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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채명신

Ⅱ부. 베트남 정글에서 제6장 한국군의 초기 작전

작성자서현식|작성시간14.01.20|조회수403 목록 댓글 1

◇채명신 전술개념의 실체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은 주월미군사령부 일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자신의 전술개념에 의하여 부대를 지휘 운영하고 있었다. 채명신의 전술개념의 성과는 초기 작전에서부터 그 빛을 볼 수 있었다.

 1965년 10월 23일에 맹호사단 제1연대가 미 제101공수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 완료한 데 이어 기갑연대가 11월 14일 미 해병 제7연대로부터 인수 완료하였다. 맹호사단 2개 연대 모두 중대별로 각각 산개하여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한 후 적응훈련을 거쳐 이제 첫 단계 작전에 들어가기 위한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맹호사단 전술책임지역은 중부 항구 도시인 퀴논은 비롯하여 약 1,400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으로 1차적 작전임무는 그 지역의 적 소탕과 평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채명신의 전술개념에 의하여 중대 단위로 그 광할한 지역에 산개하여 중대전술기지가 설치되자 우군인 미군, 월남군은 물론이고, 적측인 월맹군, 베트콩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라움과 회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도대체 미군의 전술 교범이나 적측의 전술에도 없는 전혀 생소한 전술 운영을 보고 양측 모두 채명신이 무엇을 노릴려고 그런 배치를 하는지 채명신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미군의 야전사령관들은 채명신의 전술 운영을 보고 비판의 강도를 높여가며 웨스트모얼랜드 주월미군사령관에게 항의를 했지만 생각이 깊고 인내심이 강한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 두고 보자, 아직 성패를 운운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야전사령관을 달래고 있었다. 채명신의 이러한 전술운영은 한국전쟁에서도 시도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뜻밖이라 한국군 일부 지휘관들도 잔뜩 불만을 품고 있었다.

 채명신의 속셈을 살펴보자. 그는 초급장교시절부터 제주 4.3사태를 비롯하여 태백산지구 공비토벌. 6.25전쟁시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 후방에서 3개월 간이나 게릴라전을 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한국군 유일의 게릴라 전문가다. 더구나 정규전에서도 M1고지 탈환을 비롯한 난공불락의 적 요새를 탈환한 정규전의 영웅 아닌가. 그가 주위의 모든 지휘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이 전술운영에 어떤 확신이 섰기에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간혹 채명신을 이해하는 지휘관들은 긍정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워스트모얼랜드 장군도 다행이 그런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다.

미 태평양지구육군사령관 비치 대장은 주한유엔군사령관 시절 채명신의 천재적 리더십을 확인한 사람이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비치 장군으로부터 채명신에 대한 모든 것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채명신을 감싸가며 미군 야전사령관 등을 설득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채명신이 한국군에 대한 독자적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고 있다해도 미군이 주도하는 월남전에서 미군과 사사건건 대립하며 작전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채명신에게는 운도 따랐다.  

 맹호사단 그 광활한 지역 가운데 중부 월남 제일의 곡창지대 고보이 평야가 총 한 발 쏘지 않고 베트콩을 몰아내고 맹호 제1연대의 중대전술기지로 덮어 버렸다. 세상에 이런 놀라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보이 평야는 베트콩 식량의 공급원이다. 그 평야를 장악하고 있던 베트콩이 한국군이 나타나자 일단 피해보기로 하고 보따리를 싸고 모두 바산과 푸캇산에 숨어버렸다. 숨어서 동정을 살피니 한국군이 물러가지 않고 드문드문 기지를 만들기 위해 호를 파고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고 요새를 구축하고 있지 않는가. 베트콩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고보이 평야로 되돌아 갈 수 없다. 되돌아가려면 저 요새에 있는 한국군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 베트콩이 정규전에 취약한데 정규전을 해야 저 평야를 찾을 수 있는데....,베트콩은 채명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꼴이 되었다.

 채명신은 헬기를 타고 유유히 마음껏 각 중대전술기지를 방문하며 장병들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 이제 우리가 싸우지 않고 고보이 평야를 찾았다. 다음은 지키는 일만 남았다. 베트콩이 기습을 시도할 것이다. 일차적으로 기지 밖에서 잠복조가 적을 발견하면 지체없이 타격한 후에 기지로 돌아오라. 그후 정상적인 방어작전에 들어간다. 적이 많은 것으로 판명되면 포병화력지원을 요청하라. 최대 48시간을 버틸 수 있게 모든 보급품을 비축하라"

 채명신은 각 중대전술기지를 포병화력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연대 일반지원 포병대대를 포대 6문씩 각 보병대대별로 나누어 배치시켰기 때문에 모든 중대전술기지가 요청만 하면 포병화력을 직접 지원 받을 수 있다. 이 포병 운영에도 시끄러웠다. 사단 포병사령관이 "어느 교범에도 연대 일반지원 포병을 6문씩 포대별로 보병대대를 직접지원한 적이 없습니다" 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포병사령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화력 운영의 일반원칙인 것이다. 그 원칙대로 한다면 사거리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중대전술기지까지 포탄이 도달할 수 없다. 포탄이 도달하지 못한다면 그 포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각 대대에 1개 포대 6문씩 분할 배치하면  모든 중대전술기지에서 요청만 하면 포탄을 원하는 곳에 작렬케 할 수 있다.

 채명신의 전술개념은 모두 전술 교범과 상반되는 것으로 한때는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채명신은 고민도 해야 했다. 연대장을 비롯하여 사단 포병사령관까지 반대하는 이 전술운영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관건이었다. 고보이 평야의 일시적 확보가 아니라 계속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고보이 평야를 점령하고 있던 베트콩은 그 일대에 거주하는 지역출신으로 평생 그 지형에 숙달된 토박이인 탓으로 행동반경이 뚜렸한 맹호 장병을 매복 저격하기에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을 들어내놓치 않고 우리가 거꾸로 야간 매복을 통해 적의 접근을 포착하여 섬멸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채명신은 거기에 착안하여 주간에 충분히 수면케해서 야간활동에 숙달하도록하는 훈련에 집중하도록 했다. 다행이 고보이 평야를 점령하고 있는 제1연데 3개 대대장 모두 6.25전쟁 참전 경험이 있었던 탓으로 채명신의 전술개념을 속히 이해할 수 있어 훈련 숙달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맹호 제1연대 1대대장은 배정도 중령이다. 6.25전쟁에서 소총소대장으로 싸워 무공을 세운 전사이다. 1대대의 각 중대는 고보이 평야의 핵심부에 중대전술기지를 구축하여 일단 기본훈련을 끝냈다. 맨 처음 베트콩에 의한 기습이 3중대에 가해졌다. 아마 한국군 진지에 대한 시험을 위헤 계획된 침투로 보였다. 10월 29일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얄금얄금 기지 가까이 기어들어오는 베트콩 2명을 고광배 일병이 사살하였다. 중대전술기지에서의 첫 전투가 벌아진 것이다. 첫 발에 2명의 베트콩이 사살되자 베트콩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 여세를 몰아 인접 1중대가 룩레부락으로 진격해 들어가다 베트콩의 매복조에 걸려 4명이 부상했다. 다행이 중상자는 없었다.

 이 작은 전투를 통해서 맹호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매복조의 효과적 방어의 교훈이고 둘째는 진격시 적 매복병에 대한 경계 대책이었다. 베트콩을 깔보고 진격하다가 당한 한국군 최초의 실책이었다.

 채명신은 헬기로 3중대와 1중대를  찾아 다음과 같은 훈시를 남겼다.

   "전쟁은 착오의 연속이다. 착오없이 전투에 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착오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도록 모든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것은 각급 지휘관의 꾸준한 노력으로 가능하다."


 

박정희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따뜻한 마음씀씀이를 다시 한번 보게 되는 사진을 공개한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월남에 가 있을 때인 1966년, 육영수 여사는 구정(舊正)을 일주일 앞둔 1월 16일(일요일) 채 장군 부인 문정인 여사와 어린 자제들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가장(家長)이 없이 명절을 지내게 될 그 가족을 위로하고 하루를 함께 보낸 것.위 왼쪽 사진을 보면 육 여사 앞에는 아들 박지만이고, 문  여사 앞의 채씨 아들 형제들은 총을 들고 있다..  

◇최초의 야간침투작전 성공 
 채명신 전술개념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야간의 활용이다. 월남전의 밤은 베트콩의 세계였다. 미군을 비롯하여 월남군은 주간에만 작전을 한다. 밤에는 주둔지에서 경계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휴식을 취한다, 그래서 베트콩은 낮에는 꼭꼭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활개를 친다. 밤은 월맹군이나 베트콩에게 이동의 자유를 누린다. 따라서 밤에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병력 이동과 보급품 운반의 천국으로 변한다.  채명신은 6,25전쟁을 통해 백골병단을 이끌고 적 후방에서 밤을 이용해서 적을 기습하여 적을 공포로 떨게했던 경험이 있었으므로 밤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주요지휘관회의시 채명신은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밤은 베트콩이 지배한다. 우리는 밤을 되찾아야 한다. 밤을 낮처럼 우리가 활용할 수 있다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시아스타 타임( 월남 사람들의 낮잠 자는 시간)은 일과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요령 것 푹 재워라. 그래야 밤이 익숙해 진다. 나는 야간 매복이나 야간 청음초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야간에 적을 기습하는 적극적 야간활용을 희망하고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숙달하면 가능하다."
 각급 지휘관은 채명신의 의중을 알았으므로 야간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방책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채명신은 다음 주요지휘관 회의에서는 야간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지휘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채명신 리더십의 특징은 어려운 문제를 풀게 하기 위해 명령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극받아 자기 방식대로 풀게한다.
   "인간에게 있어 밤은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여러 조건이 있다. 첫째, 보이지 않는다.
둘째, 누가 갑자기 자기를 위협할 수 있다. 셋째, 밤에 무슨 일을 당하면 증거가 인멸될 수 있다. 더욱이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나온다고 겁을 먹는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밤은 안전하다. 누가 나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밤에는 낭만이 있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면서 하나하나 별을 센다면 얼마나 로맨틱한가. 밤에는 자유가 보장된다. 남들이 행동 하나하나를 엿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밤의 잇점을 살리기 위해 밤에 익숙해지도록 밤을 사랑해야 한다. 나는 이 원리를 이용하여 낮에 충분히 재우고 야간활동을 권장한다. 더구나 월남 사람들은 시아스타라 해서 점심식사 후 낮잠을 잔다.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엣부터 내려온 풍습이다. 우리도 무더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처럼 낮잠 자는 것은 건강에 도움도 된다. 나는 한국군이 미군이나 월남군처럼  낮에만 작전할 것이 아니라  야간작전을 통해 밤의 주도권을 베트콩으로부터 빼앗아 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부드러운 명령이지만 예하 지휘관에게 자극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1966년 새해 들어 맹호 제1연대 재구대대에서 사단 전술책임지역에 인접한 푸캇,푸미 지역 적의 요충지에 대한 야간침투작전을 건의해 왔다. 채명신은 승인했다. 그리고 105미리 곡사포와 4.2인치 중박격포를 유사시 지원 할수 있도록 배치시켰다. 월남의 주 보급로인 1번도로를 늘 위협하고 있어 미군 차량이 빈번하게 폭파를 당하고 있어 그 북단에서 작전을 하고 있는 미 제1기갑사단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또한 맹호의 서측방을 늘 위협하고 있는 적의 주요 거점이었다.
 채명신은 야간침투작전의 첫 시도라 다소 걱정은 하면서도 의욕적인 대대장의 건의를 승인한 것이었다.
 대대장은  대대본부에서 10Km 떨어져 있는 용영일 대위가 지휘하고 있는 9중대를 야간침투작전 최초의 중대로 지정했다. 이미 9중대는 전략촌 빈탄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정찰을 실시하고 있었고 그 목표에 대한 여러 첩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재구대대장은 11중대가 9중대 반대편에서 이미 공격 계획을 세워놓았기 때문에 함깨 재구2호작전으로 묶었다.
 1966년 2월 16일 9중대장 용 대위는 밤이 깊어지자 목표지역 깊숙히 2소대를 매복시켰다. 적의 퇴로를 차단 타격하기 위해서 였다. 밤이지만 칠흑은 아니어서 행동에는 불편이 적었다. 이어서 3소대를 목표 좌단에 침투 배치 완료했다. 중대장 용 대위는 1소대와 화기소대로 하여금 전면에 배치함으로써 한 밤중에 적의 목표를 완전히 포위했다. 베트콩은 한국군이 밤에 침투하여 자기들을 포위하리라고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군이 밤에 침투해서 공격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5시 30분. 2소대는 소로를 따라 정면 공격하고 1소대와 화기소대는 좌측으로 공격했다. 포위망 후면에서는 적 자동화기 사격은 견제하기 위하여 1개 분대를 잠복시켰다.
 중대장 용 대위는 돌격 나팔을 불게 하고 돌격 신호에 따라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그 시간에 맞추어 재구대대에 배속된 105미리 곡사포와 4.2인치 중박격포는 일제히 포문을 열고 적의 퇴로가 예상되는 푸캇산 하단부를 강타했다.
 베트콩은 한국군이 야간에 침투해서 지기네를 공격하라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가  완전히 불의의 기습을 당했으므로 저항이 제대로 이루어질리 없었다. 적의 방어조직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적은 뿔뿔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도주하는 적을 2소대와 3소대가 매복지점에서 일제사격을 가함으로써 중대의 야간침투작전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작전에서 적 사살 37명. 포로3명, AK소총 7정, 장총 3정, M1소총 2정, 카빈소총4정을 비롯하여 많은 수류탄과 실탄 그리고 장비를 노획하였다.특히 이 작전에서 베트콩을 지휘 하고 있던 월맹군 1명을 생포했다.
 이어서 재구2호작전은 계속되었으며 이재태 대위가 지휘하는 11중대는 2월 26일 23시에 중대전술기지를 출발 다음날 새벽 2시에 중간 목표지역에서 전개하여 각 소대가 각각 분진하여 목표 외곽에 침투하는데 성공하였다.
 침투하는 동안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미줄처럼 얽힌 수로를 헤치고 목표를 완전히 포위한 후 여명을 기다렸다.
 날이 새기 시작하자 중대장 이 대위는 목표 치호와를 향해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재구대대 본부에서는 105미리 곡사포대와 4.2인치 중박경포로 포격을 시작하여  적 예상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때 작전지휘중인 이재태 대위는 적탄이 폐를 뚫고 늑골 두 개가 꺽인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끝까지 지휘하여 치호와 목표를 탈환 유린했다.
 이 전투에서 11중대는 적 41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였으며 기관총 1정, AK소총 8정, 로켓포 1문을 비롯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 두 작전을 통해 아군 피해는 중대장 이재태 대위를 포함하여 4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다. 이재태 대위는 중상이었지만 본인이 본국에의 후송을 마다하고 야전병원에서 치료후 다시 11중대장으로 복귀 중대를 지휘하는 충정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재태 대위의 이와 같은 군인정신에 감동하여 찬서를 보내와 이 대위를 위로했다.
 이 전투는 비록 재구대대가 실시한 두 번의 중대 규모 야간침투작전이었지만 월남전에서 최초로 야간침투작전의 성공 사례이고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베트콩으로부터 밤을 빼았앗다는 전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방부 발행 주월한국군전사 제1권 340쪽에는 이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군은 야간에 은밀히 적을 포위한 후 여명을 기하여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전투는 1월 17일에 실시한 빈탄전투와 2월 27일 치호와전투가 그 전형적인 예가 된 것이다.'
 그후 주월 한국군의 모든 부대는 야간 작전에 투입되면서 베트콩의 목줄을 조여가고 있었다.
 
◇외신기자가 본 초기 한국군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의 작전 방침과 전술개념이 전 주월한국군 장병에게 인식되면서 맹호사단 제1연대와 기갑연대는 각각 전술책임지역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속속 적을 무찌르고 있었다. 그 성공 사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세계 유명 외신 종군기자들이 경쟁적으로 맹호사단에 모여들어 밀착 취재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맹호의 재구2호작전을 처음부터끝까지 종군 취재한 시카고 트리븐 기자 체스리 맨리는 한국군 맹호사단의 작전과 '재구2호작전' 에 대해 1966년 3월 13일자 신문에 다음과 같이 게재하였다. 이 기사에 나오는 미 제1기갑사단의 '회이트 윙 작전' 은 미 제1기갑사단이 맹호사단 전술책임지역 북단에서 실시하고 있는 작전이었다. 당시 맹호사단 1연대 재구대대는 미 제1기갑사단의 '화이트 윙 작전' 의 일환으로 '재구2호 작전'을 실시하여 1번도로를 개통시켜 미 제1기깁사단을 도왔다. 
 

시카고 트리븐 기사 (요지) 

 '미국은 한국군 맹호사단이 월남전에서 가장 잘 싸우는 군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맹호사단의 대대장급 이상의 모든 지휘관은 미국의 포트 레븐 워즈, 포트 베닝, 혹은 기타 미국 군사학교의 장교 고급과정 (OAC)을 졸업했다. 한국군의 전술교리는 미국군의 전술교리에 기본적으로 따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은 독특한 한국군 전술교리와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콩은 호주군이나 날카로운 미군보다도 한국군을 더 두려워하며 공포에 떤다. 이 공포심은 그들로부터 노힉한 문서에 나타나 있다. 또한 전투를 통한 사망 비율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맹호사단이 참전 후 4개월 동안 한국군은 정확히 1,155명 (보디 카운트)을 사살했고 추정 사살은 1,173명이며 포로 466명과 용의자 2,085명을 체포하였다. 그 작전 기간 중 한국군의 피해는 전사 74명, 전상 234명, 실종(사체 미수습) 1명이 있을 뿐이다. 본 기자는 퀴논으로부터 1번도로를 따라 30마일 북방 지점에 있는 맹호사단 제1연대 3대대(在求大隊) 본부까지 찝차를 타고 갔다. 이 도로는 방금 개통되었으며 '화이트 윙 작전' 에 참가하고 있는 한국군 보병 1개 대대에 의해 확보되어 있었다. 이 대대는 퀴논으로부터 봉손 지역에 있는 미 제1기갑사단 예하부대까지 트럭으로 보급품을 수송할 수 있도록 경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단 3주 전까지만 해도 베트콩이 지배하고 있었던 이 도로 주변의 농촌은 안전하게 되어 있었다. '화이트 윙 작전' 의 일부인 한국군 대대의 이 도로개척작전에서 베트콩 사살 210명, 포로 32명,베트콩 용의자 131명 체포의 전과를 올렸다.

 본 기자와 채명신 장군과 여러 한국군 장교가 회합을 가진 자리에서 한국군은 월남인들의 학교와 집을 지어준다고 했으며 학교에서는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월남인들을 가깝게 해주며 적에 관한 첩보를 얻을 수 있겠금 해 준다고 했다. 정확한 정보는 한국군을 승리로 이끌게 하는 이유의 하나가 된다. 또하나의 성공 이유는 베트콩이 하는 것처럼 한국군은 주간에 휴식을 취하고 야간에 전투를 실시한다. 대부분의 월남군은 시아사타를 전후한 대낮에 베트콩을 수색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군 수색대는 주간에는 월남 농부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나가며 밤에는 베트콩을 잡기 위해 밖에서 매복한다.

 한국군 전술과 미군의 전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국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적이 도주하기 전에 2개 이시상의 방향으로부터 즉각적인 공격을 취하는 것이다. 미군은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으면 뒤로 물러나 포병지원사격을 요청하거나 공중 폭격을 요청한다. 그 다음에 공격하게 되면 통상 적은 자취를 감춘다.

 최근 실시된 두 번의 도로 주변의 적 소탕작전에서 맹호 제1연대 3대대(在求大隊)는 베트콩 부대에 대해 야간기습작전을 감행했다. 돌격하는 한국군은 매번 나팔을 불고 그들의 전투구호인 '맹호'를 부르짖으며 적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어둠 속에서 한국군은  적의 무기를 빼앗고 그들을 태권도로 박살냈다. 무기없이 싸운 전투에서 죽은 공산주의자는 두개골이 빠개지고 골반이 꺽여 있었다. 한국군은 손, 무릎,발을 사용하는 태권도로 사람의 목과 등을 부러뜨릴 수 있다.

 그들은 야간기습공격에서 한번은 37명의 베트콩을 사살하고 또 한번은 41명을 사살했다.'

 ( 이 기사는 그후 한국군 맹호의 분투상을 알리는 미국 국회 증언으로 채택되어 미 합중국 하원 국방위원장 국회 의사록에 수록되었다.)


 

 채명신은 재구대대 9중대와 11중대의 야간침투작전의 성공사례를 널리 교훈으로 알리기 위한 주요지휘관회의 석상에서 앞으로 야간은 물론 악천후를 극복하는 작전을 감행할 것을 강력히 지시 하였다.

 처음 맹호사단이 전술책인지역 인수 후 비가 쏟아진다고 하여 작전을 중지한 일부 부대들이 있었는데 채명신은 그 작전을 강행시켰다. 베트콩들은 비가 억수같아 쏟아지자 한국군이 작전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경계병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 느닷없이 기습을 감행한 맹호들에게 고스란히 잡힌 전례가 있었음도 상기 시켰다.

 예상치 않는 조건하에서의 기습작전은 성공 확률이 높은 것이었다. 채명신은 재구대대 9중대와 11중대의 야간침투작전 성공 사례도 그 맥락에서 교훈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를 주월한국군의 관용전술로 한다고 발표하였다. 채명신은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자 그자리에서  중대장 용영일 대위와 이재태 대위에게 각각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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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단 | 작성시간 14.01.27 채명신 장군의 독특한 대 배트공 작전은 그만의 오렌 전투겸험에서 울어나오는 기발한 작전에 미군의 지휘관도 인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읍니다. 밤은 배트공 새상이란 개념을 뒤엎은 것도 한의 예보겠읍니다.
    외신 기자들도 다 인정하는 기사를 써 줌으로서 한국의 맹호사단의 눈부신 전과가 새계에 알려진것에 가슴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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