국전 참전 결정으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이 이루어졌다.
  

이 부분에서 이때의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의 선견지명과 영웅적 활약상이 우리 국군 전사에 극도로 과소 평가되어 있다. 중국군 정규 장군으로 항일전에서 용명을 떨쳤고 우리 광복군 참모장으로 독립운동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에 눌린 만주군 출신 장군들이 시종 모함하여 결국에는 1군단장 직에서 해임되어 군복까지 벗기게 된다. 김홍일 장군뿐만 아니라 일본군 육군대좌(대령) 출신 김석원 장군 또한 용명을 떨치고 있었으나 미군 고문관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 사단장직에서 해임된다

 

 당시 만주군 출신 정일권과 백선엽은 하급자인 소령 중령급 미군 고문관을 지프 앞자리에 모시고 다니면서 많은 잡음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의 미군 고문관 상전 대접이 그들에게는 호재가 되어 놀라운 출세의 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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