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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채명신

Ⅱ부. 베트남 정글에서 제8장 백마사단 증파와 초기 작전

작성자서현식|작성시간14.01.20|조회수457 목록 댓글 1

◇백마사단 파병과 배치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이 사이공에 사령부를 개설한 후 퀴논의 맹호사단 지역을 돌아보면서 느낀 첫 과제가 고국에 있는 한국군 현대화 문제였다. 당시 한국군의 모든 장비는 낡을대로 낡아 고체하거나 폐기해야 할 장비가 대부분이었다. 병 기본장비인 M1소총은 세계2차대전 것으로 북한 인민군의 AK소총보다 구형이었다. 트럭은 물론 지휘에 사용되는 찝차도 교체기한이 훨씬 넘긴 고물차였다. 어디 그뿐이랴. 일반 장비도 미군이 쓰다 남은 연한이 지난 것이 들어와 규격이 제각각 이어서 어디에 내놓을 수 없는 거지꼴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는 돈이 없었다. 이런 형편을 보다가 월남에 와보니 딴 세상이었다. 병 기본 화기는 2세대 M14소총을 지나 3세대 M16소총으로 바뀌고 있었고 헬기를 비롯한 기동장비는 생전 보지도 못한 신형 일색이었다. 더구나 채명신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있다가 월남에 왔으므로 누구보다 고국의 한국군에 대한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맹호사단을 비롯한 주월한국군의 다른 부대는 미군과 협조만 잘하면 모든 장비가 신형으로 지원 받을 수 있어 금세 구태를 벗어 새롭게 변하는 것이 흐믓하였다. 더구나 전투부대가 2세대 소총을 뛰어넘고 3세대 소총인 M16소총을 장비할 수 있게 된 순간 채명신의 머리 속에 뭔가 번개처럼 스치는 충격을 느꼈다. 한국군 사단의 월남전 증파의 필요성이 직감으로 다가 온 것이다. 만일 1개 사단만 더 파병된다면 비단 그 사단 뿐만 아니라 현대화가 전체 한국군에 미칠 수 있다고 착안한 것이다.

 그무렵 주월미군사령부나 월남군사령부에서도 주월한국군이 예상 외로 잘 싸워주고 있어 한국군 사단의 증파가 서서히 논의되고 있었다. 이 기미를 고국의 군 고위층에 알려 1개 사단의 증파에 대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

 채명신의 두 번째 과제는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데 월남전 만큼 좋은 무대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미국이 자금을 무제한으로 쏟아붓고 있는 월남은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자금원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미 맹호사단 1개 사단만 해도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직접적으로 조변되는 군수물자로부터 시작하여 한국 기업의 용역 등 그리고 장병의 전투수당까지 합치면 고국의 경제개발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판단 한 것이다. '1개 사단만 증파된다면 그 효과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확실한 판단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세 번째 채명신의 과제는 한국군의 전투경험 축적이었다. 바로 현대전의 학습장이 월남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금처럼 채명신이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는 이상 미군과 같이 많은 희생을 내지 않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1개 사단 증파문제에 발벗고 나서기로 마음을 정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자유 우방 국가의 군대를 월남전에 끌어들이려고 정치 외교 군사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모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은 그 대안으로 한국군 1개 보병사단의 증파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기 사작하였다.그러나 채명신은 선뜻 나서지 않고 뒷짐지고 있었다. 더 많은 조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1개 보병사단 증파 문제가 본국에서 제기되자 야당은 "사단 증파는 절대 안된다"고 반대했으며 일반 국민 또한 찬성,반대 양론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이나 군부에서는 1개 보병사단의 증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본국에서 구체적으로 증파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자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은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과 정식으로 합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채명신은 주 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박학선 대령과 주월미군사령부 대령 1명을 포함한 3명을 본국에 보내어 증파 필요성을 설득시키기 위해 서울로 보냈다. 그들은 유관 부서를 찾아다니며 증파의 필요성을 브리핑하는 등 열심히 증파 당위성을 설명하고 다녔다.

 육군본부에서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의 보고를 접하고 청와대의 암묵적 동의가 있자 1개 보병사단의 증파를 기정사실화해서 보병제9사단을 지정해 놓고 실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보병9사단의 통상명칭은 백마사단이다. 6.25한국전쟁시 마지막 고지쟁탈전을 할 때 백마고지 탈환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마고지 확보에 성공하자 그 이름을 따서 백마사단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점부터 발생하였다. 새로 증파되는 백마사단을 주월미군사령부에서 주월한국군사령관 작전지휘권 밖인 캄보디아 접경지대인 내륙 오지에 배치할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채명신의 생각과는 분명히 다른 부대 운영이었다. 미군으로서는 월맹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캄보디아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한국군이 차단해줄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채명신의 생각은 미군 지휘부의 기도와 달랐다. 첫째 미군 사단과 비해 한국군의 빈약한 장비로 내륙 깊숙이 배치되면 많은 위험이 따르며 채명신의 지휘통일이 불가능해진다는 결정적 약잠이 생긴다.전투병력 맹호,백마 2개 사단과 청룡 1개 여단 병력을 각각 멀리 떨어지게 한다면 채명신은 통합작전은 물론이고 지휘통신에도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만약 미군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면 증파되는 백마사단은 미군 야전군 사령관 지휘하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채명신의 주장의 근본은 주월한국군의 지휘통일에 근간을 두고 평야지대인 해안선을 확보하여 크고 작은 많은 항구의 안전과 1번도로의 통행을 보장하고 내륙으로 진격 소탕하는 작전개념이었다.

 그 해안의 최북단에 미 해병사단이 있고 남하해서 퀴논에 맹호사단, 그리고 더 남쪽의 캄란에 청룡 여단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부대 간격에 수시로 적이 침투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퀴논과 다낭의 1번도로에는 월남 경찰의 초소가 있을 뿐 부대다운 부대가 없었다. 그래서 그 중간인 뚜이호와에  백마사단을 배치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월미군사령부에서는 그곳에 미 제4사단을 배치하고 한국군 백마사단을 보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채명신은 주월미군사령부에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새로 증파될 예정인 백마사단을 주월사령관의 지휘권 밖인 월남의 오지에 배치시킨다면 한국 국회에서 야당의 반대를 설득하거나 국민 여론을 감당하기 힘들고 한국정부는 곤경에 빠질 것이다. 최악의 경우 증파가 취소되는 사태가 생길지도 모른다"

 증파 예정인 백마사단의 배치를 놓고 한,미 작전 실무자 간에도 계속 의견의 차이를 보여 갑론을박 논쟁은 계속 되었다.

 백마사단을 뚜이호아-나트랑-캄란 지역에 배치하는 문제는 작전지휘권 문제 다음으로 본국의 경제발전과 주월한국군의 장래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케 하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다. 그 지역은 미국이 월남전 수행에 필요한 모든 물자와 군수품, 각종 병기와 장비 등 전쟁수행에 필요한 각종 시설이 들어서게 되고 비행장 항만시설의 확장 등 엄청난 공사가 예정돼 있어 많은 미국 업체들이 속속 진출하게 되어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한국 업체들을 많이 끌어들이고 한국 노동자들이 미국 업체나 한국 업체에 취업시킬 수 있는 것이다.특히 파월 장병을 현지 제대시켜 이러한 업체에 취업시키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던 채명신으로서는 반드시 증파되는 백마사단을 이 지역에 배치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미군측 주장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월남전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군과 함께 어려운 오지에서 힘겨운 전쟁을 같이하자는 것이니 명분이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보도 후퇴하지 않고 버티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의 주장을 웨스트모얼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이 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는 드문 미국인이었기에 채명신의 애국심에 감화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내 웨스트모얼랜드 주월미군사령관은 휘하 미군 장성들을 달래가며 두 번째 채명신의 손을 들어주었다.

 새로 증파되는 백마사단의 전술책임지역을 채명신 원안대로 합의해 준 것이다. 이는 바로 한국의 경제발전에 첫 청신호를 올려준 축포였다.


 

◇백마 선발대의 물소 떼 소동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개념에 따라 백마사단이 전개한 전술책임지역은 투이호와로부터 1번도로와 철도에 연하여 팜람까지 약 270Km, 폭 50Km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전술책임지역 내에는 3개 성, 11개 군, 76개 읍 면이 있으며 면적은 약 3,000평방Km이고 3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업은 평야지대와 해안지대를 끼고 있었으므로 농업과 어업이며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동노만,빈호아, 나트랑, 캄란 만에는 항구, 비행장 등 주요 시설이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홍상운 대령이 지휘하는 백마 제29연대는 1966년 9월 25일에 월남에 도착 후 1번도로에 가해지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예하 대대를 사용한 두 번의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상황판단과 지형의 미숙 등으로  오히려 적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전사 4명, 전상 17명의 피해를 입고 소총 6정과 기관총 1정을 적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지금까지 파월 한국군이 총기를 적에게 빼앗긴 적은 없었는데 이번 백마사단의 초전의 실패는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이 첫 작전의 실패는 오히려 백마사단의 장병들에게는 월남전을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되며 쉬운 전쟁이 아니라는 경각심을 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연대는 계속 작전을 폈지만 다시 적의 기습사격으로 3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날고 뛰는 베트콩에게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백마 제28연대가 주둔한 투이호와까지의 1번도로를 개통시키는데는 성공하였다.

 맹호사단 초기에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는데 베트콩이 접근하는 줄 알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질을 했던 것과 같이 전투경험이 없는 병사들은 '제 방귀에 놀란다' 는 옛 속담처럼 사격군기가 서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전장에서 과도기적 전쟁공포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초전에는 흔히 있었던 병폐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포를 지나면 사병들의 그런 공포심은 없어지는 것이 통상이었다.

 백마사단 본대가 파월하기 전 부사단장 백문 준장이 인솔하는 선발대가 닌호와에 도착했다. 숙영지 외곽 경계를 위해 야간 매복을 내보냈는데 그 매복진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수류탄을 투척하고 기관총을 발사하는 등 격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 생겼다. 날이 새면서 격전장 전방을 살피니 난데없이 물소 20 마리가 죽어 자빠져 있었다. 매복진지에 접근한 것은 적이 아니라 물소 떼였던 것이다.

 아침 10시가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월남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아우성쳤다. "물소 값 물어내라" 는 것이었다. 조금 있더니 그 고장 군수와 서장까지 나타났다. 백문 부사단장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에 있었던 사실을 보고 했다. 내용인즉 물소를 죽였는데 물소 값 내라는 것인데 백마사단 선발대로 왔으니 돈이 없다고 했다.

채명신은 '월남에 와서 별 보고를 다 받아본다' 고 기분은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 값을 변상해 주고 민심을 달래라. 소 값은 소 임자가 달라는 대로 줘라"고 나무란 뒤 사령부에 있는 돈 다 털어서 3,000달러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사령부에서 보내온 달러를 받은 백문 부사단장은 소 임자들과 달라는 대로 주겠다며 흥정을 하니 한 마리에 30달러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 말을 떠올리며 백문 부사단장은 군수와 경찰서장 입회하에 마리 당 100달러씩 20마리 값 2,000달러를 배상했다. 그렇게 되면 죽은 물소가 백마사단 차지가 되어야 옳은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몇 마리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해서 다섯 마리를 떼어 주니 군수가 또 달라기에 또 주고 소 임자까지 사정해서 나머지를 모두 나누어 주는 것으로 그날의 해프닝은 끝났다.

 그런데 그 해프닝은 손해가 아니었다. 닌호와 인심이 확 돌아섰다. 과거 일본군이나 프랑스군 그리고 미군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외국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주민들이 "따이한의 협조자' 가 된 것이었다. 이 해프닝으로 말미암아 백마는 망아지 과정을 거쳐 이름 그대로 백마로 거듭나게 되었다.

 중공의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처음으로 게릴라전을 시작할 때 부하들에게 하달한 '8개 항목' 중 하나가 "물건을 살 때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정당한 가격을 주도록 하라" 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채명신은 그 일을 떠올리며 3,000달러를 백문 부사단장에게 보낸 것이었다. 소값 2,000달러는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 더 아군에게 유익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맹호사단 장병이 처음 월남에 도착 직후 밤을 무서워 했던 것처럼 백마사단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채명신이 기다렸더니 과연 백마 또한 맹호처럼 제 값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다.

 파월 백마사단의 초대 사단장은 이소동 소장이었다. 백마사단 본대가 도착하여 이 물소 떼 소동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사단장은 큰소리를 웃는 것이었다. 혼줄이 날까 보아 긴장하고 있던 부사단장 이하 참모들은 사단장의 웃는 모습을 보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의아해 했다. 그렇다고 함께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은 다시 웃으며

   "사단장 이름이 소동이니 백마사단이 소동을 벌였구먼, 잘 했어, 잘 했어 !."

그때서야 백문 부사단장 이하 참모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백마 길들이기 작전 

백마 도깨비 2호작전 (동영상에서 갭쳐했음)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백마사단 증파 이후 많은 관심을 백마사단에 집중해야 했다. 주월미군 사령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백마사단을 베트남 오지에 투입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막는 길은 배치된 전술책임지역에서의 활발한 탐색전을 전개하는 길 밖에 없었다. 더구나 백마사단이 파월 초기이기에 갖은 실책이 이어져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최명재 대령이 지휘하는 제28연대는 1966년 10월 17일 미 제101공수여단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한 후 지역 내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혼바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작전계획을 세웠다.

 혼바산 일대의 고지군은 전체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단부에서 정상까지 많은 천연 동굴이 있었다. 바로 맹호6호작전의 목표지역이었던 푸캇 산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백마사단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가기 전인데도 불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0월 23일. 2대대장 오상욱 중령이 지형 정찰을 하다가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폭발하여 대대장과 부하 4명이 순직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오 중령의 순직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사결과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투경험이 없는 부하들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겁내자 스스로 앞장서서 진로를 개척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번 이 일에 대해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대대장이 나서야 되는 지형 정찰이 아니었다는 것과 둘째, 부주의가 불러낸 사고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진로 개척시는 지뢰나 부비트랩에 의한 사전 대비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채명신은 즉각 오 중령 후임으로 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 중인 김기택 소령을 임시 중령 계급을 부여 대대장으로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대대장에 의해 작전은 계속되었다.

 채명신은 11월 28일 낮 12시 경 백마사단장 이소동 소장과 함께 최명재 대령의 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작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내용을 듣고 보니 작전과정 하나하나가 맹호사단이 실시한 맹호6호작전의 초기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채명신은 이자리에서 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에게 맹호6호작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면서 맹호6호작전에서 얻은 교훈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또한 채명신은 이번 작전을 서둘지 않게 하면서 시일에 구애 받지 말고 샅샅이 탐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제28연대는 작전 방식을 바꾸어 일시에 구애받지 않고 맹호6호작전의 방식대로 작전을 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드디어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1월 29일.2대대 5중대 3소대가 혼바산 서북단 계곡 일대를 탐색 중 인기척이 엿보인 위장한 동굴입구를 발견하였다. 즉시 동굴 입구를 포위하고 특공조를 투입하면서 수류탄을 투척 후 깊숙히 진입 사격으로 제압하여 동굴 안 적을 모두 사살하였다.21명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소총 2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제1대대 1중대 또한 혼바산 북단에서 동굴에 은신 중인 적과 교전 7명을 사살하고 소총 4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두 경우를 보아 맹호6호작전에서의 푸캇산 동굴 수색 방식이 실효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연대장은 예하 장병에게 시일에 구애받지 말고 동굴 수색에 역량을 집중하도록 다시 강조했다.

 12월 1일에는 2대대 5중대가 동굴 탐색 중 기름칠을 해서 3정씩 포장하여 깊숙이 숨겨 둔 프랑스제 마우저 소총 72정을 찾아냈다. 적이 도주하면서 숨겨둔 것으로 추정했다. 같은 날 2대대 7중대 3소대도 동굴 탐색 중 두 곳에서 기름칠 해서 포장한 프랑스제 마우저 소총 84정을 찾아냈다.그런데 포장된 소총은 장기간 숨겨둔 탓인지 녹슬어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계속 탐색하니 포장 채 숨겨 둔 마우저 소총을 더 찾아냈다. 이를 분석한 결과 이소총은 프랑스군이 패주 당시 숨겨 둔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그후 확인되지는 않았다.

 제28연대의 혼바산 탐색작전은 적 6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에서 마우저 소총 285정과 기관총 4정을 비롯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작전은 백마사단이 파병 이래 의미 있는 첫 전투로 기록됨과 동시에 백마사단 장병들에게 전장에서 자신감을 갖게 한 동기부여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 작전에서 아군 피해는 전사 3명,전상22명이었다.

 백마사단이 도착한 이래 제28연대 2개 대대를 투입한 이 작전으로 혼바산 일대에서 발판을 잃은 베트콩은 1번도로 서측의 혹놈산,사레오산 차이산 등으로 피해 가서 이곳 지방 게릴라와 합세하여 투이호아 평야지대는 물론 1번도로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은 때때로 반탄강 상류까지 침투하여 주민을 위협하는 등 횡포가 잦았다. 더구나 맹호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1번도로 상에는 단 한 번 도로상에 지뢰를 감히 매설을 못하고 있었는데 백마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1번도로상에는 빈번히 지뢰를 설치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백마사단은 이에 마두1호작전을 전개하여 이 지역 평정에 나섰다.

 1967년 1월 29일에 개시한 마두1호작전은 사실상 백마1호작전의 전 단계 작전이었다. 백마1호작전은 사단장 이소동 소장에 의해 지휘되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백마사단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예상 목표지역을 타격 후 탐색하는 방식을 취했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공중기동작전으로 일시에 2개 대대를 투입하는 대규모 기동작전이 전개되었다. 수백대의 헬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어가며 백마사단 장병을 실어나르는 굉장한 광경은 채명신을 위시한 모든 한국군 지휘관에게 각별한 감회에 젖게 하였다. 6.25당시 소총만으로 싸워야 했던 이들 지휘관의 눈에 비추어진 이 현대전의 파노라마는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보람과 명분을 느끼게 했다. 무전기 요청 하나만으로 B52중폭격기 편대가 날아와 융단폭격을 하는 그 입체작전은 아마 50년 후 지금의 한국군도 경험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사단은 백마1호작전을 통하여 닌호아와 나트랑 지역의 한국군은 물론 미군과 월남 국민에게 위협을 가하던 베트콩과 월맨군 제188연대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한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왜냐하면 백마사단이 상륙한지 불과 3개월만에 사단급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적에게 백마사단의 위엄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적이 백마사단을 함부로 넘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력 유지를 위해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군은 언제나 아군의 약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 약점을 꼬리잡아 타격하는 것을 기본전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백마사단의 이번 작전으로 적393명을 사살하고 포로 31명 소화기 271정,중화기 33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전사19명, 전상 35명의 아군피해를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 작전 기간 중 질병 등으로 인한 76명의 비 전투 손실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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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단 | 작성시간 14.02.03 채장군님의 국군 현대화에 대한 집념에 목이 매입니다. 맹호부대에 이여 백마사단까지 원남전으로 현대화되여 이북과 대치하고있는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읍니다.미군이 우리에게 투자한만큼 열심히 사워주신 장병들에 경의를 표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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