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호5호작전의 서막
채명신 맹호사단장이 서울을 떠날 때 어느 신문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만약 한국군이 월남전에서 명성을 떨치지 못한다면 나 채명신은 사이공 강에 몸을 던지고 말겠습니다" 고 자신의 비장한 결의를 표명한 적이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한국군이 월남전선에서 과연 잘 싸울 수 있을까?. 라고 회의적인 생각을 한다." 는 기자의 질문에 답한 말이었다.
국민의 상당수, 특히 지식층에서는 한국군이 월남전선에서 미군보다 더 고전할 것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군보다 월등히 열악한 장비에다 화력과 기동력이 미군에 비한다면 절반도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세계 일류 군대로 알려진 프랑스 군이 디엔 비엔 푸 요새에서 월맹군에게 참패를 당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채명신 자신도 성공을 장담하면서 사이공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고비가 있으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6.25 전쟁시 게릴라전 경험을 살려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만은 확고히 가지고 있었다.
채명신 자신은 군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벅찬 임무를 띠고 간다는 결의 또한 대단했다.
채명신이 월남전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미군을 위시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채명신 스스로가 창안한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대해 회의의 눈초리가 외부에서 가해 왔을 때 채명신은 솔직히 가슴 조이며 하루하루 넘기는 것이 힘겨웠을 것이다.
1965년 10월 월남에 도착 이후 1966년 2월까지 5개월 동안 베트콩은 모든 중대전술기지에 크고 작은 기습을 시도했지만 맹호는 단 한 번도 기지 유린을 허락하지 않았다. 기지 밖 먼 잠복지점에서 또는 기지 근처 청음초에게 미리 발견되어 오히려 적들은 된서리를 맞고 줄행랑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채명신은 맹호 1연대와 기갑연대 그리고 청룡여단들이 초기 작전에서 기대 이상으로 활약한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생겼다.
지금까지 맹호사단은 제1단계, 제2단계 초기 작전을 통해서 전술책임지역 내의 대부분의 적을 소탕했다고 분석되었으나 가장 험준하고 암석 동굴이 많이 있는 푸캇산과 그 일대의 정글에는 평야지대에서 숨어들어간 베트콩이 병력보충을 받아 다시 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러나 맹호들은 그동안 잘 견디고 있었다.
특히 푸캇산 주계곡은 일명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어 과거 프랑스 군이나 월남군이 몰살 당했다는 말들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했다.
푸캇산에 은거하고 있는 적의 단대호는 E2B 대대로 알려졌으나 그 대대는 기간병력이고 그 밑에 여러 중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적은 오랜 세월 푸캇산과 그 일대 동굴 암석으로 뒤덥힌 정글 지대를 지배하면서 단 한 번도 점령 당한 적이 없는 미답 지대였기 때문에 월남군은 그곳을 베트콩의 성역이라고 말해 왔다.
맹호사단이 고보이 평야나 안논 평야 등을 완전히 소탕했다 하여도 그들의 본거지인 푸캇산과 그 일대의 정글을 소탕하지 않는 한 사단 전술책임지역은 항상 적의 위협을 안고 지내야 되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 작전계획은 한,미,월 3개국 군이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소탕할 계획이었으나 그후 미군측에 의하여 작전계획이 변경되어 한국군 단독으로 푸캇산과 그 남단에 이르는 100평방킬로미터 지역을 목표로 수확기를 맞이한 농민의 수확을 보호하고 적의 중요 식량 보급원을 차단하려는 목적에서 이 작전을 실시하기로 채명신은 결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작전은 제1연대 재구대대 9중대와 11중대가 성공시킨 바 있는 야간침투작전을 일부 전개하여 아군의 절대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를 감행한 후 기습 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린 섬멸작전을 계획한 것이었다.
작전지역은 사단전술책임지역 동북부 지역으로서 동으로 남지나해 북으로는 적 거점이 줄비한 송라산,투룽산,난산, 바산 등의 산악지대로 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1번도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남으로는 암푸강이 흘러 퀴논만으로 들어가는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그리고 이곳은 논과 습지대로 이루어진 중부 월남의 곡창지대인 동시에 푸캇산의 전략적 중요성과 함께 내외의 이목이 집중된 작전지대인 것이었다.
이번 작전은 맹호사단 제1연대 2대대와 재구대대. 기갑연대 3대대, 1대대 3중대, 2대대 6중대 등 13개 중대를 투입하는 한국군 최초의 사단 작전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
채명신 사단장이 이 작전을 계획하기까지 종합적인 상황판단 내역을 여기에 밝혀 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판단과 결심의 과정이 후대에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첫째, 사단전술책임지역 내의 지형과 적의 동태에 대하여 면밀히 분석 파악이 되었고 지역 내의 작전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둘째, 베트콩과 월맹군의 기본전략과 전술 그리고 제반 정치공작 등 그들의 상투적인 수법을 알게 되었으므로 능동적인 작전수행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셋째, 제1단계 제2단계, 즉 초기 작전을 통해 '물과 고기의 분리' 즉 양민과 베트콩의 분리가 상당히 성과를 보고 있어 정보 획득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넷째, 월남전의 특수성은 전선없는 전장이므로 계속 작전을 벌여 전술책임지역을 확대하는 길만이 월남평정계획에 기여할 수 있다.
다섯째, 이른바 초기 맹호 길들이기 작전의 성공으로 각개 병사의 사기가 높고 각급 지휘관이 작전 확대를 희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조건이 채명신 사단장의 사단규모 작전을 준비하게 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 작전은 채명신에 의해 맹호5호작전으로 명명되었다. 5호작전이라고 해서 다섯번째의 작전은 아니다. 이작전이 사단 작전의 첫 번째이면서 5호작전이라고 명명한 것은 채명신 사단장의 육사 기수가 5기생이기 때문이란 해석이 유력하다. 채명신은 그 물음에 웃음으로 답했을 뿐이다.
채명신 사단장에 의한 맹호5호작전계획이 주월미군사령부에 알려지자 고위 장성을 비롯하여 모든 지휘관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한국군 최초의 사단작전이기 때문이었다.
채명신은, 이 작전 초기에 투입될 13개 중대 외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탄력적인 병력 운영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미군 작전처럼 '치고 빼는 식'의 ' Hit and Run' 이 아닌 'Hit and Stay' 식으로 눌러 앉아 샅샅이 숨은 적을 색출하는 비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단 규모 야간침투작전
맹호5호작전은 주월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 이래 첫 사단 규모 작전이기 때문에 내외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동안 중대 규모의 수색정찰을 비롯하여 대대 단위 작전외 연대 규모의 작전도 없었다. 맹호5호작전은 그동안 미군 당국으로부터 눈총을 받아오면서 은밀히 추진해왔던 채명신 사단장의 비장의 카드였다.
이 작전의 준비명령은 1966년 3월 21일 제일 먼저 제1연대 재구 대대와 2대대에 내려졌다. 작전개시일 3월 23일 새벽 2시 30분을 기해 적의 목표 깊숙히 야간침투작전으로 적의 퇴로를 미리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당시 맹호사단 전투부대는 야간작전에 어느 정도 숙달이 되어 있어 야간침투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야간침투작전의 임무를 부여받은 맹호 2개 대대는 일제히 침투를 개시하여 여명 전에 목표지역에 진출 배치를 완료하였다. 적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적 도주로 한쪽을 차단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트콩은 맹호의 이와 같은 침투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비밀이 누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맹호사단이 초기 작전에서 월남군과 협조하는 과정에서 맹호측의 작전기도가 간혹 적에게 누출되어 적잖은 손실을 입었었다. 월남군의 내통자에 의해 베트콩측에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채명신 사단장은 월남군과 협조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D-day 를 통보하지 않았다. 그 탓으로 맹호 2개 대대의 적 후방 산개가 가능했다.
푸캇산의 베트콩이 야음을 이용해 고보이 평야 일대의 중요 전략촌에 잠입했다가 세포망 조직을 끝내고 푸캇산 본거지로 되돌아가는 베트콩 무리가 침투완료한 맹호의 각 중대에 발각되어 교전이 시작되었다. 준비없이 나타난 베트콩과 준비가 완료된 상태의 맹호와의 전투는 뻔한 것이었다. 일방적으로 베트콩 섬멸이 가능했다. 채명신 사단장은 맹호 주력부대에 공격명령을 내렸다.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맹호를 피해 달아난 베트콩은 미리 침투했던 맹호에게 다시 걸려 잠입했던 베트콩은 D+1일에 거의 섬멸되었다. 그러나 적의 E2B 대대는 아직 푸캇산 일대에 건재하므로 주력부대 색출을 위한 산악 동굴작전은 다음 사단작전에서 실시하기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당시 월남전의 성격은 당일 작전이 끝나면 일단 철수했다가 다시 출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군과 월남군이 그렇게 전투를 해왔다. 그러나 채명신은 진출선을 계속 그대로 지켜가며 철수하지 않고 끝까지 탐색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장병들은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다. 우기가 겹쳐 비가 내리면 추위에 떨어야 하고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진땀을 빼야 했다. 작전기간 중 미군 헬기는 식량과 물을 공급하기 위해 온종일 하늘에 떠다닌다. 한편 진출부대가 거점을 발견하면 필요시 공중지원이 가능하다. 6.25전쟁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입체작전이 전개되는 것이다.
별로 어렵지 않은 전투라고 생각하였으나 뜻밖의 어려움도 일어나고 있었다. 베트콩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 것이었다.
제1연대 2대대 5중대와 6중대 및 재구대대 10중대는 푸캇산 자락에 인접한 적의 전략촌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하다 예상 밖으로 저항하는 적으로부터 기습 사격을 받고 순식간에 5중대에서 3명의 맹호가 쓰러졌다. 여기에 분노한 중대장 박동원 대위가 돌격명령을 내렸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을 뚫는데 실패했다. 돌격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 목표는 유린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날의 작전에서 제2대대 5중대와 6중대 및 재구대대 10중대는 적 사살 75명 포로 148명,AK소총 등 총기 1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제2대대 5중대는 8명이 전사하고 16명의 전상자를 냈다. 박동원 대위가 지휘하는 2대대 5중대의 전투는 적 규모로 보나 전투방식으로 보나 정규전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3명의 소대장이 소대를 진두지휘, 돌격을 감행하다 차례로 전사했다. 소대장이 전사하자 일제히 적 본거지에 돌진 순식간에 적 거점을 유린 탈취하는데 성공했다.
5중대의 이 전투를 통하여 다시 맹호에게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실패한 돌격선에 축차적으로 동일 돌격선에의 돌격이 빚은 안타까운 희생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용감성만으로 적을 유린하는 방식에 대한 후회가 따랐다.
재구대대 각 중대는 계획된 진격선을 따라 소탕을 계속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용영일 대위가 지휘하는 재구대대 제9중대가 도주하는 적을 양면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9중대가 적으로부터 최초로 최신형 M16소총을 노획했다. 아마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미군은 M14소총을 장비하고 있었으나 신형 M16소총으로 교체 중이었다.
신현수 대령이 지휘하는 기갑연대는 각 대대가 전개하면서 순탄하게 탐색전을 전개해 갔다.
광활한 사단 작전지역 곳곳에서 소탕작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고 놀랄만한 전과는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 어려운 문제를 만났다. 기갑연대 제3대대 11중대는 계획대로 야간침투를 통해 목표에 접근하여 322고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전날 2대대 전투에서 희생된 전우의 시체 5구를 찾지 못했다. 보고를 받은 채명신은 즉각 헬기로 현장으로 날아갔다. 대대장과 중대장의 보고로는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교전지역에서 철수하다 일어난 불상사라고 했다. 채명신은 처음으로 대 노했다. 이렇게 노한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한 부하 장병들은 모두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전투 중 전상을 입은 전우나 전우의 시체를 적 영향권 내에 버리고 나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더 많은 희생 더 많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100% 회수되어야 한다. 이는 나의 확고한 지휘방침이다"
이어서 시체 회수작전에 들어간 대대는 야간침투로 현장에 잠입케 해서 전우의 시체 5구를 찾는데 성공하였다. 채명신은 전우의 시체 회수 작전 결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긴장하고 있다가 이 보고에 접한 후 가슴을 쓸어 내렸다.
맹호5호작전의 실전 상황은 전장 곳곳에서 맹호들에게 교훈을 남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채명신은 성공과 실패의 전례 하나하나를 모두 취합해서 장려할 것은 장려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케하는 교재로 삼았다.
맹호5호작전은 사단 규모의 대부대가 일제히 야간침투작전에서부터 전투를 시작했다는데 의의가 있었다.
국방부가 이 작전을 분석하여 편찬한 주월한국군전사 제1권 374쪽과 375쪽에는 맹호5호작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작전에서의 야간 대부대침투는 1905년 러일전쟁 때 궁장령(弓張嶺)에서 일본군이 실시한 사단규모의 것과 1916년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베르단(Verdn)에서 실시한 것을 제외하고는 세계 전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부대 야간 침투 작전인 것이다. 즉 본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총 21개 중대 중 13개 중대를 작전 지역에 투입하고 나머지 8개 중대로써 TAOR(전술책임지역)내에서의 기본임무를 수행하였다.'
맹호5호작전에서 적 사살 331명,포로 287명의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장교 4명을 포함한 40명의 전사자와 67명의 전상자를 냈다.
◇중대전술기지개념의 승리
맹호사단 최초 파병시 해병대 파병을 위해 본국에 남기고 온 제26연대가 1966년 4월 19일 박완식 대령이 지휘하여 월남에 도착하였다. 비로소 맹호사단은 완전 편성 사단으로 그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그동안 한국군이 월남에서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잘 싸우고 있고 월남 평정계획에 의한 임무수행이 미군보다 효과적이라는 분석이 미군과 월남군 측에서 나와 이루어 진 것이었다.
채명신 또한 사단을 운영하는데 있어 1개 연대가 부족하여 넓은 전술책임지역의 평정사업을 위해 완편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한,미,월 3개 국이 다 같이 원해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맹호사단 제1연대와 기갑연대는 각각 전술책임지역 내의 수색정찰을 강화하면서 평정지역 내에 다시 세력을 확장하려는 베트콩의 침투를 차단하고 쌀 수확기인 4월 한 달을 수확보호작전으로 정하고 적극적으로 평야지대의 농민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편 새로 도착한 맹호사단 제26연대는 새로 부여 받은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각 중대별로 중대전술기지 구축 공사에 들어갔고 병행해서 현지 작전에 익숙하기 위한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무렵 주월미군사령부에서는 한국군이 전술책임지역 내에서 만 한정된 작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있었다. 보다 다른 방법으로 한국군이 역할을 해주기로 원하고 있었다.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미군측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할 수 없어 다른 임무 하나를 협조해주기로 했다.
투코는 중부 월남과 캄보디아와의 국경지대 부근으로 월맹군의 이른바 호치민 루트를 거쳐 월남에 침투하는 경로상의 요충지였다. 월남의 플레이크성과 캄보디아의 라타나아키리 주가 접한 국경선 동편의 19번도로와 아드랑 강 사이에 있다. 이 일대는 표고 200내지 300미터 정도의 나지막한 산이 원시림으로 덮여 있고 많은 샛강이 얽혀 있었다.
이 지대에서 오랫동안 주둔하고 있던 공산군들은 지형에 익숙하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자유자재로 활동함으로써 미군과 월남군으로부터의 위협을 덜 받고 있었다. 특히 적들은 상황이 불리하면 캄보디아 영토 내의 이른바 적들의 성역으로 퇴각하여 결정적인 타격이 힘들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 기갑연대의 제3대대가 가게 된 것이다. 미 재1야전군은 1966년 3월 25일부터 그 예하의 제1공중기갑사단과 제25보병사단을 캄보디아 국경선 부근의 이 일대에 투입하여 월맹군과 베트콩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전투지대의 넓이에 비하여 가용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극심한 애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 지역에 새로운 미군부대를 전개할 때까지 약 2개월간 한국군 1개 대대 병력을 제25보병사단에 배속시켜 달라는 미 제1야전군사령관 라슨 중장의 간곡한 제의가 있었다.
라슨 장군은 "한국군을 미군의 작전지휘하에 두지 않으면 작전을 못하겠다"고 강력히 반발했던 장본인인데 채명신의 설득을 받아들여 본인의 주장을 꺾기 까지한 협조적인 장군인데 그의 최초의 요청을 채명신은 거절할 수 없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채명신은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한국군은 그 지역에서 준동하는 월맹군과 베트콩 부대보다 기본화기가 월등히 열세하다. 적은 AK자동소총으로 무장되어 있는데 우리는 M1소총을 가지고 있어 무겁고 단발이다. 전차도 없고 통신장비도 구형이다. 그런 제한 때문에 미군처럼 기동작전은 버겁다. 그래서 한국군 대대에 전술책임지역을 부여하고 그 안에서 임무수행을 하도록 해 달라. 또한 미군 포병화력의 지원사격권내에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해 달라"
채명신의 요구조건을 라슨 장군이 수락하자 채명신은 기갑연대 3대대를 약 2개월간 미군에게 작전배속토록 명령하였다.
3대대장 최병수 중령은 현지 부대장인 제3여단장 워커 준장의 작전 통제를 받게 되었는데 워커 준장은 처음 약속과는 달리 미군처럼 마음대로 운영할 것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최 중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최 중령의 고집대로 전술책임지역내에 중대별로 중대전술기지를 설치하였다. 중대전술기지에 필요한 48시간 동안 지탱할 수 있는 탄약 등 필요 보급량을 여단장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최 중령은 적과의 교전 등을 조작하여 보고 함으로써 소요량 확보를 마쳤다.
제9중대 전술기지에 적은 야음을 이용하여 기습공격을 가해 왔다. 채명신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에 대한 전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9중대를 포위한 적은 강력한 박격포탄 공격으로부터 시작하여 인해전술로 전 방향에서 공격해왔다. 지금까지 한국군 전술책임지역에서의 중대전술기지의 기습형태와는 달리 중대전술기지를 박격포탄으로 유린하면서 파상 인해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대대장의 요청에 의해 미군 포병화력이 동원되어 쌍방의 포탄이 작렬하면서 전장은 피로 물들고 있었다. 9중대 장병은 채명신 사단장의 중대전술기지 방어수칙에 의해 사격으로 제압하다가 진전까지 도달한 적에게는 수류탄 공격으로 제압해 갔다.
적은 수류탄에 의해 계속 죽어가면서도 다음으로 다음으로 파도처럼 계속 밀려왔다. 그러나 절대 열세로 싸우는 9중대 장병에게는 견고하게 구축한 참호가 있어 보호되는 반면 적은 노출되면서 접근하고 있었으므로 적이 불리한 형국이었다.
9중대 전술기지에 대한 적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이 전투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적이 물러간 캄보디아 국경에 이르는 정글지대는 부상병을 끌고 간 자리가 피로 물들여 있었고 끌고 가던 부상자가 죽자 그대로 방치한 시체, 그리고 무기와 탄약 등 유기물이 깔려 있었다. 더구나 중대전술기지 외곽을 둘려 싼 철조망에는 적의 시체가 세탁물처럼 걸려 있었다.
종합적으로 확인한 결과 적의 유기 시체 187구, 포로 6명, 60미리 박격포 6문, 40미리 대전차 로켓포 12문, 기관총 10문, AK자동소총 43정, 장총19정, 수류탄 563발, 각종 포탄 500여 발, 소화기 실탄 14만여 발,TNT300여 파운드 등과 산더미처럼 쌓인 각종 장비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전사 7명과 전상 42명이었다.
이 전투에서 9중대장 이춘근 대위의 침착한 지휘는 위급한 상황 중에서 단연 돋보였고 적의 악착같은 파상공격에 무전기로 전 중대원에게 독전하기를
"최후의 일인까지 싸워 기지를 사수하라 !, 돌파 당하면 모두 죽는다." 며 비상한 결의로 결사 항전을 촉구했었다.
그후, 이 전투 현장을 둘러본 미 야전군사령관 라슨 중장과 미 제3여단장 워커 준장을 비롯하여 미군과 월남군의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감탄하면서 "믿어지지 않는 기적이며 월남전에서 새로운 기록과 전통을 남기게 되었다"고 격찬하였다.
세계의 많은 언론들은 이 기적같은 승전보를 보도하기에 바빴고 이를 계기로 한국군의 위상이 크게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지난날, 채명신이 창안한 중대전술기지개념의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대해 미군과 월남군이 다같이 "그것은 위험한 발상이며 베트콩이나 월맹군의 전략과 전투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 기인한다"고 끈질기게 반대를 해왔었다. 특히 미군 장성들은 채명신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고보이 평야에서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도 그래도 문제는 있다고 관망하면서 "좀 더 두고 보자"고했던 차에 두코전투에서의 승전보를 확인한 다음부터는 전적으로 채명신을 신뢰하게 되었다.
한편 포로들의 심문으로 9중대를 공격한 적은 베트콩 제308사단 제88연대 제5대대로 밝혀졌고 병력 규모는 4개 중대 약 400명과 박격포,무반동총,공병 특공대 등 3개 중대 300명이 증강된 7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첫 군사부문 한국학의 탄생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겸 맹호사단장이 창안한 전술개념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는 야간 침투 작전 개념과 중대 전술기지개념 이 두 가지는 단 한 번도 실행된 바 없는 새로운 전술개념이었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성공한 작전이 바로 재구2호작전에서의 재구대대 9중대와 11중대의 야간침투작전이었고 기갑연대 3대대 9중대의 투코 전투에서의 중대전술기지 방어였다.
미군과 월남군으로부터 회의의 눈총을 받았던 이 새로운 전술개념의 작전 성공은 세계의 군사학계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며 세계 유명 언론 매체들은 이 기적과 같은 맹호의 활약상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비록 중대단위의 소부대의 승전보였지만 그 전술개념 자체가 압도적 전승으로 이어졌다는 면에서 놀라운 보도 가치를 생산할 수 있었다. 이 두 작전개념의 성공으로 채명신 장군은 단번에 세계 명장 반열에 올랐고 한국군은 삼류군대라는 오명을 벗게 되었다.
미군과 월남군은 야간작전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면서 야간 수색정찰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중대전술기지개념을 얕잡아 보던 미군측도 중대전술기지를 '파이어 베이스(Fire Base-화력기지)' 라고 명명하면서 그 전술적 운영에 대한 연구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자유중국(지금의 대만) 국방부장 장경국은
"베트남전선에서 한국군은 미군 군사교리가 아닌 한국군 독자 전술교리로 작전에 임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승첩에 감탄해 맞이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자유중국군은 그 새로운 전술교리를 배우기 위해 교수진을 초청합니다"라는 서한을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앞으로 보내왔다.
채명신은
"본인은 야전지휘관이므로 국제간 교류를 승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본국 정부에 교수단 파견을 요청할 것을 제의합니다" 고 정중히 회답해 주었다.
이 통보를 받은 자유중국은 장개석 총통의 명의로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내왔다.
"월남전에서 귀국의 맹호사단이 미군 군사교리에 의존하지 않고 한국군 독자적 전술교리를 개발하여 전투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전술을 사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 승리를 이루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한국군이 창안한 그 새로운 전술교리를 우리 중국 군대는 배우고자 합니다. 따라서 교수단 파견을 요청하오니 협조 바랍니다."
이 서한에 따라 본국에서 교수요원 추천을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에게 요청해 왔다. 채명신은 3명을 추천하였다. 첫째 교수단장으로 초대 맹호사단 참모장을 역임한 최영구 준장, 전임 교수로 맹호사단 제1연대 제1진 재구대대장을 역임한 박경석 대령, 기갑연대 제1진 3대대장을 역임한 최병수 대령이 그들이다. 그들은 야간침투작전과 중대전술기지작전에서 승첩을 성취케한 당사자들이다. 육군본부는 즉각 교수단 구성을 승인하고 1968년 7월 22일부로 자유중국으로 출장명령을 내렸다.
한국군 교수단은 1968년 여름에 자유중국에 파견되어 삼군대학교를 비롯하여 자유중국군 영관급과 장성급 전원에게 강의함으로써 창군 이래 최초로 군사부문 한국학을 외국에 전수하는 역사적 쾌거를 이룩하였다.
직접 강의에 나선 두 대령은 강의 내용과 일치하는 실전에서 유감없이 새로운 전술개념을 구현하여 승첩을 거둔 당사자들이다.
이 두 교수의 강의를 지원하기 위하여 채명신은 그의 보좌관 안수성 대령을 통역으로 보냈다. 안 대령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부군(장개석 군대) 육군중위 경력의 소유자로 중국인과 다를 바 없이 중국어를 구사한다. 박경석,최병수 두 교수는 과거 육군대학에서 명강의로 이름을 떨쳤고 명예롭게 콤비가 되어 다시 자유중국에서 순회 강의에 들어갔다. 강의는 지역 군단급 부대 단위로 실시되었다.멀리 금문도까지 가서 강의를 했다.그들 강의가 중국군 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중국군도 기존 교리에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들 강의를 듣고 새로운 전술개념의 계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 이전까지는 모든 군사학문이 전적으로 미국의 군사교리에 의존했으나 채명신 장군에 의한 이 창안 전술개념으로 비로소 군사부문 한국학이 탄생하였다.
◇동굴 탐색작전의 승첩 맹호6호작전
맹호5호작전이 끝나고 그 놀라운 성과가 세상에 알려지자 그 반응이 세계 군사학계를 비롯하여 메스컴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주월한국군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채명신 소장을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주월한국군사령관 직위만 전담케 하고 맹호사단장에 유병현 소장을 임명하도록 조치하였다.
맹호6호작전은 맹호5호작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미 채명신 맹호사단장에 의해 작전개념이 정립되어 있었고 기동계획까지 수립돼 있었다.
맹호6호작전은 빈딘성 베트콩의 주력인 E2B대대와 이를 지원하는 월맹군 지도부의 본거지로 알려진 푸캇산과 그 주변 일대의 암석동굴과 정글에 주목표를 두었다. 이 목표지역은 미군이나 월남군이 한 번도 얼씬거리지 못한 미답지로서 해발 892미터의 바산을 정점으로 하여 평균 표고 300미터 이상의 고지군이 정글로 덮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연동굴과 암석지대가 수없이 이어져 방자에게는 유리하지만 공자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얼마나 넓고 험악한 동굴이 많은지 아무리 많은 병력이라도 일대에 숨어버리면 흔적도 보이지 않을 만큼 험준하였다.
맹호6호작전의 적은 베트콩 E2B대대의 5개 중대를 비롯한 베트콩 5개 독립중대,그리고 월맹군 제22연대의 1개 대대, 그리고 이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지방 베트콩 등 모두 15개 중대 병력 규모로 판단되었다. 특히 이들 부대를 증원 가능한 적은 베트콩 E210대대로 지목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위협은 적은 것으로 보았다.
맹호6호작전에 투입될 보병대대는 제1연대에서 재구 대대와 1대대가 결정되었고 새로운 작전에 첫 투입되는 제26연대의 1대대와 2대대로 결정되었다. 1연대 재구 대대는 맹호5호작전에 이어 맹호6호작전에 계속 투입되는 유일한 보병대대였다. 1966년 9월 23일 배정도 중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 1대대는 야간침투작전 및 공중기동작전으로 푸캇산의 북단을 차단했고 박경석 중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 재구 대대는 야간침투작전으로 고보이 평야 끝자락 푸캇산과 연하는 지대에 공격 개시선을 정하고 산개했다.
제26연대의 2개 대대는 해안선에 연하는 푸캇산 자락에 공중기동작전으로 산개 차단진지에 배치하였다.
지금까지의 구도는 광활한 푸캇산을 맹호의 보병 4개 대대가 포위망을 구성하고 공격준비가 갖추어진 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어서 명령에 의해 일제히 4개 보병대대가 푸캇산을 향하여 수색작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정밀 수색을 해도 적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모두 이 상황에 대해 여러가지 추축이 난무했지만 결론은 없었다.
이무렵 제26연대 수색대에서 도망가고 있던 농부 차림의 괴한을 잡아 그로부터 적의 문서를 노획하였다. 그 문서에 의하면 '적이 공격할 것이다.그러나 상대가 맹호다. 저항보다 일제히 분산해서 동굴 깊숙히 숨어라' 는 내용이었다. 유병현 사단장은 그 문서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적은 분명히 지대 내 암석지대에 숨어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무렵 사이공에서 헬기로 날아온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 사단 OP에 도착했다. 사단장의 보고를 받은 채명신은 "작전 일자에 구애받지 말고 푸캇산 일대에 눌러 앉아 동굴수색에 돌입하라"고 사단장에게 지시했다. 맹호 4개 보병대대는 일제히 진출을 멈추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석지대 탐색에 투입되었다.
9월 27일. 제1연대 재구대대 10중대는 푸캇산 록칸 계곡에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암석지대를 발견하였다. 3소대는 그 가운데 사람 흔적을 발견한 동굴에 수류탄을 집어놓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예상은 맞았다.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이에 특공조를 진입시켜 수색한 결과 놀라운 현장이 목격되었다. 동굴 내에는 시체 23구가 흩어져 있었고 소총 16정을 비롯하여 18정의 개인화기를 노획했다. 맹호6호작전 첫 승전보였다. 이에 모든 맹호들은 자신감을 얻고 일제히 동굴 탐색에 박차를 가했다.
이 보고에 접한 연대와 사단은 즉각 긴장했다. 적이 도주한 것이 아니라 지대 내 천연동굴에 숨어있는 것이 직접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4개 보병대대는 확신을 갖고 일제히 동굴탐색에 전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각 대대는 곳곳에서 전과가 확대되어 갔다. 비로소 D+5일부터 적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9월 28일. 제1연대 1대대 3중대에서 작전 중 적으로부터 노획한 문서가 긴급히 사단에 보내졌고 내용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보고 된 문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지시사항
9월 22일 DEB대대본부
1. 적은 푸캇산 일대에서 상당한 기간 작전을 계속 할 것이다
2. 적은 DeGi까지 진출할 것이다.
3. 지대내의 모든 부대는 적이 진격하면 결전을 회피하고 동굴에서 대피하다가 적이 철수시 측방과 후방에서 신속히 강타하라.
위 적 문서는 매우 놀라운 사실을 담고 있었다. 왜냐하면 맹호사단이 작전 기도를 비닉하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맹호6호작전에 관한 계획을 철저히 비밀로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9월 22일이라면 작전 개시 하루 전인데 베트콩이 미리 아군의 공격 기도를 알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었다. 특히 DeGi는 사단 공격의 최종 목표였다.원래 대대급 이상의 작전시에는 빈딘성과 월남군 제22사단에 알리도록 되어있었다. 그 과정에서 적에게 누설된 것으로 판단되었다.앞으로의 작전시 보안문제가 특히 강조되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이 문서에서 얻은 것도 있었다. 바로 동굴에 숨어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아군 철수시 적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히 강구할 수 있었다.
맹호 4개 보병대대 외에 추가적으로 다시 2개 보병대대가 투입된 동굴 수색작전은 곳곳에서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다. 1966년 9월 23일 시작하여 11월 9일 종료됨으로써 장장 48일간에 걸쳐 월남전 사상 가장 긴 작전으로 기록되었다.작전기간 중 32일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맹호6호작전에 참가하고 있는 장병의 고생은 극심하였다. 그러나 모두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이 작전에서 적 사살 1,161명. 포로 518명. 공용화기 43정, 개인화기454정, 수류탄 963발 등 산더미 같은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한편 아군 피해는 전사 30명, 전상 115명이 발생하였다. 맹호5호작전에 이어 다시 맹호6호작전의 승첩으로 주월한국군은 세계 일류 군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었다.
이에 주월미군사령부는 한국군에게도 최신 장비로 무장시켜야 되겠다고 미국정부 당국에 보고 하여 승인됨으로써 최신 M16자동소총이 한국군에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맹호6호작전은 한국군이 2차대전 당시의 장비인 M1소총과 카빈 소총으로 싸운 마지막 전투였다.
한편 맹호사단 제1진이 참가한 마지막무렵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끝으로 제1진 장병들이 속속 귀국선에 몸을 싣고 있었으며 새로운 맹호가 전입되기 시작하였다.
◇독단전횡을 승인하다
한국군 전투부대가 월남전에 참전한 기간동안 많은 작전에서 여러 부문 신기록을 창출하였다. 한편, 그 활약상이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세계 유명 언론 매체들이 한국군의 분전상을 다투어 보도하였는데 주로 맹호5호작전과 맹호6호작전이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성과 때문이었다.
첫째, 한국군 독자적으로 개발한 여러 전술들을 유감없이 적용하여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둘째, 두 작전은 한 달을 훨씬 넘는 긴 기간 작전이 계속되면서 미군의 작전방식과 달리 'Hit and Stay'즉 타격 후 눌러앉아 적을 샅샅이 수색 섬멸하는 새 전술이 빛나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셋째, 가장 넓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넷째, 미군 월남군 보다 월등히 많은 전과를 올려 맹호사단의 위상을 높였다.
다섯째, 전과에 비해 미군과 월남군보다 훨씬 적은 희생을 기록하였다.
맹호의 신화 창출은 바로 이 맹호5호작전과 맹호6호작전을 통해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주로 맹호사단 제1진에 의해 창출된 결과였다.
재구대대는 맹호6호작전 초기에 9중대를 중대기지에 남겨두고 대대장 지휘하에 10중대,11중대,12중대만으로 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의 특징은 주로 헬기에 의한 공중기동작전으로 이루어지며 막대한 화력으로 목표지역을 제압하고 공중기동으로 목표에 랜딩하는 현대적 전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한국군 또한 요청만 하면 공중폭격은 물론 원하는 만큼의 헬기가 지원된다.이러는 동안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현대적 작전수행에 익숙해졌고 그 운영에 통달할 수 있었던 절호의 학습장이 되어주었다.
1966년 10월 1일,작전명령에 따라 작전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던 재구대대 9중대를 작전에 투입하게 되었다.바로 전형적인 베트남전 미군 전술에 따른 공중기동작전으로 푸캇산 정상에 랜딩시켜 아래로 내려오면서 다른 재구대대 중대와 포위망을 구성하여 적을 격멸하라는 작전명령이었다.
9중대장 용영일 대위에게 명령을 하달한 후 공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대장이 야전대대지휘소로 대대장을 찾아왔다.뜻밖에 그는 공중기동작전 취소를 건의해왔다.이유인즉,헬기를 사용한 공중기동작전은 적에게 도망가라는 예고이니 적을 격멸하려면 힘이 들더라도 정글을 헤치고 야간 침투 작전으로 은밀히 목표지역에 접근,적 본거지를 기습으로 타격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대대장은 중대장의 의견과 같았다.그러나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를 정글의 험로를 헤쳐 나간다는 것은 부하 장병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일단 만류했다.더구나 작전명령이 하달된 마당에 작전계획의 변경은 대대장 권한 밖이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지휘 절차에 따라 연대장에게 그 사유를 설명했더니 예측한대로 펄쩍 뛰면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더구나 사이공 근교의 미군 헬기 기지에서 20대의 헬기가 이륙해서 대대로 비행 중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대대장은 어떤 예감이 번쩍 빛났다.'용영일 대위라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대대장은 이때 작전명령 위반이라는 암벽에 부닥치고 있었으나 승리의 예감에 따라 독단전횡(獨斷專橫)의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용영일 중대장에게
"공중기동작전을 취소하고 정글 험로를 개척해서 야간침투작전으로 적에 접근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대장은 결의에 찬 목소리로 "즉각 공격하겠습니다"고 다짐하며 거수경례를 하고 대대장 곁을 떠났다.
9중대는 용영일 대위 지휘하에 야음을 이용하여 정글의 험로를 개척하면서 적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야간침투작전으로 결전의 전장으로 향했다.
얼마 후 지휘소 아래 넓은 벌판에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20대의 UH-1헬기가 차례로 착지했다.엔진을 끄지 않은 채 병력 탑승을 기다리고 있던 미군 헬기 조종사 책임장교에게 대대 작전관이 다가가 '헬기가 필요없으니 돌아가라'고 통보했다.그러나 미군 헬기 조종사는 작전관의 통보에도 헬기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날개를 돌리고 있었다. 다시 작전관을 보내 알아보니 "작전명령에 의해 임무를 부여받고 왔으므로 사이공 미군사령부의 지시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여기저기서 유선 무선 가릴 것 없이 문의,항의,힐책 등 전화가 빗발쳤다.대대장은 일체 통화에 응하지 않고 정보관 권준택 대위를 통해 "모든 책임은 대대장이 진다"는 메시지만 전했다.
해가 질 무렵 헬기는 이륙하기 시작했고 그 무렵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전화가 왔다는 정보관의 말에 귀가 번쩍 떴다.
대대장이 작전명령에 따르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중기동작전을 취소했기 때문에 직속상관 계통뿐만 아니라 주월미군사령부에서까지 문제가 확대되어 시끄러워지고 있었다.대대장은 심각히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의 무거운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경위를 설명하라" 는 것이었다. 대대장은 차분하게 그간의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했다.끝으로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라고 보고를 끝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대대장은 어떤 처벌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맹호6호작전은 사단장 지휘하의 작전이지만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작전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최고 명령권자는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이다.채명신은 이 문제에 얽힌 내용이 복잡하므로 결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대대장의 경위보고를 들으니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항명이므로 전투상황에서는 용인될 수 있다는 쪽으로 마음을 잡았다.
"좋다,대대장의 작전계획 변경을 승인한다"
대대장은 그 소리에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그리고 대대작전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제 명령 위반 책임은 면했지만 작전의 성공여부만 남았다. 대대장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꼬박 밤을 새웠다.사방에서 포성,기관총 연발음, 하늘은 밤새도록 붉게 물들었다. 먼동이 트자 낭랑한 9중대장 용영일 대위의 무전 목소리가 대대장의 귀에 울렸다.
"대대장님,기습에 성공했습니다"
월맹군 1개 중대를 격멸한 승첩이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헬기의 향방만 좇던 월맹군 경비병이 야음을 이용하여 험한 정글을 헤치고 포위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월맹군 중대의 야영지는 9중대의 기습으로 월맹군이 갈대처럼 쓰러져 갔다.속수 무책이었다. 도주하는 월맹군은 반대쪽에 배치된 차단막에 걸려 사살되었다.
이 기습작전으로 9중대는 36명의 적을 사살하고 12명을 포로로 했다. 또한 기관총 2정을 비롯하여 AK자동소총 11정. 소제 장총 13정 등 많은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기습작전을 통해 9중대는 8명의 전상자를 냈을 뿐이다. 야간침투작전의 통쾌한 승전보였다.
이어지는 중대장의 보고 내용은 대대장의 귀를 의심할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전과였다.이어서 제10중대장 이정린 대위의 보고 또한 승전보였다.
이정린 대위는 육사17기로 재구대대 3대 10중대장이다. 첫 제10중대장 육사16기 강재구 대위는 강원도 홍천에서 파월을 준비하는 훈련장에서 많은 부하를 살리고 살신성인의 신화를 남기고 순직했고 2대 이규봉 대위는 맹호6호작전 직전 임기가 끝나 귀국해 그 후임으로 부임하자 마자 작전에 참가했는데 첫 전과 또한 엄청난 승리였다.
이어서 제11중대장 이재태 대위 또한 승전보를 보고해 왔다.이재태 대위는 맹호5호작전시 작전지휘 중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작전을 지휘해 그 보도에 감동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격려의 친서를 받은 바 있는데 야전병원에서 치료가 끝난 후 다시 중대장으로 자진 복귀하여 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용영일 대위가 지휘하는 제9중대는 정글을 헤집고 적 기지에 접근하여 포위망을 형성 일제히 기습사격을 퍼부어 월맹 정규군 중대를 격멸하였다.적은 대공감시를 계속하면서 헬기의 향방만 찾고 있던 차에 제9중대의 뜻밖의 방향에서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적은 당황한 나머지 모든 활동이 노출됨으로써 제10중대,제11중대,제12중대 등 재구대대 모든 중대들이 전과확대를 기할 수 있었다.
1966년 10월 2일.오전 10시경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사이공에서 헬기로 재구대대 CP로 작전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들이닥쳤다.
연대장,사단장은 대대 CP에 미리 도착해 있었다.이윽고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을 비롯 모든 직속상관이 긴장된 표정으로 대대장의 부리핑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때 때를 맞추어 대대장의 지휘봉 신호에 따라 멀리서 대기하고 있었던 9중대장 용영일 대위가 중대원과 함께 많은 월맹군 포로와 박격포,기관총 등 노획무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지휘관들 전방에 열 지어 나타났다.대대장은 직속상관에게 9중대장의 분투상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대비해 두었었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위시한 직속상관 일행은 순간 눈이 휘둥그러졌다.금세 놀라움과 함께 감동과 환희로 충만한 축제장으로 변했다.
대대장은 브리핑 결론을 맺으면서
"존경하는 채명신 사령관님,만일 작전계획에 따라 공중기동작전으로 9중대를 투입했더라면 저런 전과를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작전명령을 위반한 것이 사실이므로 여기에 임석하신 모든 직속상관에게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라고 말문을 닫았다.
사단장과 연대장은 대대장의 건의를 시종 반대했던 탓인지 어색하게 멀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채명신 장군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벌떡 일어나더니, 대대장 앞으로 다가와 덥석 대대장을 포옹하면서
"재구대대는 끝내 해냈구나,과연 자랑스러운 재구부대장이다" 하며 대대장을 축복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