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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강연

8. 漢字 문화의 퇴조와 한글의 부활

작성자박경석|작성시간20.08.10|조회수56 목록 댓글 0

8. 漢字 문화의 퇴조와 한글의 부활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1950년 초까지는 학문 분야에서 漢字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해도 漢字 실력이 부족하면 소외당했다. 군대뿐만 아니라 관공서에서도 모든 공문에 漢字가 섞여 있었고 새로 쓰기에 우로부터 좌행이었다.

 해방 직후 미 군정청에서 옛 관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 문교 정책을 펴나갔지만 그 관행을 벗어날 기미가 희박하였다.

 1950년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연대 단위 모든 부대에 미군 군사고문관(KMAG)이 배치되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첫 조치였다. 아마 그들은 한국군 행정 체계를 보면서 그 후진성에 놀랐을 것이다. 타자기를 쓰고 있는 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손글씨로 행정을 처리하는 실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한편 중국의 漢字를 섞어 사용하는 현장을 보고 비능률을 확인했을 것이다.

 1950년, 미국의 언더우드타자기회사에서 제작한 공병우 한글타자기가 상품화돼 있었지만 漢字 관습에 눌려 진열장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한국군 부대가 漢字문화에 익숙한 일본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지휘되는 군사 체계 또한 개선이 필요한 부분으로 상부에 보고됐음을 추측할 수 있겠다.

 미국 워싱턴 당국은 마침내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문화에 찌든 한국군과 한국인을  미국 문화권에 유인하기 위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951년이라면 한창 진지 쟁탈전이 38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을 때인데도 한국군 장교를 선발, 미국의 군사학교에 유학시키기로 결정했다. 물론 모든 경비는 미국이 부담하고 미국 장교들과 차별 없이 함께 어울려 미국의 군사학을 배우게 했다. 모든 병과 학교에서 일제히 한국 장교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니 미국은 대단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나는 1951년 초 경쟁이 극심한 도미 유학 시험에 응시했다. 17세의 나이에 4년제 정규 육사에 입교했지만 불과 25일만에  한국전쟁에 투입돼 사선을 넘은 뒤 그해 10월에 속성 교육으로 17세의 법정 연령 미달 육군소위로 임관, 그 부족한 경력을 보충해야 된다고 결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약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 어학 연수과정을 거쳐 마침내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항공기로 미국에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시기여서 대형 미 해군 수송함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향했다. 18일간의 항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항구에 도착한 후 다시 대륙 횡단 열차로 5일 후 조지아주 Fort Benning보병학교에 도착했다.

 미군 장교와 함께하는 '장교기본과정' 에서 한국군 장교 유학생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을까. 유학생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고속도로와 능률적 시스템, 그 발전상을 확인하면서 조국의 후진성에 무언가 꿈틀거리는 자괴감에 고뇌했을 것이다.

 이 무렵, 근대화 주력 세력인 박정희, 채명신 또한 초기 도미 유학생이었다. 아마 이때 박정희는 쿠데타를 해서라도 조국 근대화의 욕구에 불을 댕겼을지 모를 일이다.

 초기 도미유학 장교들에 의해 귀국 후 국군의 행정체계는 일시에 현대화 과정에 들어갔다. 전쟁을 치르면서 타자기에 눈을 돌렸고 한글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육군본부로부터 시작한 공문서 현대화는 국방부를 거쳐 모든 정부 부처가 가로쓰기 체제로 바뀌었다. 공문서뿐만 아니라 육군의 교재 및 회보 따위 또한 漢字가 배제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기를 漢字 문화의 퇴조와 한글의 부활기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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